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해바다·계성초·대추리 등 조망하며 평택의 근현대 숨결 느껴

팽성읍 신대2리 출발해 경양포구 대추리 거쳐 돌아오는 5km 길
도두리 출신 정태춘 노래 ‘장서방네 노을’ 따 ‘장서방네 노을길’ 명명 
서해바다·계성초·대추리 등 조망하며 평택의 근현대 숨결 느껴 

[평택시민신문] 앞서 산성길에서 공들여 다진 길 찾기 맹훈련은 우리 부부를 냉큼 노을길 쪽으로 이끌었다. 그 끝자락을 끼고 도는 ‘장서방네노을길’. 하지만 신대2리 버스 종점은 쉬이 수더분한 자태를 드러내지 않았다. 주위를 빙빙 돌다 동네 노인께 여쭈니 바로 여기라는 응답이 돌아왔다. 가까스로 마을 한쪽에 자동차를 대고 접어든 골목. 반갑게도 초장에서 거푸 섶길 표지를 발견했다. 비구름이 햇볕을 가린 오후 나절. 그야말로 걷기에는 최적이었다. 게다가 새터에 일군 훈훈한 민심의 투영일까? 몇몇 주민들의 낯빛에는 평온함이 깃들었다. 서해가 보이는 언덕배기를 차고 앉은 군부대. 그 샛문을 비껴가는 길목에서 무화과를 만났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붉은 꽃들과 어우러진 길가 풍경. 거기서 야구장 공사장까지 가는 길은 아리송했다. 섶길 화살표지가 아예 없어 애를 먹은 첫 지점. 일단 홀로 젖은 풀숲을 헤치고 안쪽으로 들어갔다. 부지런히 이곳저곳을 기웃거렸으나 아무래도 찾는 섶길은 아닌 듯했다. 그때 눈앞에 나타난 ‘충절공 임휘팔급 유래비문’. 한국임씨중앙회에서 세운 기림비였다. 뜻하지 않게 평택 임씨 시조의 분묘를 확인한 참. 순간 노을길을 걸으며 농성에 갔을 때 들은 이야기들이 번개처럼 뇌리를 스쳤다.

적지 않은 시간을 끌다가 부득불 큰길을 따라 이어가 보기로 했다. 아니나 다를까 얼만큼 가자 섶길 표지가 삐죽 얼굴을 내밀었다. 일테면 너무 오붓한 길을 고집하다가 하마터면 낭패를 볼 뻔한 경우랄까. 그로부터는 비교적 순탄했다. 국제대교 교각 밑을 지나니 호젓한 산책길. 온갖 잡풀과 키 작은 나무들이 빼곡히 자라나는 길섶에 서니 불현듯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운치 있는 길을 품고 걷다가 굴다리 앞에서 기념사진을 남기고 빠져나오자 시원한 평택호가 동영상처럼 펼쳐졌다. 저 멀리 보이는 명상길과 비단길. 기분 좋게 걸었던 섶길이 어렴풋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러고 보니 시방 걷는 장서방네길은 마을길과 산길이 두루 겹치는 지점. 얽히고설킨 전깃줄만 아니라면 투명한 물길과 맑은 하늘길이 장맛비에 씻긴 말끔한 산하를 두고 서로 제 것인 양 다툴 뻔했다. 단둘이서 걷는 오솔길. 나는 콧속을 파고드는 상큼한 바람결에 잠시 온몸을 내어주기로 했다. 오롯이 심신이 치유되는 느낌. 덩달아 개운한 이성과 감성을 만끽하는 나의 영육(靈肉). 이처럼 들숨과 날숨을 멈추지 않는 한, 두 발 붙이고 살아가는 지상에서는 육신이 영혼을 담는 그릇이니까 말이다.

다시금 한산한 차로. 곁으로 둔포천과 삽교천이 나란히 흘렀다. 동시에 진위천과 안성천까지 합쳐 이같이 드넓은 호수를 이룬 참이로다. 지독한 가뭄에도 논물 걱정을 덜어준 일등공신을 마주하니 오랜 세월 소금기를 뺀 평택평야의 쌀밥을 들며 왜들 맛있다고 하는지를 오롯이 알겠다.

낚시꾼이 간간이 보이는 데는 예전에 경양포 등대가 자리했던 곳. 그 흔적이라도 엿볼까 싶어 잘 꾸민 사설 정원에 들러 유심히 전망을 살폈다. 아주 드물게 허가한 가두리 양식장. 외로이 물새 한 마리가 자맥질을 해댄다. 보다시피 이만치 수질을 유지하는 비결인 셈이다. 선명한 팻말이 본정리와 노양리를 가리켰다. 앞만 보고 가다가 만난 산고수장(山高水長) 쉼터. 번듯한 주택가 텃밭에서는 토실토실한 토마토를 키웠다. 논둑을 비집고 자라난 봉숭아꽃. 고대 눈살을 찌푸린 건 잡풀이 무성한 어린이놀이터였다. 들판 한가운데 유리창 달린 정자와 함께 미끄럼틀을 설치한 까닭인즉슨 아마도 농번기를 대비한 듯 보이지만 왠지 발길이 뜸한 공터에 혈세를 낭비했다는 질책은 받아야 마땅하리라. 비슷한 맥락에서 농로 좀 넓히느라 야산을 축내 축대를 쌓은 살풍경 또한 달갑지 않은 농정이렷다. 모름지기 자연은 자연 그대로 놔둬야 생태계 자체가 살아나 자연다워지는 법이거늘 어딜 가나 역하고 독한 시멘트에 노출된 현장들뿐이니 때로 무력감이 들곤 한다. 아, 쓰리고 아린 이내 동공이여!

마을길과 산길이 두루 겹치는 
장서방네 노을길 걷다 보니
콧속을 파고드는 상큼한 바람결에 
어느덧 치유되는 심신

논배미를 걷다가 눈에 띈 농가명이 있었다. 이름은 ‘장순태’, 나는 대뜸 아내를 불러세워 아니 이분은 섶길추진위원장이 아니냐고 물었다. 여인이 미소지으며 왈, 그분은 장순범이란 말에 골머리가 띵? 잽싸게 연유를 따져보니 직감적으로 장순태 씨에 안효태 어르신이 결합되면서 어이 없는 착각을 불러일으킨 걸로 일단락지었다. 아재 개그도 이쯤 되면 단숨에 달아오르는 열기마저 식힐 성싶었는데 그에 못지않은 우스갯거리가 옆에 있었다. 전혀 새로운 버전의 허수아비. 재치 넘치게 만든 형상이 재미있어 얼른 사진기에 담았다. 여기저기 나뒹구는 비료 자루를 잘게 잘라 마치 치맛자락처럼 길게 늘어뜨린 게 영락없이 낟알을 쪼아먹으러 덤비는 새떼를 노려보는 모양새 중 백미는 아주 조그만 얼굴에 매서운 눈매. 어찌 보면 참새 대가리 같기도 하고 언뜻 새침한 새색시 같아서 쳐다볼수록 흥미로웠다. 그 곁에서 큰 작대기를 들고 훠이 훠이 소리를 지르며 거드는 이들까지 내세운다면 훨씬 실감이 나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자꾸만 뒤를 돌아다보면서 자리를 떴다. 자고로 창발적 사고란 들판에서 나오는 법이다.

못내 아쉬운 건 사방 교차로에서나 누가 봐도 헷갈리는 지점에 방향 표시등이 빠졌다는 점. 물론 요즘 궂은일을 도맡아 하시던 분들이 하나둘 빠지는 바람에 미처 빈틈을 메울 손길이 태부족인 걸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이왕지사 수고하시는 김에 빤한 데다가 섶길 리본을 매달기보다는 약수터 같은 결정적인 한 방이 필요하단 고언이다. 단지 평소 나의 지론은 잘 모르든지 모호할 때는 직진하라는 지침. 어쨌든 두어 군데 두리번거리다 그 경험칙이 들어맞은 건 행운이었다. 무르익어가는 사과 열매를 등지고 접어든 대로변. 우리는 노양2리(노산) 표지석에 표시된 화살표마저 본 척 만 척 방향을 윗길로 틀었다. 그 둔덕에서 만난 계성교회와 계성초등학교는 덤. 유치원생을 포함한 전교생 60명에 교직원은 18명이랬다. 뜰에 핀 탐스러운 함박꽃을 기억에 담은 뒤 넓은 정원을 갖춘 교정을 둘러보니 그야말로 드러난 교육 여건은 최상위 수준이다. 부디 교훈처럼 ‘새로운 생각, 올바른 행동, 참된 사람’을 듬뿍 배출하기를!

아까 봐두었던 커다란 소나무를 향해 되돌아가는 길. 수령이 310년을 넘긴 보호수였다. 전형적인 시골 동네를 벗어나자 소담스레 가꾼 밭뙈기 사잇길. 이번 섶길은 그간 걸어본 길 가운데 대표격이었다. 표지석은 비교적 이정표 기능에 충실했거니와 무엇보다 안전한 보행에 도움이 되도록 섶길을 선정한 노력이 돋보였다. 어차피 초행길인지라 애는 썼으되 그 또한 초석을 놓은 분들의 노고가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 장맛비가 소강상태를 보인 틈에 걷기를 실행했으나 거짓말처럼 차에 오르자마자 제법 굵은 빗방울이 차창을 때렸다. 때마침 은은한 기타 선율에 젖어 도두리 출신 정태춘이 부르는 ‘장서방네 노을’을 듣는다면 더 바랄 게 무어랴?

당신의 고단한 삶에 바람조차 설운 날 먼산에는 단풍 지고 바닷물도 차더이다
서편 가득 타오르는 노을빛에 겨운 님의 가슴 내가 안고 육자배기나 할까요 (중략)
저녁 해에 긴 그림자도 님의 뜻만 같이 흔들리다 멀어지다 어둠 속에 깃드는데……!

조하식 
수필가 · 시조시인
고등학교에서 국어와 문학을 가르치며 
수필집, 시조집, 기행집 등을 펴냈다. 
퇴임 이후 기고 활동과 더불어 
교육철학 박사과정을 이어가고 있다. 
이충동에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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