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택 출신 독립운동가 민세 안재홍과 관련한 단행본이 현재 100여 권 넘게 출간돼 있다. 한국 근현대 지성사에서 안재홍의 영향력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일제강점기와 해방공간에 걸쳐 우리의 과거, 현재, 미래를 줏대 있게 고민하며 국가비전을 설계하고 실천한 민세 안재홍. 그를 다룬 책들을 찾아 그 의미와 핵심대목, 독서 포인트 등을 소개해 민세 정신을 널리 알리고자 한다.
통일국가 수립 전단계로
남한단독정부 수립 지지
1948년 공창제 폐지 지지하며
성매매업자들의 뇌물 단호하게 거부
<해방일기 9>는 1948년 1월 2일부터 4월 29일까지의 가상 기록이다. 이 해 2월부터 각지에서 파업 등 소요가 연이어 발생했고 민정장관 안재홍은 이에 대해 기자회견을 했다. 이 시기 민세는 공창제 폐지 문제로 큰 곤혹을 치렀다. 여성의 인권향상에 크게 기여한 공창제 폐지는 성매매업자들의 불만을 샀고, 이를 막기 위해 집요한 뇌물 공세가 이어졌다. 그러나 민세는 이를 단호하게 거절했다. 4월 3일에는 민족사의 큰 불행인 4.3이 제주도에서 있었다. 1948년 1월 8일 유엔조선위원단이 내한했다. 소련은 유엔조선위원단의 북한입국을 거부했다. 민세는 미소공위 결렬 후 한국문제가 UN으로 넘어갔고, UN 감시하 단독정부의 수립이 보통선거를 실시해 민의를 묻고, 행정권을 일원화하여 국민을 민주주의 정신으로 훈련하며 산업경제를 재건하기를 기대했다. 그는 조선이 분단으로 나가는 단독조치가 민족의 불행임을 절감했으나 불가피하게 수용할 수밖에 없다고 봤다.
최선을 지향하는 차선책으로
남한단독정부 이후 더 나은 길 모색
민세의 좌우명에 최선이 힘들면 차선을 택해도 좋을 때가 있다라는 말이 있다. 독립이후 남북이 뜻을 합쳐 통일국가를 세우면 가장 이상적이겠지만, 미소의 갈등에 민족분열이 겹쳐진 상황에서 우선 남한만이라도 민주정부를 세워 그 다음을 도모하자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먼저 봐야할 문제는 외세의 문제이지만, 궁극적으로 중요시할 문제는 조선인의 문제입니다. 앞으로 세계대전을 몇 차례 더 겪는다 해도 민족의 힘이 충분치 못하면 외세의 힘에 민족의 운명이 좌지우지되는 상황에서 벗어날 길이 없습니다. 해방을 계기로 우리는 큰 희망을 일으켰지만, 이제 굳어져가고 있는 분단건국이 지금 상황에서 우리의 운명이라고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다음 단계에서는 더 나은 길을 찾을 수 있도록 그 운명 속에서 최선의 노력을 기울일 수밖에 없습니다(해방일기 9, 510쪽).
이 시기 백범 김구는 단독정부를 막기 위해 남북협상을 실천했다. 당시 한민당 세력은 온갖 중상모략으로 이를 맹비난했다. 그러나 민정장관 안재홍은 당시 정세 상 많은 한계가 있었지만 성공하기를 바랐다. 그러나 그 큰 대의에도 불구하고 납북협상은 실패로 끝났다. 이해 5월 10일 남한에서는 총선거가 있었다. 민세는 해방 후 민족통일운동에 힘써온 세력들이 선거에 다수 참여하기를 희망했으나 결과는 그렇지 못했다. 단독정부 수립 자체에 큰 의미를 두었던 한민당과는 달리 안재홍은 단독정부는 통일정부 수립을 위한 전단계로 인식하고 정부수립 이후에도 뜻을 이루기 위해 힘썼다.
황우갑 전문기자·민세기념사업회 사무국장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