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과 지역사의 시각차 검토해 지역학 발전 계기 삼아야”

“일제강점기 안중과 서정리는 새로운 조선인 경제력 상승기지”

팽성난민정착사업 대상 난민…권리 인정 못 받고 강제 이주

국사편찬위원회(이하 국편)와 평택문화원이 공동 주최한 2017년 상반기 국사편찬위원회 지역사 워크숍이 18일 오후 2시부터 저녁 7시까지 평택남부문예회관 3층 세미나실에서 열렸다.

이번 워크숍은 ‘평택 지역의 근대적 공간 변동과 유지 및 농민들’이라는 주제로 지역사 자료의 수집과 서술의 연계를 통해 사료 수집의 내실화를 꾀하고 지역사적 쟁점에 대한 지역과 중앙의 시각을 교차시켜 지역사 연구의 저변을 확대하기 위해 마련됐다.

한긍희 국편 사료조사실장의 개회사와 김은호 평택문화원장의 환영사로 시작된 워크숍은 1·2부로 나뉘어 각 2개 주제씩 발표와 토론이 이루어진 후 종합토론을 끝으로 마무리됐다.

1부에서는 성주현 청암대 교수가 ‘근대 평택지역 행정구역의 변화와 평택의 정체성 모색’을, 김인호 동의대 교수가 ‘일제강점기 평택 경제인의 지역별 실태’에 대해 발표하고 김대호 국편 편사연구사와 홍종욱 서울대 인문학연구원 교수가 지정토론했다.

2부에서는 안승택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교수가 ‘농민적 환경 지식의 혼종성과 지역성’을, 김아람 박사가 ‘평택의 난민정착사업과 농지소유 변동’에 대해 각각 발표하고 장연환 효명고 교사와 김해규 평택지역문화연구소장이 토론자로 나서 의견을 나누었다.

김은호 평택문화원장은 “이 워크숍은 연구교류를 통해 지역과 중앙의 시각 차이를 검토해 보는 의미 있는 시간”이라면서 “중앙과 지역사의 시각차를 토대로 지역사를 한층 더 발전시키는 기회가 됐다”고 밝혔다.

 

■ 제1부

성주현 청암대 교수

근대 평택의 행정구역 변화와 정체성 모색

평택은 삼국시대부터 지역사를 가지고 있지만 진위는 신라, 평택은 고려시대에 명명됐다. 이후 경기도와 충청도를 오가며 근대를 맞고 일제강점기인 1914년 3월 진위와 평택이 진위군으로 통합되었다가 1938년 평택군으로 변경됐다. 해방 이후 평택군은 송탄시와 구 평택시, 평택군으로 분구되었다가 1995년 재통합됐다. 이러한 과정은 지역 정서의 차이를 드러내었고 최근 들어 고덕신도시 조성과 주한미군기지 이전으로 지역정서 차별이 확대되고 있는 추세다. 이러한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통합 100년을 맞는 2014년을 전후해서 평택학이 대두되기 시작했다. 일부에서는 ‘평택학이 필요한가’에 대해 여전히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지만 평택이라는 정체성과 공동체로서의 공감을 끌어내기 위해서는 평택학의 정립이 무엇보다도 필요하다고 본다. 이를 위해서는 평택시민들의 자아 실현과 지속 가능한 발전 방향에 대한 충분한 준비, 포괄적 지역 사료의 수집과 정리, 종합·객관적인 지역문화의 지속적 연구, 지역 관련 문화콘텐츠 개발, 지역 특성을 종합하고 효율적으로 활용하기 위해서 인접 분야 인력과 긴밀한 학제적 연구와 소통이 필요하다. 평택학 정립은 ▲근대라는 이미지의 100년을 맞는 평택의 이미지 구축 ▲세계문화 일류도시로서의 위상 ▲평택을 대표할 수 있는 인문학적 고찰 ▲평택이라는 지역의 정체성 확립 ▲평택인과 함께 하는 인문학 조성 ▲평택인으로서의 삶의 가치관 부여 ▲미래 평택 발전을 위한 토대 마련 등을 제공할 것이다.

 

김인호 동의대 교수

일제강점기 평택 경제인의 지역별 실태-요록과 등기를 중심으로

요록(일본인 및 단독회사 중심의 경제 통계서)에 없던 조선인들이 등기에 등장하는 이유는 가문의 문제였다. 일제강점기에도 이 가문을 중심으로 한 경제력으로 일본인들의 경제점유를 허용치 않았던 것이다. 가문과 혈연으로 뭉친 조선인들이 경제를 움직였고 평택지역에서 금융협동조합을 꾸린 사람들도 애국계몽운동을 했던 인사들이 중심을 이루었다. 지역별 경제인 규모를 면, 군, 도, 전국단위로 구분할 때 평택은 군단위경제인 이상이 다수 포진했었다. 특히 안중과 서정리 지역은 새로운 조선인 경제력 상승 기지로 조선 경제인의 묘판이 되었다. 평택지역 전체 경제인 활동을 평가할 때 면과 군단위 경제인이 주를 이뤄 외연적 확장에는 성공적이지 못했던 것으로 분석된다.
당시 일본인들 중 평택에 토착하여 다양한 기업에 투자하는 인원은 극소수였다. 따라서 실질적으로 지역에서는 조선인 유지들이 지배력을 행사했다고 본다. 안성자본가의 평택 진출도 두드러진 특징이다. 안성지역 연고 경제인 중 상당수가 평택과 안성 두 군을 아우르는 경제활동을 했다. 평택은 면단위경제인이, 안성은 군단위경제인, 수원은 도단위 경제인이 상대적으로 우위를 점했다.
결국 평택의 기층에서 주인은 여전히 조선인이었고 ‘요록’이 보여준 만큼 일본인 경제가 지배적이지 않았으며, 혈연과 지연을 바탕으로 한 리·면 단위의 조선인 경제영역은 ‘해방의 그날’까지 온전했다.

 

■ 제2부

안승택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연구교수

농민적 환경지식의 혼종성과 지역성-평택 대곡일기

평택 대곡일기에는 바람의 향, 양, 때와 관련하여 물을 말리거나 가뭄이나 비를 부르는 바람 등에 대한 신권식 옹의 지식과 생각, 느낌이 다수 기록되어 있어 이 문제를 다루는 자료로서 적합하다.
 이 일기가 기록된 청북면 고잔리에 위치한 평택평야는 경기지역의 주요 곡창지대 중 하나지만 안정된 논농사지대로서의 역사는 그리 길지 않다. 1973년 아산만방조제 완공까지 간척을 통해 저습지들이 경작지로, 그리고 수리안전답으로 바뀌어 왔기 때문이다. 고잔리도 상습적인 가뭄과 범람, 소금피해 등이 고질적으로 있었다. 대곡일기에는 자연현상에 대한 다양한 기록과 표현들이 매일 날씨에 대한 기록과 함께 나타나있다. 이는 농사가 날씨와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반영한 결과이다. 대곡일기에서 바람에 관한 기록만 살펴봐도 평범한 표현처럼 보이는 것들이 한 해 농사를 예단하는 의미로 기록되어 있다.
신 옹은 ‘풍산하다(풍비박산하다의 준말)’는 말로 표현한 봄철의 건조하고 어지럽게 부는 바람을 일 년 농사를 망치는 불길한 징조로 인식했다. 이런 인식은 직선거리로만 150km가 떨어져 있는 경북 김천의 권순덕 옹이 기록한 ‘아포일기’에도 등장하는 것으로 봐서 신 옹만의 감각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평택 대곡일기의 풍우 인식 관련 내용은 다른 지역의 유사한 인류학적·민적학적 조사내용이나 문헌자료와 정밀하게 대조될 필요가 있다. 그렇게 하면 현재 뭉뚱그려 민속지식이나 전통과학지식 등으로 설명되는 내용 중 어떤 부분들이 평택 지역의 고유한 것인지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아울러 평택 대곡일기 속 신권식 옹의 풍우 인식이 정교하게 발달한 점 자체가, 이 지역의 특성을 반영한 결과일 수도 있다. 대개 농촌보다는 반농반어촌이 이러한 풍우인식과 관련해 더 상세하고 발달한 인지체계를 가진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신 옹 자신은 전형적인 농민으로 가끔씩 갯벌에 나가 패류 채취를 여가활동 삼아 하는 정도였지만 그가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 잦은 범람과 가뭄의 위협 등과 관련하여 이 일대에 전래하던 섬세한 풍우 인식을 그가 체득한 것일 수도 있다.

 

김아람 연세대학교

평택의 난민정착사업과 농지소유 변동

평택은 전쟁기에 주요한 피난 공간이자 복귀의 통로 역할을 하였다. 전행 후 1950년대에 난민정착사업이 활발하게 진행된 곳이기도 하다. 그러나 사업 당시 정부의 행정부재로 사업 대상 토지의 소유권이 명확하지 않았고 이로 인해 장기간 소유권 분쟁이 그치지 않았다. 농민들은 민주화 이후 경영권 보장과 지나치게 높은 소작료, 지대의 철폐를 요구하며 집단적인 대응에 나서기도 했지만 분쟁은 해결되지 않았다. 난민정착사업은 정부가 전후 난민을 구호대상에서 제외하고, 농촌에서 자활하도록 유도하기 위해 실시한 주요 사회정책으로 난민들은 농지를 조성하고 정착한다는 기대감이 있었다. 1950년대에 정부의 의도와 난민들의 욕구가 맞아떨어져 개간을 통해 농지가 조성되었고 단기적인 정착 여부로만 본다면 사업은 성공적이었다. 그러나 팽성지역 난민정착사업의 결과를 놓고볼 때 농민들은 대양학원이라는 대형 사학재단 지주의 소작농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이촌향도와 도시 중심의 산업화 과정을 지나면서도 팽성에 정착한 농민들은 민주화 과정에서 농지에 대한 권리를 확보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국가와 자본에 대응하기도 했다. 그러나 과거의 사법적 판단과 원 소유권의 보장을 근거로 하여 요구가 관철되지 못하는 구조적 한계에 봉착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미군 기지의 확장이라는 국제적·국가적 요구에 직면해 주민들은 또다시 강제이주를 당해야 했다.

 

키워드

#N
저작권자 © 평택시민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