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한 사람들의 세상사는 이야기>-신장육교밑 뻥튀기 할아버지 이 득 규씨

▲ 이득규씨가 소중한 자신의 일터에 쌓인 강냉이를 차곡차곡 정리하고 있다.
향수 부르는 옛날과자 사탕… 없는 게 없어

이야기 나누는 사랑방 역할 톡톡

신장육교 밑엔 10년 동안 자리잡아 온 작은 뻥튀기 노점상이 보인다. 앵글과 합판으로 만든 가게는 이름도 없이 2∼3평의 공간으로 되어있다.

조그마한 TV와 시계하나만이 걸려있는 이 작은 공간을 들여다보면 뻥튀기부터 강냉이, 부채과자, 고구마과자, 소라과자, 종합전병 등의 과자류가 모여 있다.

거기에 뻥튀기를 엿물에 묻혀 쌀 튀긴 것을 굴린 산자, 누런강냉이로 튀긴 개나리콘, 떡튀김봉과자 등 이름도 재미있는 주점불이 꺼리가 눈에 들어온다.

어렸을 때 누구든지 맛깔 나는 맛을 기억하게 하는 박하왕사탕, 눈깔사탕, 소프트 땅콩캬라멜, 유가사탕 등의 사탕종류도 함께 있고 가공되지 않은 보리차와 옥수수차의 구수함도 전해진다. 그야말로 옛날과자, 사탕들의 집산지이다.

오랜기간 노점상을 지켜온 이득규 할아버지(85세).

가게는 오전10시에 문을 열고 저녁 8시에 폐점이다.

이 가게를 지키려 시청이나 경찰서 등 많은 사람들과 부딪혀야 했다. “벌어먹겠다는 데는 죄가 없다”는 신념하나로 버티어 이젠 그나마 충돌 없이 장사할 수 있고 한 달 평균 20∼30만원밖에 안 되는 벌이지만 이득규씨에게는 생명처럼 소중한 것이다.

“나이 들어 이것이라도 안 하고 그냥 있었으면 난 벌써 황천길로 갔을 거야.”라는 이씨의 말에서 얼마만큼이나 소중한 자신만의 일이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52살에 얻은 하나밖에 없는 장성한 아들을 공부시키고 결혼을 시켰을 때야 이제 자신이 할 책임을 다했다고 생각한 이씨는 아버지를 부양한다는 아들의 마음을 한사코 사양했다.

나이들어 아들에게 의지하며 살기 싫었고 어려운 환경 속에서 곧게 자라준 아들이 가정을 꾸려 자기들 삶을 사는데 그저 자유롭게 살게 해주는 것이 아버지의 도리라고 생각했다. 더욱 자신의 삶은 죽을 때까지 스스로 책임져야 한다는 마음이 덧붙혀진 이유였다.

아들이나 며느리가 건네는 생활비나 용돈은 전혀 받지 않는 마음도 극진하다. 다행히 고마운 것은 어렵게 살아온 삶을 아들이 알고 헛되이 돈 쓰지 않고 짜증부리지 않으며 굳건하게 잘 살아주는 것이란다.

85년간의 인생.

이씨는 특별한 가치관을 갖지 않았다고 한다. “가진 것 없는 사람이 올려다보면 한이 없다.”

“소 막대기 휘둘러도 걸릴 데가 없다.”고 생각했다. 품팔이에 리어커꾼, 광산일, 벽돌공장 인부 등 안 해 본 것이 없이 고생스런 삶을 살았지만 그저 팔자려니 하면서 살았다. 큰 욕심도 부리지 않았다고 회고한다.

돈벌이가 얼마 안 되는 장사만을 보았다면 이렇게 오랜 기간 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이 작은 공간이 신장2동에서는 사랑방이 되었다. 연세가 지긋하신 또래 영감님들은 이 자리를 그냥 지나가지 못한다.

이씨와 함께 안부를 확인하고 정담을 나눈다. 비록 나무로 짜 맞추고 그 위에 보리박스 상자를 펴 방석을 대신하긴 했어도 이 자리에 앉아 나누는 이야기는 동네 돌아가는 이야기도 섞여있다.

이씨는 해방된 그 이듬해 29세에 평안남도 개천 천동에서 월남했다. 서울에서 품팔이를 하다 살기 힘들어 6·25사변후 제2국민병을 모집하는데 지원했다.

훈련과정을 마치고 강원도의 한 전투사단인 3사단에 배치되어 통신병, 수사반에서 근무했으며 4과 선임하사까지 하다 1등 중사로 제대했다.

이때의 노고가 인정되어 2001년에 국가보훈처에서 배부한 참전용사증을 갖고 있으며 영세민 혜택을 받아 한 달에 28만원씩의 영세자금을 지원 받는다.

강원도에서 살면서 전 부인을 만났지만 자식을 보지 못하고 헤어졌다. 96년에 고인이 된 착한 부인을 다시 만났다. “가진 것이라고는 주먹하나 밖에 없다. “

“같이 벌어 살겠다면 살아보자”는 말에 선뜩 응해준 고마운 부인사이에서 뒤늦게 아들을 하나 얻은 것이다.

이 아들에게 중풍으로 쓰러져 한쪽이 마비상태였던 자신의 병을 짐으로 남기고 싶지 않았다. 이를 악물고 침, 한약, 옥돌찜질, 운동을 해 원래의 몸으로 회복시켰다. 아직 퇴행성 관절염으로 병원을 다니고 있지만 기억력은 젊은 사람이 놀랄 정도로 건강하다.

시공동묘지에 부인을 안치했다. 이득규씨의 마지막 소원은 자신이 운명을 달리하면 부인이 누워있는 옆에 나란히 합장을 하는 것이다.

일을 마친 이씨는 목천동의 3~4평 전셋집으로 몸을 옮겨 쉬기도 하고 아들부부가 식사 제 때에 잘 챙겨 드시고 건강하시라는 전화통화를 통해 하루의 피곤이 눈 녹듯 없어지는 것을 느끼며 하루를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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