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관광해설사가 들려주는 평택 문화재 이야기 ⑤ 대동법시행 기념비

▲ 이광섭 <전 덕동초등학교 교장>
조선 중기 약탈적 공납 폐단 없앤 획기적 세제개혁
충청도 관찰사 출신 김육 등 앞장서 시행했으나
양반지주 등 기득권 세력 반대로 끝내 좌초
소사동 일원 농민들 김육 은공 기려 추모비 세워 

대동법 시행 기념비는 경부 고속도로 안성 톨게이트를 나와 평택방향으로 가다 평택대학교를 지나 굿모닝 병원 근처 소사동에 있습니다.

조선시대 소사동은 마을 중앙으로 삼남대로가 지났고, 충청도에서 경기도로 넘어오는 첫 번째 역원인 소사원이 있었고 소사 장이 섰던 곳입니다.

마을 앞에는 소사천이 흐르고 평택 평야의 대표적인 ‘소사벌’의 넓은 들판이 펼쳐진 곳이기도 합니다.   
대동법 시행 기념비의 본래 이름은 ‘김육대동균역만세불망비’ 이며, 비문은 홍문관(조선시대 학문연구와 언론을 맡은 기관) 부제학(홍문관에서 제일 높은 벼슬)이었던 이민구가 짓고, 의정부(조선시대 행정부의 최고기관) 우참찬(차관급 벼슬) 오준이 썼습니다.

본래의 위치는 현재보다 마을 쪽으로 1백 미터 아래 옛 소사원 터에 있었는데, 1970년에 현 위치로 옮겼습니다.  화강암으로 된 이 비의 크기는 높이가 300㎝, 너비 85㎝, 두께 24㎝입니다.
그럼 대동법 시행기념비가 왜 여기에 있을까요 ?

조선 효종 임금 때(1659년) 대동법 시행을 위해 가장 힘쓴 김육 선생님이 돌아가시자 충청도 백성들은 자기 부모가 돌아가신 것처럼 애통하였다고 합니다.

그들은 김육 선생을 추모하는 글을 짓고 문상을 하기 위해 부의금을 준비하여 조문을 갔으나, 상가에서 조의금을 받지 않자 그분의 은공을 기리기 위해 이 비를 세운 것입니다.

이곳 삼남대로는 조선시대의 가장 큰 길이었으며, 특히 이곳은 서울에서 시작한 삼남대로가 경기도를 거쳐 충청도로 넘어가는 길목으로 오고 가는 사람들이 많은 곳이기 때문에 이곳에 세운 것입니다.
그럼 대동법이란 무엇일까요?

여러분이 잘 아는 바와 같이 세금은 나라 살림에 필요한 돈을 국민들한테 받는 것입니다. 조선시대에도 나라를 운영하기 위해서는 세금이 필요했습니다.

 

조선시대의 세금은 대개 세 종류였는데, 그 하나가 조(組)라고 하여 토지에 대해 받는 세금 전세이고,  또 하나는 평민의 남자로서 16세부터 60세 미만이면 군대에 가거나 노동으로 국가의 일을 도와주는 개인에 대한 신역이 있고, 그리고 지방의 특산물을 바치는 공납이 있었습니다.
이중에서 농민들에게 가장 큰 무거운 부담은 공납이었습니다.

공납은 대개 그 지방의 특산물을 납부하도록 되었으나, 부담이 불공평하고 수송과 저장에 불편이 많았습니다. 또 관청에서 그 지방의 특산물이 아닌 다른 물품을 부과하는 경우 농민은 더 고통을 겪어야 했습니다.
예를 들어 바다와 멀리 떨어진 곳에 사는데 공납으로 생선을 바치라고 할 경우에는 바다가 있는 곳까지 가서 사다가 바치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 새로운 직업이 등장하는데 그것은 방납 업자입니다.
방납업자란 백성들을 대신해서 공납을 해주고 그 대가로 막대한 이익을 붙여 착취한 업자들입니다.

그 당시 백성들은 직접 공물을 납부하려 해도 방납업자와 악덕 관원이 결탁하여 관청에서 물품을 수납할 때 규격을 까다롭게 하여 불합격 처리하므로 막대한 손실을 무릅쓰고서라도 어쩔 수 없이 백성들은 방납업자에게 맡길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문제점은 세금 매기는 것이 형평에 맞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공물의 부과를 마을 호수에 따라 부과하기 때문에 부자 집이나 가난한 집이나 똑 같은 액수의 공물을 납부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더 어려운 것은 그 마을에서 한집이 이사를 가거나 도망치면 그 사람이 내야할 세금까지도 친족이나 이웃에게 부과를 하였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실정이기 때문에 공납을 견디다 못한 농민들은 정든 고향을 떠나 떠돌이가 되는 신세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이러한 공납의 폐단을 없애기 위한 제도가 대동법 입니다.

이법은 수백 가지의 잡다한 특산물을 받으면서 발생하는 방납의 피해를 방지하기 위해 세금을 미곡(쌀)으로 납부하도록 하고 부과 기준을 가구가 아닌 토지의 크기에 따라 부과하여 땅을 많이 가진 사람이 세금을 많이 내도록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땅을 많이 가진 양반지주들과 방납업자들의 극심한 반대에 부딪치게 되어 대동법 시행을 못하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도 이 법을 시행하는데 가장 힘쓴 사람이 잠곡 김육 선생 이십니다.

김육 선생은 조선 중기 시대의 문신으로 본관은 청풍이며, 호는 잠곡이라 합니다.  그는 1580년에 태어나 13살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 피난길에 올라 15살 때 아버지을 잃고 그 뒤 어머니도 돌아가시어 김육 선생은 서울 고모댁에 의지하여 생활하였다고 합니다. 

김육 선생의 26살 때 과거시험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어 성균관에 들어갔지만, 광해군 때 권력자인 정인홍을 유적에서 삭제한 사건이 문제가 되어 파직되어 34살 때 가평 잠곡으로 내려가 10여 년간 농사와 숯장수로 생계를 유지하며 지냈습니다.

김육이 관직에 나간 것은 1623년 인조반정으로 서인들이 집권한 뒤로, 여러 관직을 두루 거쳤으며 효종 때는 우의정에 발탁되었고 나중에 영의정까지 오르게 됩니다.

그가 관직에 있을 때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은 뒤로 국가적으로나 백성들의 가장 어려웠던 시기였습니다. 김육은 자신이 10년 동안 가평에서 직접 농사를 짓고 숯을 구우며 생활을 하였기 때문에 백성들의 어려움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백성들의 생활의 안정이 무엇 중요하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가 1638년에 충청도 관찰사로 있으면서 국가 재정을 확충하고 생활이 몹시 어렵고 비참한 상태에 빠진 백성들을 안정시킬 방법은 대동법이라 생각하고 정치적 생명을 걸어가며 온몸으로 대동법 시행을 위해 주도적 역할을 하며 백성들과 함께한 조선시대의 개혁가 중의 한 사람인 것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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