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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택역, 근대 도시를 열다김해규·장연환의 평택역사 산책 - 첫번째 이야기
평택시민신문 | 승인 2009.03.25 00:00|(463호)

[평택시민신문]

철도-제국주의 침략의 첨병

오랜만에 기차여행을 위해 평택역에 갔다가 방황을 하였다. 평택역이 없어진 것이다. 물론 내가 말하는 것은 민자역사 때문에 설치했던 임시역사를 말한다. 한참을 두리번거리고 있는데 승객들이 신축 중인 민자역사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그때서야 민자역사가 눈에 들어왔다. 4월에 완공 예정이라는 건물에는 한쪽 귀퉁이에 ‘평택역’이라는 이름표가 붙어 있었고, 정면에는 'AK plaza'라는 영문상표와 함께 섹시하게 웃고 있는 아가씨 사진까지 걸려 있었다.

증기기관차를 처음으로 발명한 사람은 영국의 R. 트레비식과 G.스티븐슨이었다. 1825년 스톡턴-달링턴 간 철도가 처음으로 개통되고 나서는 유럽의 선진자본주의 국가들이 너도나도 철도건설에 열을 올렸다. 철도는 빠른 시간 안에 안전하게 대량의 상품을 실어 나르기를 원했던 산업자본가들의 요구에 맞았다. 19세기 후반에는 제국주의 국가들의 식민지 침략의 첨병이 되어 아메리카와 아시아, 아프리카에도 가설되었다.

한반도에 철도가 가설된 것은 1899년이다. 1896년 고종의 아관파천으로 열강의 이권침탈이 심화되었던 시기 미국인 모스가 경인선 철도부설권을 따냈다. 모스가 따낸 이권은 얼마 뒤 일본에게 넘어갔고, 1899년 노량진-인천 간 경인선철도가 개통된 것이다. 1903년에는 경부선 철도공사가 시작되었다. 러일전쟁을 목전에 두었던 일제는 전쟁물자의 수송과 대륙침략을 위해서는 일본과 한반도, 만주대륙을 잇는 철도교통이 필요하였다.

일제는 철도건설을 위해 강제로 토지를 수용하고 대한제국의 행정력을 이용하여 인력을 충당하였다. 평택지역은 제2착공구간이었다. 여기에 참여한 회사는 이완용이 사장으로 있던 대한운수회사를 비롯한 5개의 조선인 회사와 한일공업조와 같은 일본인 회사였다. 평택지역은 야마구찌라는 일본인 회사가 공사를 맡았다.

이들은 조선인 90% 이상 고용이라는 규정에 따라 100여 명의 평택지역 인부들을 고용하고, 19만 3천 평의 토지를 강제 수용하였다. 일본은 처음 토지보상비로 평당19원씩 지급한다고 발표하였다. 하지만 실제로는 이런저런 이유를 들어 8원밖에 지급하지 않았으며, 인력동원도 진위군 이방의 협잡으로 백성들이 분쟁을 일으키는 등 잡음이 끊이지 않았다.

원평동에 평택역이 세워지다

경부선 평택역은 진위군 병남면 통복리에 설치되었다. 당시만 해도 통복리는 군문포에 인접해 있었을 뿐 수해가 빈번한 황무지였다. 일제가 인가도 없는 황무지에 철도를 건설한 것은 저들만의 속셈때문 이었다. 급속한 경제발전을 뒷받침할 값싼 곡물이 그것이었다. 당시 안성천변의 통한들, 동안들, 검은들, 번개들에는 궁방전, 둔전과 같은 국공유지가 널려 있었다. 일제는 을사조약 이전부터 국공유지와 황무지 개간에 눈독을 들였다. 통복리는 국공유지에서 수탈한 곡물과 아산만에서 생산되는 소금과 어물을 들여올 수 있는 지리적 이점과, 일본인 이민자들이 정착하는데 방해가 될 토착세력이 없었다.

평택역은 근대도시였다. 철도역 앞에는 경성-목포 간 1등도로가 지났고, 역에서 서남쪽 일직선상에는 시가지가 조성되었다. 시가지의 중심은 혼마찌라는 일본인 거리와 평택장이라는 조선인 시장이었다. 얼마 간 시간이 흐른 뒤에는 평택리라는 마을도 생겼다. 혼마찌 주변에는 금융기관과 여관, 식당, 일본인 주택이 있었으며, 시장에는 싸전거리, 진전거리, 우시장이 자리 잡았다.

친일파들을 제외하고는 조선인들은 혼마찌 거리를 함부로 배회하지 못했다. 원평동 토박이 김동섭(76)씨는 혼마찌와 시장의 경계는 평화병원이었다고 하였다. 혼마찌에서 기가 죽었던 조선인들도 시장거리에만 오면 기가 살았다.

1920, 30년대 사회운동이 전개될 때 대부분의 사회운동단체들이 싸전이나 우시장 주변에 자리를 잡았던 것도 시장이 조선인의 무대였기 때문이다.

철도역 광장은 근대도시 평택의 중심이었다. 일찍이 볼 수 없었던 넓다란 광장은 조선인에게 경이로움으로 다가왔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났을 때에도 광장은 시위의 중심이 되었다.
 1920, 30년대에는 청년, 사회단체의 집회가 개최되었고, 심지어 1930년대 초등학교 연합회 운동회도 광장에서 열렸다.

유엔군 폭격에 구시가지 초토화

원평동 구 역사(驛舍) 시대는 45년 만에 막을 내렸다. 1946년(병술년) 물난리로 초토화가 되더니 1950년 한국전쟁으로 잿더미로 변해버렸기 때문이다. 병술년 6월 저녁부터 내리던 비는 흡사 구멍난 하늘에서 폭포가 쏟아지듯 평택 전역을 물바다로 만들었다. 당시의 신문에 평택지역 시가지 전체와 안성천변 마을들이 수몰되었고, 80여 명의 인명피해가 났으며, 1,816에이커의 경작지가 유실되었다고 보도하였다.

수해가 지나간 자리에는 콜레라 같은 전염병이 창궐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다. 평택의 피해상황이 알려지면서 전국에서 구호품과 의약품이 답지하였으며, 미군정청과 경기도 등 행정기관에서도 지속적인 관심을 보였다.

물난리의 피해는 컸지만 도시전체를 옮길 만큼 큰 사건은 아니었다. 하지만 1950년 유엔군 폭격은 복구의 의지마저 꺾어버릴 만큼 엄청난 피해를 주었다. 당시 평택교회 목사이던 송두규씨는 유엔군 비행기가 나타나자 반가운 마음에 손을 흔들었더니 폭탄을 내리 부었다고 하였다. 원평동 평화병원 부근에 거주하였던 이갑순씨도 인민군들이 들어오기 전 유엔군의 폭격연습이 있다고 하여 구경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기차역에 정차하였던 화물열차를 폭격하더니 시가지까지 폭격하였다고 말했다.

유엔군의 폭격으로 원평동 구시가지는 80% 이상이 파괴되었다. 철도역을 물론이고 군청과 경찰서, 역광장 주변에 있었던 금융조합과 상업은행 건물까지도 푸석한 먼지만 남았다. 유엔군의 평택 폭격은 아직까지도 원인이 명확하지가 않다. 혹자는 38선 부근을 폭격하라고 명령하였는데 조종사들이 좌표를 잘못 읽어 37도선을 공격하는 바람에 일어난 우발적인 사건이라고 하지만 납득하기 어렵다.

어째든 유엔군의 폭격으로 역사(驛舍)를 잃어버린 평택역과 군청, 경찰서 등 공공기관은 한동안 떠돌이 생활을 하였다. 그러다가 원평동 구 시가지의 재건을 포기하고 철도역 건너편에 신도시를 건설하자는 제안이 나왔다. 필자는 아직까지 누구에게서 그와 같은 제안이 나왔는지 알지 못한다.

어쩌면 당시에 생각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었을 수도 있다. 신문기록에는 평택역의 이전기사가 나와 있지 않다. 대신 1953년 12월 26일에 평택경찰서가 이전하였고, 이듬 해 2월 9일에는 평택군청이 낙성식을 거행했다는 기록이 있을 뿐이다. 주민들 말로는 평택역이 가장 먼저 옮겨갔다고 하므로 대략 1953년 초쯤이었을 것으로 짐작할 뿐이다. 

새 역사 는 새 시대를 열수 있을까?

철도역과 관공서가 이전하면서 역과 함께 구 도시의 중심을 형성하였던 시장도 옮겼다. 시댁이 해방 직후 평택장에서 해산물도매점을 하였다는 이갑순(82세)씨는 평택장도 폭격으로 모두 날아가 버렸다고 하였다. 시장이 파괴되면서 터전을 잃어버린 상인들은 철도건널목 너머 시장로터리 부근에서 소규모 노점을 시작하였다.

이곳은 대부분 과수원이었지만, 통복교 부근에 진청학교(현 중앙초등학교)도 있었고 38번 국도가 지나는 교통의 요지여서 장사하기에 좋은 입지조건이었다. 그러다가 나중에 군청에서 과수원 자리에 구획을 정하여 상인들에게 분양하였다. 통복시장의 탄생이었다. 일명 ‘쌈니’라고 통칭되는 평택3리 사창가는 처음에는 규모가 크지 않았다.

사창가는 한국전쟁 전에도 구 평택역 아래 차부 옆에도 한두 집 있었다고 하였다. 그러다가 도심이 옮겨가면서 함께 이전하여 철도역 옆에 자리 잡은 것이 오늘날의 ‘쌈니’라는 것이다. 시장과 사창가, 그리고 쇼핑과 유흥을 즐길 수 있는 명동거리, 시외버스터미널까지 갖춰지면서 도시의 면모를 갖춰가던 신시가지는, 1992년 평택시청의 비전2동 이전과 통합 평택시의 출범, 철도역 외곽의 아파트 밀집지역 발달, 고덕국제신도시 개발 등으로 새로운 고민을 안게 되었다.

구도심의 침체와 슬럼화문제다. 문제해결을 위해 시 당국에서도 노력하고 있고 전문가들도 다양한 의견을 내고 있지만 해답을 찾기는 쉽지 않을 전망이다. 2009년 4월에 준공하는 평택민자역사 건설이 문제해결의 실마리를 줄 수 있을지 모른다는 작은 희망을 품어보지만, ‘거대자본의 평택침공’이라는 시각도 만만치 않은 터여서 앞으로의 행보가 주목된다.  

 

   
   
   
   
   


평택역과 역사 주변 시가지의 변모는 100년 한국 근대사를 반영한다. 사진 위로부터
일제 강점기 평택 정류장과 시가지. 목조 건물과 나무 전봇대가 눈길을 끈다.(평택문화원 제공)
2002년 평택역 플랫폼. 전철이 개통되기 전 경부선, 호남선, 장항선 열차가 섰다.
2003년 평택역과 평택역 광장. 일부는 주차장으로 쓰이고 집회가 열리기도 했다.
2008년 원평동에서 바라본 평택 시가지. 옛 주택들 사이 아파트 단지가 계속 들어서고 있다.
2009년 4월 완공을 앞두고 마무리공사가 한창인 새 평택역. 평택의 랜드마크가 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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