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바닥 나뒹구는 철불 모시고'…19세기말 만기사 중건

평택의 역사와 문화기행-6

김해규(한광여고 교사)


288cm 철불, 부다가야서 잡귀 물리친 석가여래상 형상화
꺼칠한 표면에 더덕더덕 금칠 강인한 호족기풍 안풍겨


1.변혁의 시대 나말여초(羅末麗初)

역사는 변혁을 꿈꾸는 사람들의 몫이었다. 변혁은 지배층의 변화와 가치관의 변화를 요구한다. 그러나 가치관의 변화는 권력자, 가진 자에게는 견디기 힘든 형벌이다. 예수도 말했지만 가진 자들이 이 기득권을 포기하고 가치관을 변화시키는 것은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변혁의 시대는 사회적 억압을 당하는 자, 사회적 약자에게는 살 맛 나는 새 세상을 맛 볼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다. 삶에 지친 우리의 이웃들이 "이놈의 세상 난리나 났으면 좋겠다"는 말을 심심찮게 하는 것은 변혁 저편에 있는 희망을 염원하기 때문이다. 요즘 인기리에 방영되는 KBS의 대하사극 "왕건"의 배경이 되는 나말 여초는, 변화를 바라는 하층 귀족들과 지방 호족들, 그리고 민중들의 변혁의지가 강하게 분출되었던 변혁의 시대였다. 변혁의 시대에는 시대를 주도한 영웅들과 함께 변혁의 주체들이 등장하기 마련이다. 나말 여초의 호족(豪族)이 그러했다. 이들은 변혁의 시대에 자신들의 새 세상을 꿈꾸며 중앙권력과 대항하였던 지방세력들이었다. 골품제라는 고대사회의 특권적 가치질서에 정면으로 도전한 이들은, 분출하는 민중들의 변혁의지를 무기 삼아 민심을 모으고 새 사회 건설의 비전을 제시하였다. 그럼 여기서 변혁의 시대, 호족의 시대가 오게 된 나말 여초의 역사적 배경을 잠시 살펴보자.
삼국을 통일한 신라는 화려했던 중대(中代)의 전성기를 지나 하대(下代)로 오면서 여러 가지 사회적 모순이 돌출했다. 족장세력을 통합하여 고대국가를 형성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던 골품제도는, 이제 더 이상 통합의 기능을 상실하고, 오히려 6두품이나 5두품 등 하위 귀족들의 도전과 반발에 직면하였다. 골품제도라는 보장된 특권의식 속에 안주했던 진골귀족들은 왕위쟁탈전을 일삼고 민중들의 등골을 빼먹으며 권력과 재물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중앙의 통제가 약해지자 법(法) 보다 주먹이 앞서는 무법천지가 되었다. 무법천지 사회에서 이리차이고 저리 차이던 농민들은 각 지역에서 농민반란을 일으켰으며, 혼란을 틈타 골품제에 의해 상대적으로 차별을 받았던 지방의 촌주(村主), 군인, 도적들이 민중들의 변혁욕구를 배경으로 들고일어났다. 우리는 장자라고도 불렸던 이들은 신라 말 국가의 통제력이 미치지 않던 변방지역을 실질적으로 지배하였다.
그러나 새 세상은 군대의 힘이나 재물만 가지고는 열 수 없었다. 새 시대는 민중의 열망에 부합된 시대여야 했기 때문이다. 민중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는 새로운 사회의 비전이 없이는 약육강식의 시대에 결코 살아남을 수 없었다. 호족들은 민심을 끌어 모으는 새 사회의 이데올로기를 불교에서 찾으려고 하였다. 삼국시대에 들어와 국가 통치의 이데올로기로 정착된 불교는 이제 계급을 초월하여 모든 사람을 아우를 수 있는 보편적 사상이었다. 드라마 왕건에서 솔직 담백한 기상으로 성가를 높이고 있는 궁예가 미륵신앙을 전면에 내세운 것도 민심을 얻기 위한 수단에 다름 아니었다. 지방의 호족들도 궁예와 마찬가지로 민심을 잡기 위해서는 불교의 힘이 필요했다. 이들은 불교 중에서도 반 신라적 경향을 보이고 있던 6두품 게통에 의해 수용되어 지방을 중심으로 확산되던 선종(禪宗)의 혁명성에 눈을 돌렸다. 신라 후기 도의에 의해 수용된 선종은 중앙귀족과 결탁하여 부패할 대로 부패한 교종에 배타적 입장을 보였으며, 내용이 새롭고 참신하여 새 세상을 꿈꾸는 호족과 민중들의 정서에 잘 맞았다. 호족과 선종은 이제 공생의 관계를 맺게 된 것이다. 호족의 도움으로 지방에 근거를 둔 선종계통의 불교는 호족의 사상적 기반을 제공하였을 뿐 아니라, 호족들의 도전적이고 개성적이며, 현실적인 이미지를 민중에게 전하는 역할을 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호족의 이미지가 투영된 불상이 철불(鐵佛)이었다. 철불은 나말 여초의 혼란기에 사병을 거느리고 전란을 경험하던 호족의 정서에 맞게 재료가 쇠였다. 또한 조성기법도 쇠를 여러 조각으로 나누어 뜬 다음에 이어 붙이는 기법이 사용되었다. 그래서 철불은 마치 호족의 자화상인양 거칠고, 도전적이며, 개성적이다. 거칠고 개성적인 철불은 귀족적인 금동불과는 달리 민중들에게는 생동하는 힘과 위안을 주었으며, 친근한 존재로 다가왔다. 이 시기에 조성된 불상으로는 철원 도피안사의 철불, 서산 보원사지 철불, 장흥 보림사 철불 등이 있는데, 진위 만기사의 철불도 그 중 하나이다.

2.철불(鐵佛) 평택지역에도 만들어지다.

진위 만기사의 철불이 어떻게 조성되었는지를 알기 위해서는 나말 여초 평택지방(진위)의 호족관계를 살펴봐야 한다. 향토사가 장연환은 진위면지(振威面誌)에서 단편적인 자료들을 토대로 평택지역의 호족관계를 규명하였는데 내용이 자못 흥미롭다. 그는 평택지방 인근의 호족으로 죽산의 기훤과 박적오, 수원의 김칠과 최승규, 광주의 왕규, 용인의 이길권 등을 거명하면서, 수원의 김칠과 최승규가 고려 태조의 남쪽 정벌 때 200여명과 함께 귀순한 사실에 주목하였다. 그의 논리는 평택지방(진위)은 신라 경덕왕의 지방제도 개편 때 수성군(수원)의 영현이 되었는데, 김칠과 최승규가 200여명의 사람을 이끌고 귀순하였다면, 이들은 김칠과 최승규의 영향 아래 있던 수원과 평택지방(진위)의 중, 소 호족일 것이라고 추측한 것이다. 이 주장의 타당성을 인정한다면 나말 여초의 평택지방, 특히 진위지역에 영향력을 갖고 있던 대 호족은 김칠과 최승규였다고 판단된다. 속단하기는 어렵지만 이들이 만기사와 철조여래좌상을 조성하였다고 판단해도 무리가 없다. 절의 창건과 불상의 조성사업은 호족이라 할지라도 대 호족이 아니면 시도할 수 없는 큰 사업이기 때문이다.
만기사는 진위면 봉남리에서 동천리로 향하는 16번 군도를 따라 달리다가 어린이 야영장에서 표지판을 보고 좌회전하여 2, 3분쯤 달리면 나온다. 지금은 절 입구에 무봉산 청소년 수련관이 건립되고 도로확장이 진행되고 있어서 찾기가 쉽다. 이 절은 고려 태조 25년(942년) 현 위치에서 동쪽으로 1km쯤 떨어진 동천 1리 산기슭에서 남대사에 의해 창건된 것으로 전해진다. 사적기가 없어 창건시 절의 내력이나 규모는 알 수 없으나 대규모의 사찰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절은 1943년에 편찬된 "진위현읍지"에 무봉산 아래 만기사가 있다는 기록으로 봐서 19세기 전반까지는 명맥이 유지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19세기 말에 "땅 바닥에 나뒹구는 철불을 모시고" 현 위치에 중건했다는 설이 전해오는 것으로 볼 때 화재 등으로 일시적으로 폐사되었다가 자리를 옮겨 중건된 것으로 보인다. 중건 당시에는 요사체와 삼성각 등 몇 몇 건물만 있었으나, 최근 중창불사를 단행하여 축대를 쌓고 대웅전과 영산전을 중건하였으며 축대 아래 요사체를 지어서 제법 규모를 갖췄다.
만기사 철조여래좌상(보물 567호, 143cm)은 나말 여초의 철불 중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는 철원 도피안사의 철조여래좌상이나 보다 제작 연대가 늦고 규모도 작다. 오히려 규모면에서는 훨씬 크지만(288cm) 시기적으로 같은 시기인 10세기에 제작된 경기도 광주의 춘궁리 철불과 비슷한 분위기를 풍긴다. 철원 도피안사의 철불이 강하고 단단한 근골, 강한 눈매, 강건한 기상에, 9세기 선종과 함께 유행한 비로자나불의 형식을 갖췄는데 비하여, 춘궁리 철불과 만기사 철조여래좌상은 10세기에 나탄나 항마촉지인의 수인(手印)에 석가여래의 모습을 형상화하고 있는 점이 특징이다. 부처의 수인(手印)에서 비로자나불이 하고 있는 지권인(智拳印)은 "부처님의 진리가 태양처럼 우주에 가득 비친다"는 의미인데 비하여,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은 '석가모니가 부다가야에서 모든 잡귀를 물리치고 도(道)를 이루었던 때"를 말한다. 부처님의 진리로 민중과 호족을 회유해야 하던 9세기와, 고려가 건국하고 후삼국을 통일한 후 고려 왕실과의 공존을 모색해야 했던 10세기 호족의 처지는 같을 수가 없었다.
만기사 철조여래좌상에서 거칠고 강건한 호족의 기풍을 발견하기란 쉽지 않다. 꺼칠 꺼칠한 표면에 덕지덕지 금칠을 해놓았기 때문이다. 개금(改金)된 철불은 만기사 철불 만이 아니다. 철불 중 대표격인 철원 도피안사의 철불도 같은 처지이기 때문이다. 철불에 개금한 사상적 기반은 현대인들이 종교에 기대하는 바램과 잇닿아 있다. 교회의 첨탑이 높아지는 씁쓸함을 개금한 철불에서 다시 느낀다.

<역사/문화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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