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물관이 있는 도시-평택’을 꿈꾸며 ⑦
개성 가득한 점 하나하나 모여 작품으로
예산 향토예술 선보인 우직한 서양화가 1세대

고서화 이야기를 쓰며 종종 떠올리는 한시가 있습니다. 정조 때의 문장가인 유한준(1732~1811)의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게 되면 보이나니, 그때 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라는 시입니다.
知則爲眞愛 지칙위진애
알면 참으로 사랑하게 되고
愛則爲眞看 애칙위진간
사랑하면 참으로 보게 되며
看則畜之而 간칙축지이
볼 줄 알게 되면 모으게 되니
非徒畜也 비도축야
그것은 한갓 쌓아두는 것과는 다르다
위 시를 좀 더 간단하게 말하면, “아는 만큼 보인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고서화 수집가 신찬호 선생은 자신이 경험한 사례를 들며, 고서화도 아는 만큼 보이는 것이니 “누가 알아주지 않더라도 우리 문화는 우리 스스로 알려고 하는 노력이 필요하지 않겠느냐”고 말합니다.
“1990년대 초에 석재 서병오 선생의 글씨를 구입할 때 작품 상태에 대해 들었던 얘기예요. 한국전쟁 당시 선생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던 사람이 대구에서 부산으로 피난가면서 마당에 장독을 묻고 그 속에 선생의 작품을 넣었다고 해요. 그런데 피난 갔다 와서도 2년이 지나도록 깜빡 잊고 있었대. 어느 날 부랴부랴 땅을 파보니, 종이가 전부 상했더라는 거야. 작품을 보면 알겠지만 종이에 검게 곰팡이가 피었던 것을 알 수 있잖아. 그래도 글씨가 상하지 않았던 게 천만다행이지.”
신찬호 선생은 “석재 선생의 작품을 소장했던 사람이 그 작품의 가치를 제대로 알고 있었다면 피난 갈 때 싸들고 가지 않았겠어요? 장독에 넣어 숨겼다고 해도, 2년씩이나 잊었겠어요? 그 귀한 걸...” 누군가에게는 그저 그런 작품이, ‘작품을 제대로 알면’ 위대한 예술품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새삼 알게 됩니다. 가격으로 매겼을 때 화폐 가치가 얼마가 될지는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작품 속에 담겨진 작가의 정신, 예술세계를 조금이나마 살필 수 있다면 그 기쁨을 어찌 돈으로 환산하겠습니까? 오늘은 우직한 예술가, 한국 야수파의 거장으로 일컬어지는 설봉 김두환 화백 이야기입니다.
예순여덟에 유학길 올랐던 거장
미술평론가들은 설봉 김두환(1913~1994)을 그림을 통해 깊은 한국적 정서를 표현해온 거장으로 평합니다. 그를 ‘한국 야수파의 거두’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한국화단에서 서양화가 1세대로 꼽히는 그를 아는 이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결국 김두환은 저평가 우량주 작가인 셈입니다. 김두환은 충남 삽교읍에서 태어나 ‘예산갑부’라고 불릴 정도로 부유했던 집안에서 자랐습니다. 경성 양정중·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1932년 일본으로 유학하여 동경제국미술학교에 입학해 이과전, 독립전에 입선하는 등 일찍이 여러 대회에서 작품성을 인정받았습니다. 일본 유학시절, 기교보다는 개성과 독창성을 통해 일정한 틀에 얽매이지 않은 실험적 방식을 추구했던 그의 노력은 한 화폭에 야수파, 입체파, 후기 인상주의적 경향을 모두 담아내고 있다는 평을 받고 있습니다.
대학 졸업 뒤에는 한국으로 돌아와 예산농업학교를 시작으로 여러 학교에서 미술교사로 후학을 양성하며 왕성한 작품 활동을 펼쳤습니다. 한국전쟁 중에 종군화가로서 복무하기도 했던 그는 예순여덟이던 1980년에 또다시 파리 국립미술대학교로 유학을 떠날 정도로 영원한 청년 작가였습니다. 프랑스 유학 후 고향으로 돌아온 김두환은 미술연구회를 열고 고암 이응노, 나혜석 등 당대의 대표작가들과 교류를 하며 1994년 82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열정을 꽃피웠습니다.
김두환은 작품 활동 시기에 따라 소재와 기법이 다양하여 감상하는 재미를 줍니다. 점묘법으로 독특한 풍경화를 그리기 시작한 그는 여행의 감흥을 수채화로 표현했고, 60년대에는 전통문화재와 불교를 소재로 한 작품을 선보였습니다. 평생에 걸쳐 자신의 정체성을 찾고자 수백 점의 자화상을 그렸고, 80년대에는 파리 유학시절의 감흥을 담은 수채화까지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었습니다. 한평생 끊임없는 실험정신으로 자신만의 독특한 세계를 구축했던 그는 50, 60년대 한국의 풍경과 사람들을 서정적으로 담아낸 대표화가로 자리매김했습니다. 그래서 미술평론가들은 김두환에 대해 이렇게 평합니다.
“그림을 통해 깊은 한국적 정서를 표현해온 거장이다. 한국적 정서를 바탕으로 한 향토적 서정, 민속적 색조를 통해 ‘향토예술’을 선보여 왔다. 우리민족 고유한 심성에 내재돼 있는 본질적인 것을 발현시킨 한국 대표 작가다.”
우주의 중심에 선
은행나무가 말하는 조화
김두환의 여러 작품 중 1977년작 은행나무(가을)는 대표작으로 꼽힙니다. 그런데 신찬호 선생이 소장하고 있는 작품은 잘 알려진 ‘은행나무(가을)’보다 17년이나 앞서 제작되었습니다. 작품명도 ‘은행나무’로 흡사 같은 작품을 보는듯한 착각에 빠져들게 합니다. 캔버스에 유화로 그린 60년도 작품은 중심에 있는 은행나무와 색동저고리를 입은 소녀를 비롯한 등장인물의 모습까지 77년도 작품에 다시 살아납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색의 농도 정도라고 할까요? 77년 작품은 완연한 가을임을 보여주지만, 1960년도 작품은 푸른빛이 조금 더 들어간 것으로 보아 초가을에 그린 것으로 보입니다.
‘은행나무’는 중심에 은행나무를 놓고, 색동저고리를 입은 소녀와 아낙을 나무 좌우로 배치한 그림입니다. 주제인 은행나무는 웅장한 느낌을 주는 반면, 나머지는 과감하게 생략하면서도 여백을 두지 않는 꽉 찬 구도가 오히려 단순하면서도 편안한 느낌을 줍니다.
그림을 보면 마치 한 땀 한 땀 바느질하듯 점을 찍어 완성하고 있어 호기심이 발동합니다. “점이 어떻게 그림이 되지?, 대체 몇 개의 점을 찍어 그렸지?” 헤아리기 힘들 정도로 많은 점을 찍어 작품을 완성한 사람은 자신의 인내심을 시험했을지 모릅니다. 창작이라는 고통에 막노동 수준의 일품을 들였을 작가의 우직함이 느껴집니다. 스스로의 한계를 점검하지 않았나 싶을 정도로, 화가가 들인 시간과 노력, 힘도 느껴집니다. 찬찬히 헤아려 보다보니 살짝 어지럽습니다. 그림 앞에서 점 하나하나를 뜯어보기를 포기하고 거리를 두고 지긋하게 그림을 쳐다봅니다. 각각의 점들이 그저 그런, 한 점 덜어내도 티도 나지 않을 것 같은 나뭇잎인가 했더니, 어느 것 하나 들어낼 점이 없습니다. 거칠지만 화려한 색감의 개성 강한 점들이 신비롭게 서로 조화를 이루며 큰 나무 모양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꾹꾹’누른 듯, ‘툭툭’쳐낸 듯, ‘슬쩍슬쩍’ 스쳐지나간 듯, 촘촘히 찍어놓은 ‘점’들은 어딘가 구속됨 없이 자유롭게 저마다 색을 자랑하면서도 잘 어울립니다. 음악으로 치면, 음색이 다르고, 음높이도 다른 부분들이 하모니를 이뤄 합창을 하는 것과 같은 이치라고 할까요? 서로 섞이며 어느 것 하나 튀지 않고,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은 작품은 은행나무를 마치 우주의 중심에 둔 듯합니다. 그렇게 우주 중심에 선 은행나무는 ‘다양성 속의 조화’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고서화 수집가 신찬호 선생(신장동 거주)은 조선시대부터 근현대까지의 문화재급 고서화와 주요 인물들의 휘호 등 500여 수집품을 소장하고 있습니다. 본지는 박물관이 있는 도시 평택을 꿈꾸며 고기복 기자의 신찬호 선생 수집 고서화 둘러보기를 연재하고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