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데스크 칼럼

▲ 차 성 진 편집주간

1. 기상청에서는 체감온도를 공식적으로 발표한다. 겨울철에만 발표하는 ‘체감온도’는 같은 기온이라도 바람이 불면 더 춥게 느껴지는 현상을 수치로 표현한 것이다. 섭씨 영하 5도일 때 바람 한 점 없다면 체감온도는 영하 5도다. 바람이 시속 10km로 불면 체감온도는 영하 9도가 된다. 시속 20km면 영하 12도, 40km면 영하 14도가 된다. 기온이 영하 15도일 때 시속 10km의 바람은 체감온도를 6도 떨어뜨린다.


‘느낌온도’는 기상학분야에서 이론적으로 정립된 개념은 아니지만 실제 생활에선 체감온도보다 더 유효하다. 두껍게 옷을 입고 있으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덜 춥다. 그렇지만 추위를 더 민감하게 느끼는 목이나 귀를 감싸는 것이 두꺼운 웃옷을 입은 것보다 느낌온도를 끌어올린다. 느낌온도가 삶에서 실제로 더 중요한 것은 마음가짐에 따라 오르내린다는 점이다. 어린아이들은 한 겨울 눈보라 속에서도 잘 뛰어논다. 군에서 기합을 받느라고 혼자 연병장을 달리면 그렇게 추울 수 없지만 동료들과 함께 구호를 외치면서 달리면 추위를 이겨낼 만하다.


오늘 아침 기온이 몇 도인지 알아볼 틈도 없이 새벽에 일을 나와 정신없이 일하고 밤늦게 집에 돌아갔을 때 아침 기온이 올 겨울 최저였다는 말을 들으면서 “그랬었나? 별로 춥지 않더구만”하고 말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2. 추운 계절입니다. 지구 온난화는 한반도를 비껴가는지 해마다 더 추워지는 것 같습니다. 그렇게 ‘느끼는’ 것이겠지요. 석유값 때문에 난방비 걱정하는 가족들은 그래도 형편이 나은 편입니다.
없는 이들의 난방수단인 연탄값은 올해도 변함없이 펄쩍 뛰어 올랐습니다. 집안에 연탄 몇 백 장 쌓아둘 공간이 없어 며칠에 한 번씩 사들여 놔야 하는 이들의 겨울은 더 춥습니다. 혼자 사는 어르신들, 가계의 무거운 짐을 진 소년소녀 가장들, 장애와 가난을 한꺼번에 짊어진 이들, 이들을 돌보는 사회복지사와 자원봉사자들 모두 춥기만 합니다.


10년을 공부하고도 원하는 대학에 들어가지 못한 수험생과 부모들. 1년에 1000만원 안팎 등록금을 주고 4년 대학을 다녔어도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는 청년들. 열심히 일한 직장에서 아무런 잘못도 없이 구조조정을 당해 거리로 내몰린 가장과 가족들. 평택에 사는 사람들 대부분에올 추위가 야속하기만 합니다.
어려움 속에서도 ‘느낌온도’는 다릅니다.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어려움이 겨울날씨라면 이런 어려움을 나 몰라라 하는 이른바 지도자들의 언행은 세찬 바람입니다. 4대강이 중요하고 미디어법이 시급하다지만 이걸 놓고 싸우느라 이 겨울 춥게 보내는 이들에 눈길 주지 않는 정치인들의 싸움이 매서운 바람입니다.


무엇보다 거친 바람은 “세상은 경쟁이고, 거기에 진 사람은 자기 삶에 스스로 책임을 져야 한다”는 말입니다. 몇 년 전이라면 그래도 “얼마나 힘드십니까? 조금 더 참아주세요, 곧 좋아질 겁니다”라는 거짓말이라도 들을 수 있었건만 이젠 그런 말 자체가 우리경제의 경쟁력을 떨어뜨린다는 궤변으로 되돌아옵니다.

 

3.  이제 우리끼리라도 느낌온도를 높여야 할 판입니다. 매섭게 바람부는 날이라도 귀를 덮어줄 모자와 목도리를 쓰면 느낌온도는 3-5도 높아집니다. 이 추운 겨울을 보내고 있는 이들에게 털모자와 목도리를 선물로 보낼 수 있습니다. 따뜻한 위로와 격려입니다.
더구나 위로와 격려는, 모자나 목도리와 달리, 내게 있는 것을 남에게 준다고 해도 내 것이 없어지거나 줄어들지 않습니다. 오히려 내 것이 더 많아지지요.


위로와 작은 정성이 어려운 환경을 바꿀 수는 없습니다. 그래도 이 어려운 계절을 이겨낼 힘을 줍니다. 받는 이는 물론 주는 이들 모두에게요.
오늘 <평택시민신문>에 따뜻한 위로를 전하는 기사가 많지 않군요. 죄송합니다. 더 노력하겠습니다.

저작권자 © 평택시민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