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시대 이래 국가 방어와 국제교류 역사 체험 기회

삼국시대 이래 국가 방어와 국제교류 역사 체험 기회

[평택시민신문] 미리 잡힌 약속 때문에 빠진 ‘산성길’을 아내와 같이 걷게 된 건 순전히 임금택 씨 덕분이었다. 청북읍사무소를 나와 오른쪽 언덕으로 방향을 틀자마자 곧바로 가파른 산길로 접어들었다. 점잖은 안내 표지만 보고서는 이내 찾기 어려운 숲길 입구. 길과 길을 연결하기 위해 불철주야 수고하신 분들이 허름한 민가의 텃밭을 통과하는 문제를 어찌 풀었을지 새삼 알고픈 지점이었다. 제법 우거진 수풀을 걸어가다 만난 널찍한 밭뙈기. 농로에 세워둔 경운기에는 굵직한 노각들이 차곡차곡 쌓여있었다. 땅콩을 비롯해 참깨며 토마토 농사를 짜임새 있게 관리하는 노인의 모습이 퍽 인상적이었다. 삼정대산 기슭을 수놓은 개망초 군락지. 그 옆구리에 날렵한 육송들이 여럿 보였다. 여봐란듯이 꾸민 묘지들. 새까만 비석에 새긴 글자를 확인할 겨를은 없었지만 상당한 재력이 아니고서는 조성하기 힘든 넓이였다. 그러잖아도 비좁은 땅에 꼭 저럴 필요성에 대해서는 보다 미래지향적으로 속마음을 터놓고 서로 숙의할 논제라고 본다.

그새 중간에도 멈추지 않는 길도우미의 낫질. 연신 섶길을 가로막은 나뭇가지는 물론 잡풀을 제거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잠시 발길을 멈춘 곳은 각종 운동시설을 갖춘 도시근린공원. 아쉽게도 이용객이 거의 없어 적막감마저 감돌았다. 매끄러운 산책로를 지나 통과한 평택현곡일반산업단지는 예상을 깰 만치 널따란 부지. 이정표에 표시된 업체만 해도 사방으로 수십 개는 넘는 듯했다. 이끼 긴 보도블록에 피어난 풀꽃들. 인적이 워낙 드물다 보니 시멘트 틈새를 비집고 자라난 식물들이 어느 발걸음인들 반갑지 않으랴. 유독 내 눈길을 끈 건 네모진 맨홀 주위를 감싼 이름 모를 새싹. 주위를 둘러보니 대규모 경작지가 많았다. 가까이서 발견한 고구마꽃. 좀처럼 보기 어렵다는 걸 떼로 조우한 터였다. 호사가들 말마따나 정말 나라에 무슨 일이라도 일어나려나? 조심스레 사진을 찍으며 농담처럼 나눈 부부의 대화는 코로나바이러스로 인한 작금의 정국이 대내외적으로 필시 예사롭잖은 건 극사실이라는 데 방점.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나만 잘 살고 보자는 부동산문제까지 민심을 뒤흔들어 이래저래 뒤숭숭하다.
  교차로를 건너니 길가에 도라지꽃들이 만발했다. 하양과 보라의 대향연. 그 곁에 고명처럼 얹은 백일홍 세 송이가 우릴 보고 윙크했다. 적어도 거기까지는 좋았다. 널따란 수박밭에서 따낸 여분에 눈길이 갈 때까지만 해도, 문제는 그다음. 노란색 물통을 가리키며 분명히 이 길이 맞노라고 몇 차례 왔던 길을 되짚는 동안엔 곧 찾을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놓지 않았으나 이쪽저쪽을 쏘다니며 묻고 헤매다 보니 점점 이러다간 오늘 여기서 산성길 걷기를 자칫 마감할 수도 있겠다는 불길한 예감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단톡방에 뜬 사진을 펼치고 간편 지도를 펴본들 무용지물. 도무지 가늠할 만한 단서조차 나오지 않은 채 타는 속내가 급속히 불안해졌다. 하지만 그대로 앉아 죽으란 법은 없다던가. 오리무중이 따로 없는 형국에 천만다행 담벼락에 쌓아놓은 장작이 눈에 띄었다. 그제야 그냥 지나친 주황색 헝겊 조각이 등대처럼 보였다. 평택 섶길! 서봉지맥의 맥을 잘못 짚는 바람에 하염없이 같은 구역을 맴돈 뒤였다.

무성산 오르는 산길은
부드러운 흙길에 뙤약볕
가려주는 솔숲 있어 고맙고

비파산과 자미산성 연결하는
서낭고개는 지금도 자연생태 살아 있어

테뫼식 석성인 자미산성
토루 떠받친 돌들
아산만방조제 공사 때 써버려
산성의 원형 망실됐다고

동네 앞산 쪽으로 올라가자 덩그러니 서 있는 소나무 한 그루. 거기서 셋은 쌓인 긴장을 풀며 마른 목을 축였다. 나중에 카메라를 열어보니 그 와중에 찍은 화사한 꽃들은 무슨 여유였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 눈빛은 밑에서 바라보던 산자락을 따라 곧장 치달을 태세였다. 거친 숲속에 자라난 맥문동 무리. 필자의 눈에는 키 작은 조릿대와 두루 퍼진 자생난의 중간쯤으로 보였다. 군데군데 걸어놓은 산성길 목각표지. 중요한 건 결정적일 때 헷갈리지 않도록 재배치하는 지혜가 아닐까. 물론 나 역시 그 당위에 동참할 의향이 있기에 드리는 고언이다. 눈앞에 나타난 선인장 재배지. 한 조각만 남아도 뿌리를 내린다니 과연 사막지대에 자랄 만하다. 바로 곁에 심은 늙은 호박 덩굴 밭을 가로지르다 보니 왠지 선인장과 잘 어울리는 양 느껴졌다. 그나저나 길가에 핀 참나리꽃은 볼수록 애틋하다. 개인적으로 유독 좋아하는 백합을 빼닮았거니와 그에 얽힌 일화를 간직하고 있어서다. 요컨대 나를 글쟁이로 만든 글감이었기에. 안타깝기는 목하 삼정대산을 오르면서도 용성리산성의 옛터는 아예 찾을 수 없었다는 점. 아무튼 서해로교회까지는 그런대로 순적했다. 오랜 세월 돌보지 않은 비각. 길잡이에 따르면 불과 며칠 전까지 잡풀이 우거졌다는데 아닌 게 아니라 부랴부랴 억새를 베낸 흔적이 뚜렷했다.

 차량통행이 뜸한 농촌길. 비파산(琵琶山) 초입에 있다는 약사사(藥師寺)로 가는 길목을 물을 때만 해도 이토록 개고생할 줄 어찌 알았으리. 맘껏 자란 마늘꽃을 신기한 듯 쳐다본 뒤 이리저리 오가며 섶길을 캐물었으나 알 리 만무. 한참을 서성이다 신비산업 마당을 거쳐 오솔길로 끼어들었다 빠져나오기를 거듭하며 몸도 맘도 지쳐갈 무렵 가까스로 설창마을에 접어들 수 있었다. 커다란 회화나무 세 그루가 동네 가운데서 짙은 그늘을 드리웠다. 시계를 보니 어느새 정오를 넘긴 시각. 아직 절반이나 남았다기에 막바로 무성산(武城山)에 오르기로 했다. 절터를 뒤로하고 향하는 산길. 부드러운 흙길에 뙤약볕을 가려주는 솔숲이 무척이나 고마웠다. 오르락내리락 숲길을 걸으며 평택에 이만한 덩치의 산줄기가 있다는 데 새삼 놀랐다. 비파산성에서 여우고개로 이어지는 자미산(玆美山)에는 임경업 장군의 설화가 전해진다는데 그의 오줌 줄기에 갈라졌다는 바위까지는 흘끔 봤으나 둘레가 십여 리나 된다는 자미산성은 솔직히 어딘 줄도 몰랐다. 능선을 따라 둥글게 둘러친 성지(城址)는 내성, 외성, 부성으로 이뤄졌으며, 석축은 평균 10~20m 정도 높이여서 적군이 쉽사리 접근하기 어려운 구조로 되어있다고 했다. 흥미로운 건 자미는 북두칠성을 의미하고, 지역민들은 재미산으로 부른다는 대목이었다.
울창한 참나무 숲속에 마냥 취해 있을 때 세 번째 고비가 일행을 기다렸다. 흔히들 시쳇말에 삼세번이라지만 함부로 이런 데 갖다 쓸 수는 없는 노릇. 산맥을 잘라먹은 포장도로를 놓고 성토하다가 그만 바로 옆 섶길을 놔둔 채 엉뚱한 데로 빠지는 통에 험난한 산악훈련을 자초한 꼴이 되었다. 난처한 쪽은 가이드를 자처한 분. 지친 기색이 역력한 아내를 달래 산중턱에서 기다린 끝에 이윽고 전갈이 왔다. 이리 뛰고 저리 달려 천신만고 끝에 찾아낸 길을 천천히 뒤따라 걷다가 샘물처럼 만난 자미쉼터가 아니었으면 지레 지쳐 나자빠졌을 수도 있을 만치 버거웠다. 그렇다면 충분히 쉬면서 기력을 회복하는 게 최우선. 일단 무성산 꼭짓점을 밟고 나서 거꾸로 우여곡절을 겪은 산성길을 차분히 되짚어보리라 맘먹었다. 비파산과 자미산성을 연결하는 서낭고개는 지금도 자연생태계가 얼마큼 살아있는 곳. 힘겹게 고갯마루를 넘나드는 나그네를 위해 여름철이면 남동풍이 불어 길손들의 땀방울을 식혀줬다면 무릇 고개고개란 지역과 지역민을 나눌뿐더러 상호연결하는 통로였던 터. 애석한 일은 자미산성은 테뫼식 석성이었는데 아산만방조제 공사를 하면서 무지막지 토루(土壘)를 떠받친 돌들을 죄다 파다 써버려 원형을 망실하고 말았다는 것. 떠올릴수록 두고두고 아쉬운 지점이 아닐 수 없다.
의외라 싶게 만난 자두나무 행렬. 길바닥에 떨어져 망가진 열매들이 즐비했다. 그 안쪽에 있는 ‘아츠밸리’는 실로 충격이었다. 번듯한 건축물이 형편없이 버려지다니 그 경위가 못내 궁금했다. 어서 오시라는 입구에 세워진 종합안내도를 보니 설명을 붙인 번호가 무려 55군데. 이제는 정말 막바지. 그러나 별 탈이 없겠지라는 기대는 또 한 번 시련을 맞을 뻔했다. 반사적으로 나부터 앞장서 금세 샛길을 찾아냈다. 산기슭을 막 벗어나자 전원주택단지. 어정쩡한 위치에 택지 자체가 난개발이어서 풍경화를 그리기 곤란했다. 소금뱃길과 산성길이 겹치는 길목. 논둑길을 따라 풀냄새를 맡으며 십여 분을 걸어오니 드디어 이번 섶길의 회귀점이었다. 다시금 아니 이따금 찾아오리라 다짐할 만치 유효한 무성산 둘레길을 발견한 게 큰 소득이었다.

조하식 수필가·시조시인
고등학교에서 국어와 문학을 
가르치며 수필집, 시조집, 
기행집 등을 펴냈다. 
퇴임 이후 기고 활동과 더불어 
교육철학 박사과정을 이어가고 있다. 
이충동에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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