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효길에서 산티에고를 그리다

박경순시인 · 사진가

[평택시민신문] 섶길을 알게 되고 그 코스를 두루 걸으며 새롭게 발견되는 사진 소재로 사계절을 담아도 풍부한 이야기가 될 만한 곳을 알게 되었다.

원효길 코스 중에 장수리길이 있다. 길의 모양도 구불구불 다랭이 논길과 메타세콰이어의 군락이 잘 어우러진 곳이다. 논길을 따라 조금만 걷다보면 아주 야트막한 언덕이 나온다. 그 언덕에서 동네를 내려다 볼 수도 있고 맑은 날에는 서해대교도 한 눈에 뚜렷하게 볼 수가 있다. 더욱이 사계절의 변화가 아름다워 어느 계절에 찾아가도 그 계절에 알맞은 풍광을 만끽할 수 있다. 처음 그 길을 안내 받으며 이곳이 평택의 산티에고 길이라 해서 의아해 하던 생각이 났다. 그 때 내가 어렴풋이 칠레를 떠올렸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뒤에 다시 산티에고라는 지명에 대해 얘기가 오고 갔을 때 나는 스페인에 갈 계획을 잡고 있었다.

오랜 숙원이던 가족 여행의 꿈이 이루어지는 순간이었다. 우리 부부와 장성한 아들 둘을 동반하여 떠나는 여행이라니!

산티에고는 순례자들이 찾는 스페인의 명소이다. 세상살이에 부대낄 때 자아를 찾아 떠나는 순례의 길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숨통 트이는 일이련가.

우리 네 가족이 스페인 여행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아들 둘이 마련한 효도 여행 길이었다. 남편의 회갑을 앞두고 아들들이 여행 계획을 잡고 있다는 걸 귀띔해 주었다. 내년까지 기다릴 일이 아니라는 판단이 들었다. 아직 장가를 들지 않은 품 안의 아들을 끼고 여행할 수 있는 하늘이 준 절호의 기회란 생각이 들어 실행에 옮긴 것이었다. 나는 여행길에 앞서 스스로에게 수없이 다짐했다. 어떤 상황에서도 아들을 믿고 일말의 잔소리도 삼갈 것, 절대 먼저 아는 척하며 나서지 않을 것, 일종의 묵언 수행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제까지 엄마의 직분으로 아들들에게 기대라는 무거운 짐을 지어 주고 잔소리를 일삼던 본연에서 벗어나 보자고 다짐을 했다. 여행은 열흘 간 진행되었고 자유여행과 투어를 겸했다. 나는 나에게 약속했던 대로 아들들과 의견 대립 없이 순조로운 나날들을 보내고 소중한 추억들을 얻었다. 산티에고는 가지 않았지만 먼 타국에서 가족들이 함께 걷고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는 것이 꿈만 같았다. 세계는 내 손 안에 있다는 듯이 인터넷을 통해 찾아낸 맛집들, 우리가 숙박한 게스트 하우스 등 신세대 감각에 그저 감탄을 연발할 수 밖에 없었다.

이미 잘 알려져 있듯이 원효대사가 인도로 순례길에 올랐을 때 하룻밤 묵으며(지금의 수도사 근방으로 추정, 원효길이라는 명칭을 붙이게 된 근거) 목말라 달게 마신 물이 다음 날 일어나 보니 해골인 걸 알고 득도하게 되었다는 일화가 있다. 득도라는 것이 무엇인지는 몰라도 어떤 계기가 있어 자신의 변화를 보게 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늘 어리게만 보았던 아들들이 어느 새 듬직한 어른으로 성장해 있었고 이제 내가 그들 뒤를 쫓아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순례라는 것이 어디 따로 있겠는가. 내가 가고 있는 길을 바로 알아차리고 늘 깨어 있으려는 마음을 지니고 있으면 그곳이 바로 순례의 길이 아닐까.

평택섶길 코스 중 하나인 원효길을 걷고 있다.

※이 사업은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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