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택 안성 경계 소사동 삼남대로변 위치…아이들 손잡고 걸어서 다녀올 수 있는 유적

평택의 역사와 문화기행-15

김해규 (한관여고 교사)

주말에 답사할 수 있는 유적


주말이 되면 가까운 사람들로부터 아이들과 바람이나 쐬고 올 유적지가 없느냐는 질문을 받는다. 그럴 때마다 내가 즐겁게 추천하는 유적이 대동법시행기념비와 원균 장군 묘이다. 원균 장군 묘는 평택시 도일동으로 가는 버스를 타고 가야 하는 번거러움이 있지만, 대동법시행기념비는 뉴코아백화점 부근에 사는 사람들은 아이들의 손을 잡고 걸어서 다녀 올 수 있는 유적이다.

대동법시행기념비가 있는 곳은 평택시 소사동이다. 소사동은 평택의 상징인 소사벌을 앞에 두고 있는 마을이다. 조선시대에는 소사천을 건너는 소사교라는 다리가 있는 마을로도 유명하였다. 소사동은 조선시대 내내 양성현 땅이었다. 그러다가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개편으로 안성군 양성면 지역이 되었다가, 1982년 평택시로 편입된 지역이다. 그래서 지금도 이곳에는 옛 양성현과 안성군의 흔적들이 일부 남아있다.
소사동은 지리적으로 평택시와 안성시의 경계이기도 했지만, 남쪽으로는 안성천을 사이에 두고 충청남도 천안시와 경계를 이룬다. 이 지역은 몇 년 전 행정구역 개편으로 천안시에 속하게 되었지만 조선시대에는 직산현 땅이었기 때문에, 소사동은 충청도에서 경기도로 넘어오는 관문(關門)이었다. 그래서 조선시대에는 이곳으로 전국 10 대로(大路) 가운데 하나였던 삼남대로(三南大路)가 지났으며, 구간별로는 성환찰방의 관할구역이었다. 그래서 한양과 충청도나 전라도지방을 오가는 사람들의 이동이 잦았고, 물자의 유통도 빈번하였다. 이와 같은 지리적 조건 때문에 조선시대에는 소사원이라는 역원(驛院)이 설치되었으며, 조선 후기에는 점막과 시장이 형성되기도 하였다. 소사동에 대동법시행기념비가 세워지게 된 것은, 이와 같은 지리적 조건이 큰 역할을 하였다.

조선시대에 성공한 개혁 대동법(大同法)

김대중 정권 들어 많은 개혁 입법이 개정 또는 제정되고 있다. 이전 정권에서 인권과 사상을 탄압하는 도구였던 국가보안법 개정이 그렇고, 인권법이나 부패방지법, 사립학교법 등의 제정 및 개정이 그렇다. 하지만 현재 진행되는 과정을 볼 때 이 법들이 제 모양을 갖춰 시행되기는 벌써부터 틀린 것 같다. 본래 개혁(改革)은 지배층의 기득권을 축소하고 약자의 이익과 권리를 향상시킨다는 것을 기본 내용으로 한다. 그렇기 때문에 개혁에는 기득권층의 저항과 훼방이 뒤따른다. 그래서 사람들은 혁명보다 어려운 것이 개혁이라고까지 말을 한다.

역사적으로 기득권층의 저항을 극복하고 성공한 개혁은 매우 드물다. 만약 성공한 개혁이 있다면 그것은 큰 사건임에 틀림없다. 대동법(大同法)은 조선시대에 성공한 개혁으로는 첫 손가락에 꼽히는 사건이다. 이 개혁은 조선 중기 농민생활을 피폐시켰던 공납(貢納)제도를 개혁한 것이었다. 공납은 각 지방에서 생산되는 토산물을 현물로 바치는 현물납(現物納)제도였다. 그런데 징수방식이 일정한 양을 지역마다 할당하여 민호(民戶)를 기준으로 징수하였기 때문에 가난한 농민들에게는 큰 부담이 되었다. 또 같은 공납 안에도 정기적으로 바치는 상공과, 부족한 물자를 추가로 바치는 별공, 그리고 특별히 바치는 진상으로 나눠져 있어서 한 해에도 여러 차례 징수하기가 일쑤였다. 그래서 농민들은 공납을 감당하지 못해 향리나 서리 또는 상인들에게 대신 납부하게 하고(防納) 가을에 높은 이자와 함께 갚는 경우가 많아서, 농가부채를 감당하지 못한 농민들이 농토와 고향을 버리고 도주하여 유랑민이 되거나 도적이 되기도 하였다.

공납의 폐단으로 인한 농촌사회의 붕괴와 사회불안은, 농민층을 기반으로 하는 조선왕조와 일부 사대부층에게 위기의식을 갖게하였다. 이와 같은 분위기에서 조선 중기 이이나 유성룡 등은 민호(民戶) 단위로 징수하는 공납제도를 토지(土地)를 기준으로 징수하고, 쌀로 통일하여 내게 하자는 수미법(收米法)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수미법은 가난한 농민들에게는 조세 탕감의 효과가 있었지만, 지주들에게는 조세부담이 크게 늘어나는 제도였다. 이와 같은 내용 때문에 양반 지주(地主)들과, 다양한 토산물 징수에 따른 농간으로 이득을 보는 관리나 서리들 그리고 대상인층의 적극적인 반대로 실현되지 못하였다.

공납제도의 개혁이 실현된 것은 임진왜란 직후인 광해군 때(17.C초)였다. 전쟁으로 피폐해진 국토를 재건하고 민중들의 불만을 어느 정도 해소하기 위해서는 농민생활의 안정이 필요했던 광해군 정권은, 이원익의 건의를 받아들여 대동법(大同法)이라는 이름으로 경기도에 시범 실시하였다. 시범실시는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지만, 전국적인 실시를 놓고 지배층은 찬반양론으로 나뉘어 소모적인 논쟁을 벌였다. 이들은 자신들의 권력과 양반 신분층이라는 기득권을 앞세워 개혁의 발목을 잡았다. 지배층의 강력한 반발과 이해계층인 대상인과 서리층의 로비로 전국적 실시가 어려웠던 대동법(大同法)의 전국적 실시에 물꼬를 튼 사람은 잠곡 김육이었다.

김육과 대동법시행기념비(大同法施行紀念碑)

잠곡 김육(金堉, 1580-1658)은 서울 마포에서 출생하였으나 젊은 시절 경기도 가평의 잠곡동으로 이주하여 살았다. 그는 학문적으로 조선시대 예학(禮學)의 대가였던 김장생의 문하에서 공부를 하였다. 나이 26세에 사마시에 합격하였지만 학문적으로 서인(西人)으로 분류된 탓에 북인정권이 득세하였던 광해군 때에는 관직에 나아가지 못하였다. 김육이 관직에 나간 것은 인조반정 후 서인들이 정권을 잡으면서였다.

관직에 진출한 후에는 약간의 부침도 있었지만, 김육은 인조와 효종의 신임을 받으며 영의정, 우의정, 예조판서, 대사헌 등 요직을 두루 거쳤다. 그가 순탄한 관직생활을 하게 된 것은 경세(經世)와 외교에 밝은 능력 때문이었지만, 정치적으로 볼 때는 대신주도의 정치를 지향했던 충청도 서인들과는 달리, 왕권강화적 입장에 있었던 그의 사상이 효종과 같은 왕권강화를 추구하는 왕들에게 받아들여졌기 때문이었다. 김육은 정권의 요직에 있으면서 인재의 고른 등용, 동전의 전국적 유통, 시헌력의 사용 등 많은 치적을 쌓았다. 그 중에서 그가 필생의 노력을 기울인 가장 큰 업적이라면 대동법의 전국적 실시를 위한 노력일 것이다.

대동법 실시의 필요성은 일찍부터 가지고 있었지만, 김육이 이 문제를 위해 본격적으로 노력한 시기는 우의정에 등용된 1649년 이후였다. 그는 특히 대동법이 효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양반이 많고 농토가 넓은 전라도와 충청도에 대동법이 실시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같은 주장에 제기되자 전라도 뿐 아니라 김집이나 송시열 등 집권 서인세력의 근거지였던 충청도 양반들이 크게 반발하였다. 그러나 김육은 "대동법은 세금을 고르게 하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기 위한 것이니 실로 시대를 구할 계책입니다.... 삼남에는 부자가 많아 이 제도의 시행을 좋아하지 않지만, 어찌 부자들을 꺼려하여 백성에게 편리한 법을 시행하지 않겠습니까"라는 상소문을 왕께 올리며 전국적인 확대실시에 강한 의지를 보였다. 김육의 끈질긴 노력으로 1651년 충청도에 대동법이 실시되었고, 죽기 직전인 1658년에는 전라도에대동법이 실시되었다. 기록에 의하면 그의 노력으로 충청도에 대동법이 실시되자 길을 가는 노인도, 김을 메는 농부도 모두가 좋아서 더덩실 춤을 추었다고 한다. 이와 같은 현상은 대동법 실시에 대한 농민들의 기대와 효과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김육은 1658년 79세의 나이로 죽었다. 김육이 죽자 충청도 사람들은 애통한 마음을 담아 제문을 지어 추도하고 부의금을 모아서 조문하였다. 충청도 사람들이 부의금을 걷기 위하여 충청도 각 읍에 돌린 통문을 보면, "김육이 충청도에 대동법을 실시하여 지난 8년 동안 편히 지내왔으므로 김육의 별세를 부모상을 당한 것처럼 슬퍼한다"고 되어 있다. 그러나 상가(喪家)에서는 이들의 부의금을 받지 않았다. 평소 검약한 생활을 몸소 실천하였던 김육의 뜻을 받든 것이리라. 그러자 이들은 왕에게 상소를 올리고, 김육의 공덕을 기리는 선혜비를 충청도에서 경기도로 넘어오는 관문인 소사동 삼남대로변에 세웠다.

돌아오는 길에

소사동은 구한말 철도와 신작로가 건설되면서 대로변으로서의 기능을 잃었다. 그래서 평택 사람들 중에는 소사동이 어디에 있는지 조차 모르는 사람이 많다. 삼남대로 큰길을 오가는 사람들이 김육의 높은 뜻과 의지를 기억하라고 세워놓은 대동법시행기념비도, 근대들어 삼남대로가 큰길의 역할을 상실하면서 잊혀진 유물이 되었다. 심지어 경기도 내 금석문을 모아놓은 "경기금석대관"이라는 책에서조차, 원문의 해석을 싣지 않고 1980년대 초 임창순 선생이 풀어써서 비석 앞에 세워둔 안내문의 내용을 베껴 싣고 있다. 이런 외면과 홀대가 있었으면서도 이 비(碑)는 자신의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다.

돌아오는 길에 인간 김육의 삶을 다시 한 번 되새긴다. 그리고 그가 살았던 시대만큼이나 척박한 우리의 현실 속에서 김육과 같은 생각과 의지를 가진 인물이 없음을 한탄한다. 사람들은 역사의 진보를 이야기하고 우리시대의 진보를 말하지만, 분명한 것은 우리시대가 조선 후기보다 못하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더욱 자존심 상하고 속 터진다.

<역사/문화기행>
저작권자 © 평택시민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