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물관이 있는 도시-평택’을 꿈꾸며 ⑤

전통 화풍 계승한 ‘미술계의 이광수’
청년 시절 민족의식과 동아일보‘일장기 말살 사건’
‘예술도 군수품’이라던 일제에 ‘나팔수’로 동조

▲ 청전(靑田) 이상범(李象範) 만추(晩秋) 산수화(크기 30 x 43cm) 신찬호 소장품

“고서화 수집 초창기 땐 좋은 작품이 있다 하면 어떻게든 구해 보려고 했지. 그렇다고 경제적 여력이 있던 건 아니라 조금 싼 곳을 찾다가 실수도 많이 했어요. 두 번이나 위작에 속고 나서야 고서화는 ‘사람’ 보고 구입해야 한다는 걸 깨달았어. 다행히 인사동에서 수집가들 사이에서 오랫동안 신뢰를 쌓아왔던 화랑 주인과 인연이 닿아 청전 작품을 구하게 됐지.”
잘 짜인 구도에 낯익은 풍경으로 청전 이상범(1897∼1972)이 최고 경지에 올랐던 말년 작품으로 추정하는 산수화 ‘만추(晩秋)’에 대해 고서화 수집가 신찬호 선생이 하는 말입니다. 선생은 작품을 구입할 때 화랑 주인이 “크기는 작지만, 짜임새로 보면 청전 작품에서 보여줄 수 있는 건 다 보여주고 있다”며 최고의 작품성을 자랑한다고 치켜세우던 모습이 생생하다고 합니다. 그런 까닭일까요? 산수화 만추는 작품을 구입했던 80년대 말부터 지금까지 선생이 애지중지하는 수집 고서화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 작품 속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청전은 작품에 이름 붙이기를 즐겨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작품에 이름이 따로 있는 건 아닙니다. 언제 그렸는지도 정확하지 않습니다. 그래도 매몰차게 부는 바람에 상수리 나뭇잎이 바스락거리며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 같은 스산함과 쓸쓸함이 고스란히 드러나기에 늦가을, ‘만추’라고 불러 봅니다.

늦가을 풍경에 철철 넘치는
시냇물이 안기는 부조화

청전의 작품은 일반인이 보기에 대체로 익숙합니다. 아주 낯익습니다. 그런데 어딘지 모르게 현실과 거리가 있어 보입니다. 왜 그런 느낌이 드는 걸까요? 작품에 먼저 집중해 보겠습니다.
곧 쓰러질 것 같은 두어 채의 초가집이 작품 중심에 있지만 도드라지지 않습니다. 앙상한 상수리나무와 잡목, 누런 들풀이 초가집의 누추함을 가려주기 때문입니다. 가을바람은 곧 겨울을 가져올 거라고 말하는 듯 나뭇잎을 마구 흔들어 놓으며 촌부의 발걸음을 재촉합니다. 발채 한가득 무엇을 담았는지 모르지만, 나무지게를 진 촌부는 그 무게에 등을 반쯤 구부렸네요. 그래도 내딛는 걸음걸이가 예사롭지 않습니다. 누추하지만 따뜻하게 맞아줄 가족이 있는 집으로 주춤서기 보폭보다 더 크게 내딛은 걸음은 촌부의 급한 마음이 그대로 드러납니다. 평생 땀 흘려 일해 온 촌부는 가을걷이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인가 봅니다. 이러한 늦가을 풍경이 주는 인상은 작가가 살았던 일제 치하의 어두운 사회상을 닮았습니다. 가을걷이를 끝낸 시골의 넉넉함보다 한없이 덧없고 쓸쓸함이 느껴지는 이유입니다.
여기까지는 청전이 즐겨 그렸던 산수화의 전형적인 구도입니다. 묽고 연한 빛깔의 수묵으로, 강조할 곳은 진하고 강한 필치로, 배경은 안개를 통해 몽롱함을 자아내려는 듯 엷고 흐리게 칠해 청전의 장점을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정겹기도 하고, 낯설기도 합니다.

정겹다고 하는 것은 한국인의 근원적 향수와 정감을 자극하는 시골풍경 때문입니다. 그래서 청전의 그림은 사람의 마음과 눈을 사로잡습니다. 낯설다고 함은 몽롱한 분위기와 현실적이지 않은 시냇물이 주는 부조화 때문입니다. 작품 속 안개는 초가집 뒤 멀리서부터 자욱하게 산자락을 타고 내려와 나뭇가지가지에 은근슬쩍 걸려 있습니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안개가 낀 줄도 모를 정도로 연하게 깔린 안개는 꿈을 꾸듯 편안하게 작품에 녹아 있습니다. 전혀 어색하지 않습니다. 반면 오른쪽으로 비스듬히 흘러가는 시냇물은 시골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낯익은 풍경인데도 어색합니다. 왜냐고요? 시냇물이 힘이 넘쳐도 너무 넘치기 때문입니다. 늦가을은 갈수기입니다. 촌부가 지게에 얹은 발채 가득 뭔가를 담고 있다는 것은 볕 좋은 날씨가 며칠씩 계속됐다는 것을 뜻합니다. 한바탕 폭우가 쏟아진 후라면 모를까, 늦가을 시냇물이라고 하기엔 어색하다고 하는 이유입니다. 결국 삭막한 늦가을 풍경과 철철 생기 넘치는 시냇물이 안기는 부조화는 작가의 관념에서 나온 것이지, 현실이 아닐 수 있습니다.

사실 청전은 어린 시절 떠난 고향을 늘 그리워하며 그림을 그렸지만, 어떤 이유에서인지 죽을 때까지 자신의 고향 충남 공주의 벽촌 마을을 다시 찾지 않았다고 합니다. 어찌됐든 청전은 평생을 고향산골 마을과 외딴 집, 궁핍하지만 자연과 조화를 이뤄 살아가는 착한 농부의 삶을 상상하며 마음을 달랬습니다. 궁핍한 현실을 시냇물이 흐르는 산골의 향토색 짙은 자연이 주는 아름다움으로 덮음으로써 소망 가득한 이상세계를 그린 것이죠.
청전을 두고 한국인 고유의 심성을 대변하는 보편적 서정 세계를 특유의 수묵화법으로 독창적인 예술세계를 이뤘다는 평을 하기도 합니다. 이제 지금 삶은 괴롭지만 희망 가득한 세상을 꿈꾸며 현실과 괴리된 이상향을 그렸던 청전 이상범이라는 인물이 궁금해집니다.

조선미술전람회 10회 연속 특선한
미술계의 춘원
향토성 강한 민족 회화
일장기 말살 사건과 그 이후

청전이상범(靑田 李象範, 1897~1972)은 근대 한국화를 빛낸 화가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대표적인 한국 근대 미술가를 뽑을 때면 항상 첫 손가락에 꼽히는 그는 30대 후반에 이미 ‘미술계의 춘원 이광수’라는 평을 들었을 정도로 명성이 높았다고 합니다.
충남 공주에서 가난한 무반의 아들로 때어나 홀어머니 밑에서 자란 그는 1915년 서화미술원(書畵美術院)에서 미술을 공부했습니다. 안중식(安中植,1861~1919), 조석진(趙錫晋,1853∼1920)에게 배우고, 1918년 서화미술원을 졸업한 이후 조선미술전람회에서 10회 연속 특선을 차지할 만큼 실력을 인정받았습니다.

조선미전 명물 중의 명물이었던 청전을 굳이 춘원 이광수와 비교하는 이유는 뭘까요? 한국 근대 문학사 최초의 장편소설인 ‘무정’ 등 많은 작품을 쓴 춘원은 당대 ‘만인의 연인’이란 소리를 들었을 정도로 최고 인기 작가였습니다. 그는 1919년 도쿄(東京)의 조선인 유학생 2·8 독립 선언서를 기초하였고, 3·1 운동 이후 상하이 임시정부에 참가하고 독립신문을 발행하는 등 독립운동에 적극 참여했습니다. 그러나 도산 안창호가 교육·계몽·사회운동 목적으로 설립한 ‘흥사단’의 전위조직인 수양동우회 회원들을 일제가 체포하면서 춘원은 친일로 돌아섭니다. 6개월간 옥중 생활을 한 후, “나는 천황의 신민, 내 자손도 천황의 신민으로 살 것이다”라며 창씨개명을 하고, 각종 언론매체에 조선 청년들을 태평양전쟁에 동참하도록 선동하는 등 대표적 친일파로 변절합니다. 이처럼 춘원은 문학적 천재성과 그 영향력에 대해선 그 누구도 시비 걸 수 없을 만큼 독보적 위치에 있었으나, 친일행위로 민족의 가슴에 대못을 박았습니다.

미술계의 춘원이란 평을 얻었던 청전은 젊은 날, 향토성 짙은 민족 회화를 통해 민족의식을 드러냈습니다. 그의 민족의식은 스승 심전 안중식이 1919년 3ㆍ1운동에 연루되어 세상을 떠났고, 민족지임을 내세우던 동아일보에 초창기 삽화 기자로 재직했던 경험이 영향을 끼쳤을 것입니다. 청전은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때 마라톤 우승자 손기정 선수 사진에서 일장기를 처음 삭제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일장기 말살 사건’으로 40여 일 동안 구치소에 수감되어 고초를 겪은 그는 결국 동아일보를 사직하였고, 동아일보도 1년 동안 폐간 당합니다.
그러나 직장을 잃은 청전은 이후, 을사오적 수괴였던 이완용(李完用)이 회장으로 있던 경성서화미술회와 총독부가 주관한 ‘선전’에 적극 가담하는 관전화가가 되어 친일로 돌아섭니다. 일제는 ‘예술도 군수품’이라는 전시 문화 정책을 펴며 1941년에 ‘조선미술가협회’를 만들었는데, 그곳에서 청전은 일본화부 평의원으로 발탁되어, 황국신민화와 군국주의하는 전시체제의 부품 역할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청전은 일제의 표현을 빌리면 ‘대동아공영의 성전(聖戰)’에 국방 헌금 마련을 위한 ‘조선남화연맹전(1940년)’, ‘애국백인일수(愛國百人一首) 전람회’와 ‘일만화(日滿華) 연합 남종화전람회(1943년)’ 등에 빼놓지 않고 출품함으로써 일제에 동조하였습니다. 화단 중진으로 영향력이 컸던 만큼 청전의 친일 활동도 주목받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런저런 공적으로 그는 주요한과 함께 제5회(1944년) ‘조선예술상’을 수상합니다. 이 상은 친일파 문인과 화가들의 사기 진작을 위해 1940년 ‘모던 일본’사가 제정한 것입니다. 또한, 일제가 조선인 징병제를 실시한 1943년 일장기 아래에서 기상나팔을 부는 병사의 뒷모습을 담은 ‘나팔수’를 매일신보에 기고하여 조선인 징병을 부추기기도 했습니다. 이런 선전 활동은 친일을 넘어 일제의 반인륜 살육행위에 동조한 행위였습니다.

박목월이 반한 한국 산수화의
새로운 전범(典範), 청전양식

청전 이상범은 조선미전에서 특선을 연 10회나 할 정도로 대 기록을 세웠지만, 해방 이후에는 거꾸로 총독부 주관 ‘선전’에서 활동한 친일 경력으로 비난받았습니다. 그러나 미군정과 남북분단 상황은 그에게 다시 활동할 수 있는 공간을 열어줬습니다. 미군정 아래에서 해방 후 전국 규모로 개최된 첫 종합미술전(1947년)에 동양화부 심사위원으로 뽑힌 이후, 피난 시절에는 대구 미국공보원에서 개인전(1952년)을 갖기도 할 정도로 심전은 미군정과 돈독한 관계를 자랑했습니다.

그는 1950년 시작된 홍익대의 동양화 실기 교수로 채용되었고, 1954년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으로 피선되고 예술원 공로상, 문화훈장, 3·1문화상, 서울시문화상 등을 두루 받았습니다. 그래서 청전은 해방 이후 동양화 6대 대가 중 최고 화가로 꼽히고 있습니다.
청전이 산수화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10대 후반 그림 입문 초기 서화미술회 강습소에서 스승인 심전(心田) 안중식을 만나면서부터라고 합니다. 그의 호 청전(靑田)도 '청년 심전'이란 뜻입니다. 하지만 고전적 규범을 답습했던 스승과는 달리 청전은 동서미술의 융합을 통해 기존의 정형화된 산수화법을 현대화시키려는데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특히 서양화의 원근법이나 음영법을 동양의 전통회화 기법에 과감히 접목해 특유의 조형기법인 ‘청전양식’으로 불리는 독창적인 화풍은 우리 근대 미술의 자부심을 살려줬다는 평을 받습니다. 우리의 자연과 고향에 대한 민족 공통의 정서와 미의식을 자극하는 한국적 풍경을 수묵담채로 담아냈기 때문입니다.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고향산천을 예술이라는 공간으로 끌어오되, 구름과 안개를 이용한 몽환적인 분위기를 즐겼던 청전은 수난의 시대에 민족 현실을 외면했다는 평과 함께 천편일률적인 작품으로 일관했다는 비난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의 예술적 성과에도 불구하고 친일행위라는 오점은 국권회복이라는 ‘시대정신’을 외면했던 우리 근현대미술사의 아픔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가운데 청전의 작품을 보고 영감을 얻은 시인도 없지 않았습니다.

청록파 시인 박목월의 시가 그 바탕에 향토적인 정경을 담고 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습니다. 박목월은 청전의 산수화를 보고 심취하여 그 감흥을 ‘산도화3’(1955년)에서 이렇게 고백한 바 있습니다.

▲ 청전(靑田) 이상범(李象範) 작 산도화
▲ 신찬호 선생

박목월의 시는 잘 알려진 ‘나그네’에서도 그렇지만, 언제나 잘 정돈된 한 폭의 동양화를 연상하게 하는 간결한 언어로 자연과 인간의 조화를 그려내어 우리 문단의 자랑이 되었습니다. 그런 시인에게 영감을 줄 수 있는 화가는 이 땅에 그리 많지 않을 것입니다. ‘나그네’를 읊으며 다시 만추를 그윽한 눈으로 감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요즘 살림살이가 팍팍하다고들 합니다. 고단한 인생살이도 결국은 마음먹기에 달려있다는 것을 작품 속에서 느끼실 수 있다면 시인의 감성을 부러워하지 않으셔도 될 것 같습니다.

나그네                - 박목월

강나루 건너서
밀밭 길을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길은 외줄기
남도 삼 백리

술 익는 마을 마다
타는 저녁 놀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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