팽성 대추리쪽 ‘장 서방네 노을길’에서 장서방을 그리다

박경순 시인 / 사진작가협회 평택시지부장

[평택시민신문] 사진공부를 시작할 때 일출과 일몰 사진 찍기에 시간과 열정을 쏟았던 적이 있다. 자신을 붉게 태우는 그 태양 앞에서 뜨거워지는 심장을 느끼며 내 삶의 분화구도 끓어올랐던 것 같다.

사진 전시를 보러 온 사람들이 묻곤 했다. 사진을 보며 일출광경이냐 일몰이냐를 물으며 집에 걸 때는 일출 사진이 좋다고 말하기도 했다. 사진 상으로는 일출과 일몰을 구분하기 애매모호한 장면이 있게 마련이다.

일출은 희망을 상징한다고 일반적으로 생각하다보니 그런 질문들을 하는 것 같았다. 한 분야에서 오래 종사하다보면 많은 변화들이 일어나는 건 당연하다. 어느 순간 노을 앞에서 뜨겁게 솟구치는 내 안의 용암 덩어리 같은 게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바야흐로 내가 해를 등지고 걷는 나이가 되었다는 걸 온 몸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것은 허무의 그림자를 끌어안고 불 속이라도 뛰어 들고 싶은 불나비 같은 심정이라고나 할까. 그렇게 나에게 노을은 뜨겁게 오고 있었다. 노을을 함께 볼 사람을 만나고 싶다는 졸시를 긁적거리던 시기이기도 했다.

섶길 코스 중 ‘장서방네 노을길’ 을 걸으며 내게로 왔던 노을에 대한 감회도 특이했다. 왜 하필이면 장 서방네 노을길이란 이름을 찾아냈을까 궁금했다. 그 길에는 이 시대의 음유 시인으로 불리는 가수 정 태춘이 태어나 자란 집이 있었고 그의 노래 ‘장서방네 노을’ 이 있다는 걸 알았다. 그래서 그 길에는 정 태춘의 노래비가 아담한 돌에 새겨져 있다.

점점 잘 보존된 농가에 마음을 끌리는 것도 노을을 본 까닭일까? 장서방네 노을길을 걷던 중 어느 집 앞에서 발길을 멈추었다. 낡은 자전거를 담장으로 해 놓은 집 앞에는 우체통이 한가롭게 놓여 있었고 활짝 열린 대문으로 들여다 본 앞마당은 잘 가꾼 텃밭이자 정원이었다. 비싼 나무로 정돈된 도시의 정원이 아니라 한 뼘의 땅도 놀리는 곳이 없이 알뜰살뜰 가꾸어진 곳이었다. 담장에는 오이들과 호박이, 그 아래로는 방울토마토, 가지, 상추, 골파, 부추 등등 각종 채소들이 화초들보다 더 예쁘게 자라고 있었다. 시선을 돌리는 곳마다 채송화, 금잔화 등 자잘한 꽃들에게서 주인의 손길을 느끼며 호흡을 멈추게 했다. 선풍기 둥근 철망은 커다란 박의 받침대로 재활용되고 퇴비와 장작을 쌓아놓은 솜씨는 멋진 건축물을 방불케 했다. 무단 침입자라는 것도 까맣게 잊어버리고 그 집안을 둘러보는데 점입가경이 되었다. 내심 주인이 궁금해지기도 하고 버럭 화를 내면 어쩌나 마음 졸이기도 하며 하나하나 꼼꼼히 살펴보았다. 보면 볼수록 호기심이 생기고 예술적 경지까지 느껴지게 했다. 버려진 물건들이 제법 용도에 맞게 쓰이며 모두들 새롭게 태어난 곳에서 생기 있게 숨 쉬고 있는 숨결이 전해져 왔다.

이른 점심을 드셨는지 안에서 인기척을 하며 나오던 주인(이 필수 씨)은 의외로 뭐 찍을 게 있느냐며 인자하게 말을 건네셨다. 나도 한때는 많이 찍었다며 할 수 있을 때 열심히 하라고 격려까지 하셨다. 그러면서 묻지도 않았는데, 자신의 이력을 술술 털어 놓으셨다. 나이는 여든이며 날마다 섶길 코스를 걷는데, 주변에 산이 없는 게 아쉽다고 하셨다. 초등학교를 다 마치지 못하고 열여섯에 무작정 서울로 상경해 안 해 본 일 없다며 길게 담배 연기를 내뿜으셨다. 담배 연기에 묻힌 반백의 머리칼과 수염이 거장의 모습으로 비추어보였다. 마치 노을 앞에서 뜨거워지는 그 이유를 다시 느낄 수 있었다. 연신 셔터를 눌러도 전혀 거부하시지 않는 모습에서 자신의 삶을 뜨겁게 태우고 살아오신 분의 당당함이 엿보였다. 처음 이곳으로 내려 왔을 때, 아내가 서울로 가자고 종용했는데 이제는 이곳을 떠나 못 살 거 같다는 그의 아내는 사진 찍는 일을 어색해 하는 순박한 분이었다. 직접 심은 밤나무에서 수확한 밤이라며 한 되 남짓하게 건네 주셨다. 사 먹는 건 커피 뿐이라는 말씀에 내가 준비해 간 커피 한 병을 드렸다. 한 사람이 온다는 것은 실로 어마어마한 일이라는 어느 시인의 시를 떠올려 보았다. 한 사람이 온다는 것은 그와 관련된 시대와 사람들 전체 역사가 온다는 것이니까.

 

※ 이 글은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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