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영 권 작은경제연구소 소장


이제 삶의 속도가 많이 느려졌다. 전화가 뜸해지고, 약속이 뜸해졌다. 차를 타는 일도 뜸해졌다. 대신 일 없는 시간이 많아졌다. 홀로 있는 시간이 많아졌다. 어떤 날은 휴대폰도 죽은 듯 고요하다. 전화 한 통, 문자 메시지 하나 없다. 아무 말 없이 하루가 간다. 가끔 외로운 느낌이 들지만 괜찮다. 전체적으로 좋다. 외로우면 외로운 맛을 본다. 일부러 누군가를 찾지 않는다.

그래도 삶의 속도를 높이려는 습관이 남아 한가한 일도 자꾸 바쁘게 하려 한다. 어떤 일을 하든 빨리 마치고 다음 일을 하려 한다. 마음은 벌써 다음 일에 가있다. 그럴 때마다 “아차” 하고 템포를 늦춘다. 그러면 확실히 하던 일이 조금 더 재밌어진다. 일이 손에 붙는다.

나도 그랬고 지금도 그런 함정에 빠지곤 하지만 다들 바빠서 시간이 없다. 시간과 다투고 시간에 쫓긴다. 시간을 만들어내려고 기를 쓴다. 안간 힘을 쓴다. 하지만 없는 시간을 어떻게 만드나?

첫째, 속도를 높인다. 컴퓨터도 더 빨리, 통신도 더 빨리, 기차도 더 빨리, 비행기도 더 빨리, 밥도 더 빨리, 청소도 더 빨리! 모조리 속도경쟁이다. 그래서 남은 시간은? 일한다. 더 빨리 달려가서 더 빠르게, 더 많이 일한다. 이제는 달리는 것이 기본이다. 너도 달리고 나도 달린다. RPM이 매우 높다. 그런데도 속도는 자꾸 높아진다. 현대문명과 기술이 모두 속도에 봉사한다.

경춘고속도로를 달리다 보면 곳곳에 북한강의 아름다운 풍광을 막아놓았다. 경치 감상한다고 주춤하지 말라는 것이다. 속도를 늦추면 사고 날 수 있으니 앞만 보고 내쳐 달리라는 것이다. 이게 논란이 되자 가림 막을 없애네 마네 하더니 결국 유야무야됐다. 덕분에 춘천 가는 길이 더 빨라졌다. 춘천 가는 풍경은 사라졌다.

속도는 오로지 목적지만 겨냥한다. 하지만 삶은 목적지를 뺀 나머지 99.9%다. 삶은 항상 '지금 여기'에서 벌어지기 때문이다. 요즘에는 목적지 없이 달리는 사람도 있다. 이때는 속도 자체가 목적이다. 광적인 목표다. 속도가 목적이 아닌데 달리는 사람도 있다. 남들 따라 덩달아 달리는 것이다. 그냥 숨 가쁘게 사는 것이다.

둘째, 잠을 줄인다. 그래서 남은 시간은? 일한다. 밤늦게까지 일하고 새벽같이 일어나 신속히 업무 모드로 돌입한다. 수험생은 ‘4당5락’이다. 4시간 자면 합격, 5시간 자면 낙방이다. 사회에 나와서도 비슷하다. 남들과 똑같이 자고 똑같이 일어나서는 성공할 수 없다. 기자할 때 가장 성가신 취재가 조찬간담회였다. 거기 가면 잘 나가는 VIP와 CEO들이 다 모여 있다. 야망에 불타는 눈, 눈물이 마른 고단한 눈들이 번뜩인다. 그들은 꼭두새벽부터 움직인다. 남들이 달리기 전부터 달린다.

셋째, 휴식을 줄인다. 그래서 남은 시간은? 일한다. 점심도 얼른 때운다. 저녁도 대충 때운다. 출퇴근 시간에도 공부한다. 자투리 시간을 용납하지 않는다. 그래도 부족하면 휴일을 줄인다. 토요일, 일요일도 없다. 집도 직장도 없다. 언제 어디서든 일한다. ‘any time, any where’다. 그래도 부족하면 휴가를 줄인다. 휴가 때만큼은 푹 쉬겠다고 다짐해 놓고는 그러지 못한다. 최소한으로 쉬고 최대한으로 일한다.

넷째, 시간을 산다. 돈으로 때운다. 아들에게, 딸에게 용돈으로 대신한다. 부모에게, 아내에게, 친지에게 선물로 대신한다. 그리고 남은 시간은? 일한다.

그러니까 새로 만든 시간은 모조리 다시 일하는데 투입된다. 삶 자체가 시간 속의 전투다. 그래도 혹시 시간이 남으면? 기적적으로 그런 일이 생기면? 어쩔 줄 모른다. 못 참는다. 무슨 일이든 만든다. 옷장을 뒤집던지, 누구를 불러내든지 한다. 남는 시간이 있어선 안 된다. 다 일로 채워져 있어야 한다.

그것이 성공한 VIP의 스케줄이다. 깨알같이 빽빽한 스케줄이다. 너무 복잡해 비서까지 헷갈린다. 그래도 내 눈엔 비서가 더 행복해 보인다. 저렇게 우아하게 앉아서 조용히 미소 지으며 일하면 얼마나 좋을까? 간간이 책장도 넘기고, 화장도 고치고, 옆 비서와 수다도 떨면서….

모르는 소리, 비서도 애환이 많다고? 왜 안 그럴까. 비서도 자기가 모시는 보스처럼 더 중요한 사람이 되려고 안달인데. 그러나 보스를 닮으면 그대는 바쁘다. 쉼 없이 달려야 한다. 그렇게 달려 어디든 빨리 도착해도 반드시 행복한 것은 아니다. 그대는 한 번도 자기 안의 행복을 들여다 본 적이 없다. 99.9% 소소한 삶의 풍경을 즐긴 적이 없다. 삶은 언제나 바쁜 그대를 스쳐갔을 뿐이다. 그대는 언제나 달렸을 뿐이다.

바쁘게 말을 타고 달려가는 사람이 있었다. 한 친구가 그를 보고 소리쳐 묻는다. “어디 가시나?” 그는 허겁지겁 대답한다. “글쎄, 바쁘니 말에게 물어보셔.” 그렇다면 바쁜 나는 누구에게 물어야 하나? 말에게? 비서에게?

* 이 칼럼은 제휴 미디어 <머니투데이> 1월3일자에 함께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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