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 나라 국(國)

■ 강상헌의 ‘한자 숲 노닐기’ <논설주간. 글샘터미디어 대표>

금문 - 제사용 기구에 새긴 염원

금문(金文)은 중국 고대 상(商) 주(周) 진(秦) 한(漢) 시기의 청동기에 새겨진 문자를 이른다. 金은 쇠와 구리 등 광물 모두를 부르는 이름이다. 거북껍질과 소뼈에 점친 내용을 새긴 갑골문과 달리 제사용 기물(器物)인 악기(樂器)와 예기(禮器)의 표면에 조상 등에 제사하는 글을 새겼다.

대표적인 청동기 악기인 쇠북 즉 종(鐘)이나 예기인 솥[정(鼎)]에 새겨진 글씨라 하여 종정문(鐘鼎文)이라고도 부른다. 시기적으로는 갑골문 이후의 청동기 시대에 해당한다. 전(篆) 예(隷) 해(楷) 행(行) 초(草) 등의 글씨모양 즉 서체에 따른 구분이 아니고, 갑골문처럼 문자가 어디에 어떤 식으로 새겨져 있는지의 존재형태에 따른 이름이다. 그러나 초기 상형문자의 진화과정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인데다, 문자의 모양과 그 문자를 품은 청동기가 아름다워 문화재적 가치가 높다.


▲ 나라 국(國)자의 변천 (민중서림 한한대자전)
나라 국(國)자의 사전적인 의미는 대충 정치학개론의 ‘나라’의 정의와 같습니다. 백성들[입 구(口)]과 땅[지평선 모양 一]을 지키기 위해 경계 즉 국경[큰입 구(口)]을 짓고 무기[창 과(戈)]로 적이 침입하지 못하게 했다는 것이지요.

이 글자를 분해하면 나라를 이루는 요소들이 어우러져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국가의 3요소인 영토 국민 주권이 그것으로 사람이 있고, 땅이 있고, 힘이 있어야 비로소 나라가 되는 것임을 문자가 웅변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을 대표하는 인체의 기관은 단연 먹고 말하는 역할을 하는 입이지요. 식구(食口)는 ‘밥을 (함께) 먹는 입’이란 뜻으로, 가족을 나타내는 세련된 비유의 단어랍니다.

갑골문을 보면 사람을 상징하는 글자인 입[口]와 무력을 나타내는 창[戈]을 합쳐 ‘나라’라는 의미를 지었군요. 시간이 지나 청동기시대 금문(金文)에 이르러 국경을 뜻하는 글자[큰입 구(口)]를 주위에 두르게 됐습니다. 땅 즉 영토의 개념이 추가된 것이지요.

무력은 나라의 힘의 상징입니다. 적으로부터 백성을 보호하는 힘이면서, 통치를 위해 백성을 위엄으로 누르는 힘이지요. ‘주권의 강제력’인 것입니다. 

武는 보통 창[과(戈)]을 그치게 하는[지(止)], 평화를 위한 ‘장치’로 해석합니다. 그러나 그치다는 뜻의 止자를 원래의 말밑, 즉 자원(字源)인 발[족(足)]의 뜻으로 달리 해석해 ‘싸우기 위해 창을 들고 발을 움직여 힘차게 앞으로 내딛는 모습’으로 풀기도 합니다. 전혀 다른 의미가 되는 것이지요.

상반되는 해석에도 불구하고 이 ‘무력’은 나라를 움직이는 핵심 동력 중 하나입니다. ‘군주론(君主論)’을 쓴 르네상스 시대 이탈리아의 정치사상가 마키아벨리(1469~1527)는 ‘정치는 도덕, 종교와 구별되는 고유영역’이라고 설파했지요. 이 ‘정치’는 통치를 위한 시스템을 이르는 것으로, 주권을 본질적으로 백성을 강제할 수 있는 폭력이라고 봤습니다.

목적은 수단을 정당화한다,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어떤 수단도 허용된다는 식으로 이해되는 마키아벨리즘에 의한 ‘나라’나 ‘정치’는 이처럼 문자의 새벽인 갑골문 시대에 태어난 ‘나라’ 글자 國의 뜻과 절묘하게 겹칩니다. 즉 고대의 동아시아 문자가 근대 정치학의 주요 개념들을 이미 품고 있었던 것이지요.

그런데 동아시아의 ‘나라’는 거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집, 가족의 뜻인 가(家)가 합쳐져 ‘국가’로 이름이 정착되면서 그 기틀이 또한 드라마틱하게 바뀝니다.

처음 國은 흔히 은(殷)나라라고도 부르는 상(商)나라의 노예제(경제)를 바탕으로 하는 고대국가의 계급적 지배체제의 ‘이름’이었지요. 사람들을 강제로 통합하고 힘으로 지배하는 형태가 처음의 國이었던 것입니다. 가(家)는 피를 나눈 가족 즉 혈연(血緣) 공동체입니다.

이 國과 家가 처음 한 단어로 합쳐진 것은 상나라를 계승한 주(周)나라 때인 것으로 추측됩니다. 국가 대신 방가(邦家)라는 말도 썼지요. 우방(友邦)이라는 말에서처럼 ‘邦’ 또한 나라를 이르는 단어지요. 중국 고대의 변혁기인 춘추전국시대(BC 8세기~BC 3세기)를 지나며 국가는 ‘나라’와 같은 뜻의 일반명사가 됐습니다.
강제력을 바탕에 깐 물리적 형태로서의 나라에서, 어질다는 의미의 ‘인’(仁)을 새로운 통치이념으로 푯대 세운 새로운 국가로 진화한 것입니다.

인(仁)은 고대 중국 봉건국가의 지배이념으로 가부장적 도덕의 원리를 함축한 말입니다. 집에 효도가 있듯, 당연히 국가에는 충성이라는 ‘절대적 의무’의 개념이 생겨납니다. 백성은 어버이 모시듯 왕을 섬기고, 왕은 자식을 대하듯 백성을 추스르는 것이 ‘도덕적 미덕’이 된 것입니다.

‘주고받는’ 계약의 관계와는 전혀 다른, 다양한 차원의 연결고리 곧 유대(紐帶)는 이런 역사적 맥락에서 비롯합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강인한 끈이지요. 역사가 두께를 더하며 나라와 사람의 관계는 더 끈끈해집니다. 논리를 넘어서는, 이를테면 애국심같은, 그런 정서는 참으로 복잡한 ‘화학’(化學)이 됩니다.

겨레여 우리에겐 조국이 있다/ 내 사랑 바칠 곳은 오직 여기뿐/ 심장의 더운 피기 식을 때까지/ 즐거이 이 강산을 노래 부르자. (노산 이은상 ‘애국시’)

친일 논란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자주 애송되곤 하는 노산의 이 시 구절이 우리 심금에 잣는 울림도 마키아벨리즘이나 국(國), 가(家), 권력, 주권, 가부장적 이념 따위의 단어만으로는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도대체 사람에게 나라는 무엇인지요? 우리에게 대한민국이란 무엇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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