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서 대텅령상 수상 계기로 세상에 알려져

평택의 역사와 문화기행- 23

김 해 규 한광여고 교사

평택농악을 찾아서

요즘 우리나라 사람들은 참 놀 줄 모른다. 명절날 가족끼리 모여도 기껏 고스톱이 전부이고, 가을에 동네 사람들끼리 단풍놀이를 가도 이박사 테이프 틀어 놓고 몸만 좌우로 흔들어대는 것이 고작이다. 하지만 우리민족은 옛부터 한마디로 놀 줄 아는 민족이었다. 척박한 근, 현대사를 살아오면서 노는 것을 잊었을 뿐이지 참 재미있게 잘 놀았다. 힘든 일을 할 때에도 놀이로 흥을 돋우며 일을 하였고, 하늘이 닫힐 것 같은 답답한 일도 한 판의 신명나는 굿으로 풀어버릴 줄 알았다. 명절 때가 되면 대동굿을 하고 지신밟기를 하며 화합하고 복을 빌었으며, 내 고향처럼 바닷가 마을에서는 거리제, 풍어제, 선창제도 지냈다. 정말 우리 선조들은 기쁜 일은 기뻐서 놀고, 슬픈 일은 슬퍼서 놀고, 어렵고 힘든 일은 힘들어서 놀았다. 삶이 놀이였고, 놀이가 삶이었던 시절이다.

어릴적 우리 옆집은 주막(酒幕)이었다. 평상시에는 술을 팔거나 동네 아저씨들이 가끔씩 들러 신 김치에 막걸리나 한잔씩 마시던 주막집은 정월 초가 되면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동네 사람들은 이곳에서 술내기 윳놀이를 하거나 새 해 덕담을 늘어놓곤 하다가, 나중에 흥이 오르면 꽹가리나 장고를 가져와서 소리하며 춤을 추고 풍물을 쳤다. 옛날에는 동네마다 예인(藝人)으로 대우를 받는 사람들이 한 두 명쯤 있었는데, 우리 동네에서 가장 신명이 좋은 분은 돌아가신 유식이 형 아버지였다. 이 분은 꽹가리를 아주 잘 쳐서 인근에 소문이 났던 분으로, 술이 얼큰해지고 신명이 오르면 혼자서 지그시 눈을 감고 꽹가리를 쳤다. 그런데 그 소리가 어찌나 좋았던지 동네 사람들은 "예끼 이 사람 지나가는 동네 처자 애간장 녹겠네"하며 핀잔 아닌 핀잔을 하기도 했다.

평택농악은 평택을 비롯한 웃다리(서울, 경기, 충청지역) 지방을 대표하는 농악이다. 이 농악에는 평택지방 사람들 뿐 아니라 웃다리 지방 사람들의 꿈과 한과 눈물이 베어있다. 그럼에도 평택사람들은 평택농악을 잘 모른다. 평택농악을 통하여 만나고, 즐기고, 화해하고, 서로 가슴에 품은 꿈을 내어놓는 일은 더더욱 기대할 수 없다.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의 시민들이 빈 필하모니오케스트라를 빈의 전부 것처럼 생각하는, 애정과 관심이 평택에는 거의 없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여행하는 평택농악은 우리의 잃어버린 가치를 찾아가는 탕자의 길인 것이다.

평택농악의 파일난장굿

지난 5월 1일 부처님오신날 덕동산에서는 한바탕 놀이판이 벌어졌다. 한무리의 풍물패가 길놀이로 흥을 돋구고, 간단한 개회식과 축원 고사굿이 이어졌다. 초청받은 소리꾼들이 민요를 부르자 여기저기서 얼쑤, 좋~타 소리가 연신 터져나왔다. 놀이판은 평택농악보존회의 판굿이 시작되자 더욱 달아올랐고, 판굿이 끝나고 대동놀이로 이어지면서 흥에 못이긴 사람들이 놀이판에 합류하자 고조된 분위기는 절정에 달했다. 정말 묵은 체증이 쑥 내려가는 놀이판이었다. 이 판은 "파일난장굿"이라고 이름이 붙은 공연으로, 15회 째를 맞는 평택농악보존회의 정기발표공연이었다. 중요무형문화재(제11-나호)로 지정된 문화재는 의무적으로 해당 지역에서 지정발표공연을 해야하는데, 평택농악에서는 음력으로 4월 초파일에 난장굿을 통하여 발표공연을 한 것이다. 평택에서는 유일한 국보급 문화재 공연인데도 관람객은 그리 많지 않다. 관람객 중에서도 놀이판에 끼어서 함께 즐기는 사람은 더욱 적다. 선지자는 고향에서 환영받지 못한다더니, 평택농악이 갖는 전국적인 지명도에 비하면 초라한 잔치였다. 지난 토요일 오후 팽성읍 평궁리에 있는 평택농악전수관을 찾았다. 평택농악전수회관은 1985년 평택농악이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면서, 평택농악의 계승과 발전을 위해 건립한 건물이다. 평궁리는 너른 평궁리 들 가운데 자리잡은 마을로 내원, 새터, 상평 등 세 개의 마을로 나뉘어졌다. 본래 궁(宮)자가 들어간 지명은 행궁(行宮)이 있었거나 궁토(宮土)와 관련된 경우가 많은데, 평궁리 주변에는 명례궁(덕수궁의 옛 이름)의 궁토와 순화군이라는 왕족의 토지가 있었다. 가난한 농민들에게는 국가나 지배권력이 끼어 들면 힘들고 피곤하다. 이곳의 농민들도 예외가 아니어서, 조선왕조실록에는 궁방전이나 역토(驛土)를 경작하던 이 마을의 농민들이 계속되는 수탈을 못 견디고 지주나 마름을 살해한 사건들이 종종 눈에 띈다. 삶은 고통스러웠지만 평궁리 농민들은 모진 세월을 굳굳히 견디어왔다. 이들을 고통에서 덜어준 것은 이웃 사이의 연대의식과 두레농악과 같은 놀이였다.

한 번 걸판지게 놀고 나면 쌓였던 근심도, 찜찜했던 기분도 사라지고 희망의 끈을 곧추 세울 수 있었다. 주말인데도 평궁리 평택농악전수회관에는 사람이 거의 없다. 나중에 김호환 사무국장에게 들은 바로는 후계자 강습이 있는 기간이나 일반강습이 있는 날이 아니면 사람들이 거의 모이지 않는다고 하였다. 평택농악의 상징인 상쇠 최은창 선생도 최근 노환으로 거동이 불편하다고 하였다. 그럼에도 평택농악전수회관은 평택농악의 산실로 큰 역할을 하고 있다. 평택농악에 미친 김호환 선생과 많은 후계자들이 평택농악의 계승과 발전을 위해 부단히 고민하고 노력하고 있기 때문이다.

웃다리 농악을 대표하는 농악(農樂)

농악(農樂)은 대부분의 농촌지역에서 일반적으로 존재한다. 특히 들이 넓고 벼농사가 발달한 지역에서 농악은 거의 필수적으로 존재하는 요소이다. 농촌지역의 마을농악은 대부분 두레농악에 기반을 두고 있다. 본시 두레는 논농사가 발달한 지역에서 김매기(피뽑기)를 위해 조직한 공동노동조직이다. 초여름부터 백중 때까지 계속되는 김매기는 허기진 농민들에게 뼈 골 빠지는 고통이었다. 두레농악은 기진한 농민들에게 힘과 용기를 주었던 놀이였다. 그래서 이른 아침에 두레패들이 모일 때도, 들에 나갈 때도, 일을 할 때도, 그리고 일하는 짬짬이 새참을 먹고 쉴 때도 농민들은 풍물을 치며 신명을 돋우었다.

평택지방에는 본래 "평택농악"이라는 이름의 "농악(農樂)"은 없었다. 그저 몇 몇 마을에 두레패가 있었을 뿐이다. 평택농악이 만들어진 것은 평궁리 출신의 상쇠 최은창(88세) 선생에 의해서다. 최은창 선생은 어릴적 평궁리 두레패에서 기예를 익혀 상쇠를 치다가 나중에 웃다리지역(서울, 경기, 충청)의 전문연희패에서 활동했던 분이다. 1공화국시절에는 이승만 대통령의 생일을 기념하여 전국적인 농악경연대회가 열렸는데, 당시 평택군에서 최은창 선생에게 참가를 권유하자 선생이 웃다리(서울, 경기, 충청) 지역의 전문연희자들을 모아 "평택농악"이라는 이름으로 참가한 것이 시작이었다. 하지만 이 단체는 곧 해산하였고, 현재의 평택농악은 1980년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의 요청을 받아 천안, 안성, 서울, 공주지역의 실력 있는 명인들과 평궁리 두례농악 패를 주축으로 "평택농악"을 재구성하면서 만들어졌다. 이 대회에서 평택농악은 대통령상을 수상하였는데, 이 일을 계기로 세상에 이름을 알려지게 되었고, 1985년에는 중요무형문화재(제11-나호)로 지정받았다.

그래서 평택농악보존회 김호환 사무국장은 평택농악을, 평택을 대표하는 농악이 아니라 웃다리 농악을 대표하는 농악(農樂)으로 규정한다. 좀더 상세히 말하면 웃다리 농악 중에서도 상쇠 최은창 스타일의 전문연희패적인 성격이 두드러진다는 것이다. 김호한 선생은 그 이유를 근대시기를 전후하여 전라도지방이나 경상도 지방에서는 마을 두레농악이 발달하여 현재에는 지역을 대표하는 농악으로 발전하였지만, 웃다리지방은 전문연희패들의 활동이 활발해서 마을 두레농악이 쇠퇴했기 때문이며, 20여 년 전 평택농악이 만들어지는 과정에서도 핵심멤버는 전문연희패 출신의 연희자들이 주축이 되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내가 알기로도 전라도를 대표하는 이리농악이나 필봉농악, 운봉농악 등은 같은 전라도에서 만들어진 농악인데도 가락과 판세가 많이 다른데 비하여, 안성농악이나 용인농악의 가락과 판세는 평택농악과 거의 같다. 최근 근대시기 우리나라의 큰 소리꾼이었던 이동백 선생이 말년을 칠원동 새말에서 보냈다고 해서 추모제를 한다고 들썩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동백 선생보다 민중들의 삶의 토양에서, 민중들의 정서를 자양분으로 형성된 평택농악이 가치가 높다고 생각한다. 지역문화는 가치를 알아주는 지역사람들의 애정과 관심을 먹고 자란다.

전통의 계승과 발전의 갈림길에서

김호환 선생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평택농악보존회는 전통의 계승 뿐 아니라 발전문제를 어떻게 고민하느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정색을 하며, 평택농악은 전통의 변화와 발전보다 계승과 보존문제를 더 고민하고 있노라고 하였다. 좀 더 자세히 설명해달라고 했더니, 현재 이수자들의 기예가 최은창 선생이나 평택농악 1세대에 비해 많이 떨어지는 것을 예로 들었다. 예컨대 평택농악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무동놀이는 최은창 선생이 활동하던 때와 비교해서 약 30% 밖에 재현하지 못하고 있으며, 무동놀이의 하이라이트인 곡마단의 경우는 시늉만 낼뿐이라고 하였다. 엄격한 위계질서 속에서 평생 밥먹고 기예만 연마하던 전문연희자들과 , 자기 직업을 갖고 기예를 연마하는 사람들의 수준차가 존재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와 같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현재 평택농악의 계승자들은 전통의 계승을 위해 눈물겹도록 노력한다. 노력만큼 지명도에 있어서도 전국적이다. 평택에서 하는 발표공연은 문화재청에서 지정한 년 1회의 발표공연에 불과하지만, 1년에 약 15회의 외부공연을 소화하고 있다. 작년 한 해만 해도 고양 꽃 박람회, 광주 국제 비엔날레, 안동 탈춤 페스티발 등 국내의 주요 행사에서 초청공연을 할 정도이다.

농익은 평궁리 가을들판은 온통 황금색이다. 마음 급한 농부는 벼 베기를 시작하고, 볏섬을 싫고 가는 농부는 연신 싱글벙글이다. 벼 수매에 대한 걱정도 수확의 기쁨에 비할 바가 아닌 듯하다. 요즘에는 모내기에서 벼 베기와 탈곡까지 모두 기계가 대신하는 바람에 벼 베기를 하다가 농주(農酒) 한잔에 새참을 먹던 풍경은 아련한 추억이 되었지만, 수확은 농사일의 하이라이트임은 분명하다. 달라진 들판만큼 우리의 전통문화도 소멸 내지는 변화를 강요받고 있다. 들판에서 자라 농민들의 삶과 어우러졌던 평택농악도 변화에서 예외는 아닐 것이다. 하지만 변화 속에서 사라져 가는 문화가 아니라 변화된 우리의 삶의 새로운 자양분이 되는 문화이기를 기대한다.

<역사/문화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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