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재들이여, 길을 나서라

박경순 시인 / 사진작가협회 평택시지부장

[평택시민신문] 나는 오빠가 없다. 그래서 오빠라는 말이 입 안에서 뱅뱅 맴돌기 일쑤다. 주위에서 오빠라는 말을 입 안의 혀처럼 부르는 여성들을 보면 부럽기도 하고 뜨악해지기도 한다.

우리 집에 없는 오빠들이 이모네는 네 명이나 있었다. 유년기에 자랐던 마을에는 우리 집 가까이 이모네가 살았고, 나 보다 한 살 어린 이종 여동생이 있었다. 나에게 없는 오빠들을 네 명씩이나 둔 외동딸인 그녀가 부럽기도 하고 나를 마냥 예뻐하던 오빠들이 있어, 한때 이모네서 살다시피 한 적도 있었다. 그 중 큰 오빠는 내가 시집올 때, 부모님 대신 장롱을 들여 놓으며 믿음직한 오빠 역할을 해 주었다. 내가 중,고등학교를 다니던 시절에 S오빠라는 말이 유행했을 정도로 주변을 누비던 그 많은 오빠들은 다 어디에 있을까?

날씨가 쌀쌀해진다는 이유로 걷기에 게으름을 피우고 있을 즈음, 섶길 카페를 통해 걷기 제안이 들어 왔다. 신왕리 여선재 근처로 이사를 왔다는 C라는 여자 분이었다. 걷기 매니아 로서 평택으로 이사 온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걷기 좋은 곳을 찾아보다가 섶길을 알게 되었다고 간단히 자신을 소개했다.

원신왕리 마을 회관 앞에서 만나기로 하고 약속시간에 맞춰 갔다. C라는 분 혼자 나올 줄 알았는데 동네 어르신으로 보이는 분들 서너 분이 함께 계셨다. 한도숙 (섶길위원이자 해설가 ) 님이 모시고 온 분들로 인사를 나누었다. 늦잠을 자다 불려 왔노라며 부스스한 모습으로 멋쩍게 인사를 나누고 명상길 코스를 걷기 시작하였다. 나는 사진을 찍기 위해 그 분들 보다 약간 뒤에 서서 걸었다. 신왕리 들판을 막 걷기 시작할 무렵 그 분들의 뒷모습에서 ‘오빠들’의 모습이 보였다. 마치 왕년에 동네에서 주름을 잡았던 소위 ‘한가락’ 하던 오빠들의 모습을 떠올리며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옆에 있던 C라는 여자 분에게 내 느낌을 말했더니, 자신도 그렇게 느꼈다며 공감을 표시했다. 그저 그런 아저씨들, 머리 벗겨지고, 배가 나온 중년 남자에서 늠름한 오빠의 모습으로 뒤바뀐 것은 바로 그 뒷모습 때문이었다.

뒷모습은 선입감을 갖지 않아 정직하고 얼굴에서 보여 줄 수 없는 많은 것들을 보여 준다는 걸 새삼 느꼈다. 앞에서 다가오는 세월들을 막아내고 꿋꿋하게 지켜 온 생의 뒤안길을 담고 있다는 것을 명확하게 확인하는 순간이기도 했다.

논길을 가득 메우고 흙먼지를 일으키며 걷는 모습, 아직도 치기가 남아 있는 듯 거들먹거리는 듯한 발걸음들, 중간중간 한 도숙 님의 해설을 제법 진지하게 들으며 질문을 하는 모습 등이 눈에 비췄다. 마치 영화의 첫 장면에서 느껴지는 비장함과 스토리를 담고 있는 것처럼 장면들이 펼쳐졌다. 아직도 패기가 살아 있다는 눈빛과 주막이 있던 자리에 색시들이 많았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침을 꼴깍 넘기는 것도 같았다. 초겨울의 추위와 적당한 겨울 바람에 잠바가 빵빵해지고 바짓가랑이가 살짝 휘날리는 오빠들의 뒷모습을 보며 걷느라, 추위도 잊고 카메라의 무게도 잊었다.

문 정희 시인은 시에서 ‘키 큰 남자들은 다 어디로 갔나 ’ 하며 남성들의 이미지가 여성화 되고 약화되는 거에 대한 아쉬움을 시로 표현하기도 했다. 마냥 기대고 싶고 어떤 간청이라도 들어 줄 것 같은 오빠들은 지금 어디에 살고 있는 것일까. 그런 생각들을 종종 해 보며 노래방에 가면 현숙의 노래 ‘오빠는 잘 있단다’ 를 목청껏 부르기도 했다. 그 날 신왕리 들판길과 평택호반 길을 걸어 광덕산 기슭을 바짓단 휘날리며 걷는 뒷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 뿌듯했다. 기억 속에서 길은 살아 있고, 아재들이여 길을 나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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