미국이란 나라를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때론 미국인들의 삶이 부러울 때가 많다. 몇 년 전 우리학교에 원어민 교사로 머물렀던 티파니선생도 그 대상이었다. 시카코 출신인 티파니는 영문학과 언어학을 전공하고 세계 각 지역을 돌아다니며 영어교사를 하고 있었다. 미국에 돌아가서는 교사를 하겠다는 꿈도 있었다. 평소에는 검소하게 살면서 절약한 돈으로 방학 때면 일본과 동남아 여러 나라들을 여행했다. 나는 우리와 별반 다를 것 없는 듯하면서도 본질적으로 다른 그들의 가치관과 ‘자유’가 부러웠다. 혹자는 부러워만 하지 말고 당신도 그렇게 해보라고 말하겠지만 우리는 그들처럼 ‘영어’라는 권력적인 언어를 갖고 있지 못하고 미국시민도 아니며, 1, 2년씩 직장을 쉬면서 해외여행 할 여유도 거의 없는 사람들이다. 로버트 파우저는 미국 미시간주 출생의 언어학자다. 일본어와 한국어에 관심을 갖고 일본과 한국에서 어학연수를 했으며, 불과 20대 후반에 석사학위를 갖고도 고려대학교 강단에 섰던 인물이다. 30대 초에 시작한 박사학위로 일본 최고의 교토대학 교수가 되었으며, 서울대학교 국어교육과 교수로도 일했다. 물론 이 같은 경력을 쌓는 과정에는 젊은 시절 열정 넘치는 공부를 했고 풍부한 경험을 축적했기 때문이겠지만 미국시민이라는 신분도 뒷배경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서촌홀릭’은 로버트 파우저의 저작이다. 경복궁의 서쪽에 위치했고, 한양의 백호에 해당되는 인왕산 아래에 위치하며, 동쪽의 북촌과 대비하여 ‘서촌’이라고 부르는 이 동네는 다양한 역사적 스토리를 품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의관이나 역관처럼 중인계층의 주거지였으며 내관들도 이곳에 거처가 있었다. 겸제 정선도 서촌에 머물며 ‘인왕제색도’를 그렸다. 근대 이후에는 시인 윤동주와 이상, 이중섭같은 가난한 시인과 화가들이 머물렀던 파리의 몽마르뜨였다. 하지만 1960, 70년대 이후 우리사회가 천박한 물질주의에 경도되면서 서촌은 개발에서 밀려난 낙후된 마을이라는 이미지로 각인되었다. 그러다보니 서촌 담벼락에도 ‘서울시장, 네가 한옥에서 살아봐!’와 같은 구호가 쓰였고 개발을 촉구하는 현수막이 나부끼기 시작했다. 과거 역사의식이 박약했던 정부도 재개발프로젝트를 발주하며 개발논리에 부응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2010년 전후부터 인사동과 북촌의 상업적 변화에 식상하고 성냥갑 같은 아파트에 지친 도시민들이 서촌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어릴 적 뛰놀았던 옛 마을, 옛집, 옛 골목, 옛 시장은 문화적 가치를 지닌 자산이라는 사실에 주목하면서 새로운 힐링공간으로 급부상했다.

로버트 파우저는 서촌의 역사와 풍경에 ‘홀릭’한 사람이다. 세상이 부러워하는 명문대학의 교수직조차 자신의 철학과 맞지 않거나 재미가 없으면 훌훌 털어버리는 진정한 자유주의자며 어려서부터 건축학과 역사학에 대단한 심미안을 갖고 있는 파우저는, 일찍이 교토와 서울에서도 머물 곳을 까다롭게 선택하고 즐겼던 사람이었다. ‘서촌홀릭’은 서울대교수로 재직할 때 살았던 ‘서촌’에 대한 이야기다. 교토와 가고시마, 서울 등 전통의 도시에 깊이 침잠했던 사람답게 그의 책에는 도시와 건축의 역사성, 문화적 가치, 교토와 서울 사이의 서로의 특징과 장단점을 고스란히 담았다. 전통의 마을과 골목과 한옥에 대한 깊은 애정, 이것들을 지키고 보존하기 위해 몸으로 행동했던 실천적 삶도 이 책을 흥미롭게 만드는 요소다. 전통문화의 가치를 깨닫지 못하고 개발과 이익에만 경도된 우리사회에 던지는 메시지 또한 엄중하다.

우리는 ‘내 나라, 내 고장’은 이곳에서 평생을 살아온 내가 가장 잘 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꼭 그렇지는 않다. 아무리 오래 살았어도 실제로는 청맹과니인 경우가 많고 안다고 해도 왜곡되게 인식하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제대로 ‘안다’는 것은 관심이 있을 때만 가능하고, 관점도 중요하며, 우리 내면을 깊이 들여다보고 그것을 객관화시켰을 때, 한 걸음 물러나 바라봤을 때만 가능하다. 로버트 파우저의 책은 우리 내면의 객관화란 측면에서 미덕(美德)이 있다. 한걸음 물러서서 나와 우리를 바라보는 마음으로 일독을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