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위향교와 조선 개국공신 삼봉 정도전 사당 문헌사 등 탐방

진위향교와 조선 개국공신 삼봉 정도전
사당 문헌사, 원균장군 묘 모선재 등 탐방

[평택시민신문] ‘정도전길’은 걸어보기를 기다려온 길. 그만치 궁금한 지점이 몇 군데 있었다. 오늘따라 유난히 북적인다 싶어 헤아려보니 섶길 걷기를 시작한 뒤 가장 많은 스물다섯 분이 참여했다. 이는 정말 바람직한 일. 그중 다들 귀한 손님처럼 맞이해 준 박경순 사진작가의 손끝을 눈여겨보는 분위기였다. 출발지는 유서 깊은 진위면사무소. 구한말까지 일대를 관할한 진위현청이었으나 정부 수립을 앞둔 1948년 4월 군청소재지를 비전동으로 옮긴 이래 평택의 한쪽 구석에 자리한 소규모 부설행정기관쯤으로 여겨왔다. 정작 진위는 그대로인데 딴 데서 여기를 중심으로부터 기어코 밀어냈는지도 모른다. 봉남길을 따라가는 길에 주렁주렁 매달린 조롱박. 우습게도 그 속에 무얼 담느냐에 따라 여인들이 뒤웅박 신세가 되던 때가 있었다. 읍치(邑治)였던 봉남리(鳳南里)는 무봉산 남쪽에 위치한 마을이라는 뜻. 근처에 조선조 영의정을 지낸 심순택의 처 능성구씨의 99칸짜리 집이 있었는데 100여 년 전 형태를 유지하지 못한 채 헐리고 말았단다. 보존가치가 높은 문화재급 반가(班家)를 망실한 안타까움은 두고두고 남을 수밖에 없다.

진위향교(1983.9.19. 경기도문화재자료 제40호)에서 귀담아들은 한도숙 씨의 유창한 해설. 예로부터 이곳을 가리켜 무봉산 아래 오룡쟁주형(五龍爭珠形)의 명당이라고 했단다. 하지만 그의 말마따나 아무리 살펴본들 배산임수형의 산자락이로되 암수 봉황이 춤추는 것 같지는 않다. 조선왕조 초기에 현유(賢儒)의 위패를 봉안하고 배향함으로써 백성의 교육과 교화를 위해 설립한 터. 서당은 사립초등학교, 향교는 국립중등교육 기관이었다. 1644년 지은 기와집은 병자호란 때 소실되었고, 여러 차례 중수를 거친 끝에 6칸의 대성전과 강학(講學) 공간인 명륜당(明倫堂), 그 양쪽에 동재(東齋)와 서재(西齋), 맞배지붕을 이룬 외삼문(外三門) 등을 갖추었으나 코로나바이러스의 재공습으로 인해 하나씩 둘러보며 설명을 들을 수는 없었다. 국가에서 토지와 전적에 노비 등을 지급해 교관 1명이 30명의 교생을 가르치다가 조선 후기 들어 교육 기능을 거지반 잃는 바람에 일제강점기를 불러들인 건 아닌가 탄식한다. 개인사를 소환하면 필자의 조부는 서당 훈장이셨다. 취학 전 잠시 그 슬하에 있을 적, “하늘천(天) 따지(地) 검을현(玄) 누루황(黃)”을 목청껏 외우던 형들이 떠오른다. 그들은 기다랗게 머리를 땄었다.

삼남길에서 읽은 나루터와 정도전(鄭道傳) 이야기. 평택지역은 일찍이 해상교통이 발달했다는 기록부터 안성천의 군문포와 신왕나루를 비롯해 청북의 토진포, 웅포, 신포 등이 배들이 드나든 포구였다는 안내문이었다. 조선 초기 개혁의 상징이었던 삼봉(三峰)을 가슴에 안고 접어든 논둑길. 장마철 무논에는 피들로 가득했다. 전봇대에 표시한 화살표가 가라는 데로 발걸음을 옮기니 대로변이었다. 한결 맑아진 대기. 이제 큰길가를 따라 산책한들 매연에 시달릴 위험도는 뚝 떨어졌다. 역설적으로 몹쓸 병원균이 몰고 온 선물이다.

심순택 처 능성구씨 문화재급 99칸 
봉남리 집 헐려 안타까워
마안산 산허리 뚝 잘라 들어서는 
건조물에 오싹함 느끼며
팬데믹 이후 미래지향적이고 
친환경적인 인류 문명 기대

길 건너 마산리(馬山里)에는 통막걸리주막집 쉼터가 있었다. 참새가 어찌 방앗간을 그냥 지나치랴. 여기저기서 잔들이 오갔다. 종이컵에 가득 담은 정성을 뿌리치지 못해 입술에 살짝 대자 역시나 술은 술. 그 옛날 약주에서 풍기는 특유의 향이 아니었다. 배고픈 시절 등굣길에 술지게미를 주워 먹고 그만 책상에 엎어져 잠에 빠져든 아이가 있었단다. 곧 영문을 모르고 회초리를 댔던 한 노교사의 회한 어린 회고담. 고려 전기의 우현(禹玄)이 단양우씨의 시조로서 오백 년 씨족 마을을 형성했단다. 요 근처에 산다는 부부 화가네를 곁에 두고 오르는 산길. 그런데 초입에서 낫을 들고 잔가지를 쳐내다 땅벌의 매서운 공격을 받은 이가 있었다. 잔뜩 긴장한 채 조심스레 일행의 발길을 이끄는 배려가 더없이 고마운 이유다. 퍽 완만한 숲길. 군데군데 섶길 표지를 볼 때마다 느끼는 건 처음 길을 내기 위해 뛰어다닌 분들의 눈물겨운 분투기다. 그 노고를 엿들을 때면 어느 때나 앞서간 선견자들의 실천이 돋보일 따름이다.

이따금 수풀 사이로 보이는 바깥 풍경. 하지만 산허리를 뚝 잘라 들어서는 건조물에서 받는 오감은 오싹함이다. 기둥의 기초를 다지는 듯 연신 울려 퍼지는 소음에 지저귀는 산새 소리를 아예 들을 수 없었다. 그나마 정겨운 풀벌레 소리마저 사라져버리면 산은 반쯤 죽은 거나 다름없다. 김광섭의 ‘성북동 비둘기’라는 시작품이 1969년에 발표되었으니 개발독재의 포성을 마구 쏘아댄 지도 어언 반세기. 그만큼 산업화와 민주화의 두 마리 토끼를 잡았다고 자랑을 늘어놨으면 지금이야말로 환경친화적인 정책 기조를 뛰어넘어 자연보호를 위해 앞장설 시점이다. 그 길이 팬데믹(Pandemic) 이후를 상정한 대비책이라고 본다. 그런 뜻에서 섶길 걷기에 동참하는 윤한택 박사의 “제22호 코로나19 시대, ‘전환’을 생각한다”는 시론은 짙은 시사점을 던져준다. 전염병과 문명사를 되짚으며 새로운 세계사의 지평을 열어가는 혜안에서 발견한 가치는 그동안 인류사를 이분법적으로 재단한 오류를 바로잡자는 미래지향적인 제언이었다.

전망이 생긴 산등성이에서 이어간 해설. 멀리 쌍령지맥과 서봉지맥을 좇아 흘러온 비산비하(非山非河)의 형상에 대해 죄다 알아차리기에 벅찬 건 순전히 필자가 지닌 배경 지식의 저용량 탓이다. 다만 뚜렷이 이해한 건 평소 그의 지론에는 자연과 사람의 화해가 듬뿍 녹아있다는 점. 하긴 늘 불화를 촉발한 쪽은 인간이었다. 그래서인지 정도전 사당을 눈앞에 두고 풀어놓은 이면사는 한껏 절절했다. 당대로서는 미증유의 입헌군주제를 역설한 삼봉의 좌절은 응당 한국사의 일대 퇴행이었다. 역사에 가정이란 부질없는 노릇이로되 만일 앞서간 그의 행보에 진척이 있었더라면 아마 대한민국은 이미 지구촌을 주도하고 있으리라. 굳이 서거정(徐居正)의 혹평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서자로서 벼슬길에 올랐다고 개국공신을 깎아내리며 아귀다툼을 벌이다니 뒷입맛이 씁쓸했다. 해주오씨에게 무시당한 봉화정씨의 일화가 그것. 덕봉서원에 모신 오두인(吳斗寅)의 충절이나 정도전이나 진충보국의 정신은 매한가지일진대 여태껏 비명에 간 한의 무게를 재는 어리석음이라면 그 속내는 정녕 기저에 깔린 열등의식 때문은 아닐까.

풍성한 논밭길을 지나 삼봉 사당인 문헌사(文憲祠)에 들러 숨을 고른 뒤 정원을 곱게 가꾼 꽃동네를 걸었다. 산기슭을 적시는 물소리를 들으며 따라가는 다랑논. 관개시설이 없을 때는 하늘만 쳐다보는 천수답이었다. 삼국시대 이후로 수경 농법을 개발하면서 계단식 논을 일궜단다.

조하식
수필가·시조시인
고등학교에서 국어와 문학을 가르치며
수필집, 시조집, 기행집 등을 펴냈다.
퇴임 이후 기고 활동과 더불어
교육철학 박사과정을 이어가고 있다.
이충동에 살고 있다.

그나저나 찌는 듯한 무더위에 습도까지 높은 건 보행자에겐 최대 취약점. 이제 덕암산 줄기 하나만 더 넘으면 목적지에 다다른다. 등산길 입구를 잘못 드는 통에 흩어진 잡목을 헤치고 오르긴 했어도 그 덕분에 강풍에 떨어진 알밤을 한 움큼씩 주운 건 외려 행운이었다. 드디어 마주한 원균장균 묘 모선재(慕先齋). 부메랑 모양의 꺾쇠 세 개로 만든 삼남길 안내표지판은 다양한 의미를 담고 있었다. 충청, 전라, 경상의 어디로 가든지 결국 대자연으로 돌아가자는 뜻에서 리본에 사용한 녹색은 녹음을, 황색은 흙길을 상징한단다.

약 11km의 섶길을 걷는 동안 간간이 땀방울을 식혀준 동무는 새빨간 배롱나무꽃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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