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물관이 있는 도시-평택’을 꿈꾸며 마지막회

석연 양기훈- 매조도 10폭 병풍
화가 업신여기던 시절에도 당당했던 예술가

▲ 매조도(梅鳥圖) (123cm x 32.5cm) x 10폭, 신찬호 선생 소장품

고서화는 화폭에 담긴 예술이기도 하지만, 선조들의 정신을 살펴볼 수 있는 정신문화이기도 합니다. 선비들은 그림을 그리며 마음을 수양했고, 그리는 사람의 속마음을 담아 지인들에게 마음을 전했습니다. 그들은 그림을 그렸지만 시대를 읊은 시인들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선비들은 시를 그리고 그림을 쓴다고 했는지 모릅니다.

선비의 다른 이름은 ‘군자’요, 군자는 일반적으로 덕을 갖추고 인품이 높은 사람을 뜻합니다. 그들의 정신을 선비정신이라 하는데, 중국 북송시대 범중엄의‘악양루기(岳陽樓記)’에 이런 문구가 나옵니다. “천하의 근심은 누구보다 먼저 하고, 천하의 즐거움은 누구보다도 뒤에 한다.” 이 말은 선비는 지도자로서 자화자찬하지 말라, 자신의 일만 걱정하지 말고, 세상일에 대해서 누구보다 먼저 걱정하고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정신을 담고 있습니다. 어려운 일을 먼저 나서서 하는 지도자상이 선비에게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선비들이 즐겨 그린 것은 사군자였습니다.

사군자 가운데 눈 속에 피는 매화는 얼음장 같은 추위를 견디고 가장 먼저 피면서 그 향기가 일품으로 옛 선비들로부터 칭송을 받았습니다. 선비들은 매화를 포함하여 소나무와 대나무를 추운 겨울의 세 벗이라는 뜻의 세한삼우라 불렀고, 매화를 사군자 중 하나로 쳐서 지조 높은 선비의 정신으로 추앙했습니다.
한편, ‘설중매’라고 하는 유행가 가사 첫 구절은 “동짓달 기나긴 밤을 한 허리 베어놓고서 설한풍 은매화야 오는 봄 기다리느냐”라고 시작합니다. 유행가 가사에 매화가 나오는 것은 ‘매일생한 향수매(梅一生寒 香不賣)’라 하여, 아무리 춥고 배고파도 향기만은 팔지 않는다는 조선시대 여인의 절개를 비유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지조와 절개를 상징하는 매화 그림은 선비와 여인들의 사랑을 동시에 받았습니다. 오늘은 조선말 도화서 화원이었던 석연(石然) 양기훈(楊基薰)이 10폭 병풍에 담은 매화를 살펴보겠습니다.

국권 상실에 울분 토하며 은둔으로 생을 마감...
석연 양기훈은 조선 헌종 9년(1843년)에 태어나 평양에 주로 거주하며, 정6품 감찰 벼슬을 지내기도 했지만 사망연도가 불확실합니다. 다만, 1905년 11월 17일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을 빼앗겨 조선이 실질적인 국권을 상실했을 때, 조약거부와 파기를 상소하고 자결을 택했던 시종무관 민영환을 기리며, 민영환 본가의 대나무를 그린 ‘충정공 민영환 혈죽도’가 1906년 7월 4일자  대한매일신보에 실렸던 것으로 봐서 예순은 넘겼을 거라고 추정합니다. 그 후 석연의 흔적을 찾기 어려운 것은 어쩌면 국권 상실에 울분 토하며 은둔으로 생을 마감하였기 때문일 거라고 추정합니다.

고종 20년(1883년), 전권대신 민영익을 따라 미국에 다녀온 후, ‘미국풍속화첩’을 그린 특이한 이력을 갖고 있는 석연은 생전에 오원 장승업(1843~1897)이 서울 화단을 주도하던 때에 평양 화단을 이끌었습니다. 그런 이유인지 모르지만, 장승업과 동시대를 살았으면서도 대중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을 뿐 아니라, 제대로 된 평가도 받지 못해 왔습니다. 석연이 대중에게 그나마 조금씩 알려지게 된 것은 한중수교 이후 북한의 미술품들이 중국으로 흘러가고, 그 중 일부가 한국으로 들어오면서부터입니다. 그래서 진위 여부를 따져볼 여지가 있는 작품이 많습니다. ‘매조도 10폭 병풍’ 역시, 똑같은 작품이 ‘명지대학교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기 때문에 그 진위를 놓고 논란이 될 부분이 없지 않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석연의 작품은 매화의 고고함과 절개를 세밀하면서도 세련되게 표현하여 생동하는 기운을 느끼게 해 준다는 것입니다. 그 뿐만 아니라 한자를 몰랐던 것으로 알려진 장승업과 달리 한시에도 능해 작품에 뛰어난 화제(畵題)를 남겨 작품의 격이 남다릅니다.

세월 더할수록 빛나는 매조도 10폭 병풍 
석연이 남긴 병풍 그림은 그 특성상 대작입니다. 작품크기가 폭당 123cm x 32.5cm인 ‘매조도(梅鳥圖)’는 10폭 병풍으로 전체 너비가 3미터가 넘는데, 그림의 섬세함이나 그림 재질의 특이함만으로도 충분한 가치를 갖고 있습니다. 그림 재질이 특이하다 함은 굴, 조개 등의 껍질을 빻아 만든 흰색 안료를 소, 돼지, 토끼, 양과 같은 동물 가죽이나 뼈 등을 고아서 만든 아교와 섞어 만든 ‘호분’을 이용했기 때문입니다.
호분은 은은한 색을 내는데 유용한데, 재료 특성상 많은 경험과 오랜 노력을 통해 원숙한 색을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특별히 굴과 조개껍질에 포함된 인 성분은 도깨비불처럼 빛을 발하는 성질을 갖고 있습니다. 인은 공기 중에 자연 상태로 있으면 인광을 발하기 때문에 세월이 흘러도 색이 변하지 않고, 오히려 빛을 더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석연의 매조도 10폭 병풍은 100년이 넘는 세월 속에도 그 화려함을 잃지 않고 있습니다. 작품 속 수령 300년은 되었을 것 같은 밑동 굵은 매화는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줄기 곳곳에 썩어 도려낸 부위가 보입니다. 그 가운데 썩어죽은 것 같은 매화는 생명의 신비를 말하듯 잔가지에 꽃이 만발합니다. 그 모습을 보며 석연은 병풍 왼쪽 위에 조그맣게 시를 남겼습니다.

鐵幹氷心耐雪中 철간빙심내설중 
얼음장 같은 눈 속에 핀 매화(설중매)
貯香萬斛却愁風 저향만곡각수풍 
짙은 향 그윽하니 바람일까 근심일세
羅浮春色三梅夜 나부춘색삼매야 
세 그루 매화 핀 밤, 나부산 봄빛인가 하더니
聚羽飛來夢覺空 취우비래몽각공 
새떼 날아 와 꿈 깨니 헛되구나

석연은 화제 말미에 浿上漁人 石然(패상어인 석연)이라고 자신의 호를 남깁니다. 굳이 해석하자면 ‘조개 잡는 어부가 돌처럼 의연하다’는 뜻입니다. ‘패상어인’이라는 호는 어쩌면 숱하게 조개를 빻아 그림을 그렸던 석연 자신을 과장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표현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조선시대는 기본적으로 양반들이 화가를 업신여겼습니다. 충정공 민영환 혈죽도를 그린 사실은 알려진 반면, 사망연도가 드러나지 않는 것은 조선시대 ‘중인’이라는 사회적 신분이 갖는 한계를 잘 말해 줍니다. 그런 시절, 석연은 자신이 ‘화가’라는 것을 의도적으로 밝힐 정도로 예술가로서의 정체성이 강했다는 것을 호를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얼음장 같은 눈 속에 핀 매화 향이 어찌나 그윽한지 작가는 바람이 일어 그 향을 앗아가 버릴까 걱정합니다. 매화로 유명한 나부산 어느 날 밤, 고작 세 그루 매화에 꽃피었건만 그 향에 취해 벌써 봄인가 싶을 정도입니다. 그런데 겨울 철새인 기러기 떼가 날아들어 봄이 왔거니 했던 꿈이 깨지는 정황이 선에 선하게 그려지는 화제는 석연을 시인이라 불러도 좋을 듯싶습니다. 석연의 매조도 화제를 읽다 보면, ‘매화(梅)’를 읊었던 월암(月巖) 이광려(李匡呂·1720~1783)가 떠오릅니다.

滿戶影交脩竹枝 만호영교수죽지 
창문 가득 스며드는 대나무 긴 그림자 
夜分南閣月生時 야분남각월생시 
밤 깊어 남쪽 사랑엔 달 떠오르고
此身定與香全化 차신정여향전화 
이 몸 정녕 그 향에 흠뻑 젖었는가
嗅逼梅花寂不知 후핍매화적부지 
코를 갖다 대도 조금도 모르겠구나

대나무 그림자가 창문에 어른거리는 보름달 뜬 깊은 밤, 온 천지가 고요한 가운데 매화꽃이 눈에 들어오자 시인은 코를 갖다 댑니다. 그런데 향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습니다. 이미 몸 전체에 매화 향이 흠뻑 젖어, 매화가 시인이고, 시인이 매화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오랜 세월 베일에 가려졌던 ‘매조도 10폭 병풍’을 보며 춥고 지루한 겨울 같던 구한말, 조선에도 화려한 봄날이 다시 오길 기대했을지 모를 석연을 떠올려 봅니다.

▲ 신찬호 선생

고서화 수집가 신찬호 선생(신장동 거주)은 조선시대부터 근현대까지의 문화재급 고서화와 주요 인물들의 휘호 등 500여 수집품을 소장하고 있습니다. 본지는 박물관이 있는 도시 평택을 꿈꾸며 고기복 기자의 신찬호 선생 수집 고서화 둘러보기를 마치며,  그동안 관심있게 보아주신 독자분들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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