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년째 딸의 사진이 있는 포스터를 차에 부착시켜 보는이로 하여금 가슴을 아프게 하고있다.
생사 알길 없는 내 딸 혜희

1999년에 잃어버린 딸 송혜희(예명:은희·당시 만17세)양을 찾아다니는 아버지 송길용(51·장안동 103번지)씨의 눈물은 마를 날이 없다.

딸을 잃어버린지 어언 5년이 되어가고 있어 이젠 눈물이 마를대로 말라 더 나올 눈물도 없을 것 같았지만 기자와 인터뷰하는 3시간 동안 내내 눈물을 감추지 못한다.

어이없이 잃어버린 딸.

1999년 2월 13일 오후 5시 30분 평택 동일동 하리부락 자택에서 친구를 만나러 나갔는데 친구와 헤어진 후 서정리에서 마지막 버스를 타고 귀가한 딸(당시 시내버스 기사가 확인)이 도일동 하리입구에서 집으로 걸어 돌아오는 사이 행방불명이 된 것이다.

도저히 믿기지 않는 현실에 혜희양의 아버지, 어머니의 마음은 하늘이 무너진 것 보다 더했다.

말 그대로 찢어지게 가난했던 생활이 둘째 딸 혜희를 얻고부터 이상하리만큼 풀리기 시작했다.

식당, 채소가게 등 하는 일도 잘 됐을 뿐더러 돈도 모이기 시작했다. 그래서 집안에 복덩이가 태어났다고 할 만치 애지중지했다.

학교생활에서는 문제를 보이지 않았고 중·고등학교를 장학금을 받고 다닐만큼 상위 클라스를 유지했다.

부모 말을 거역할 줄도 모르는 딸을 하루아침에 잃고 나니 집안이 풍비박산이 나기 시작했다.

생업을 돌볼 겨를도 없이 찾아나서야 했던 딸. 4년 동안 발에서 피가 나고 입술이 터져 나을 짬 없을 정도로 전국을 돌아다녔지만 딸의 행적은 흔적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딸을 찾기 위해 몰고 다니는 작은 트럭에는 딸의 사진으로 도배가 되어있다.

시내버스에도 찾는 광고를 냈고 수원 경찰청에는 3번이나 딸을 찾아달라는 호소문을 냈다. 뿌린 전단만도 25만여장. 뿌리는 전단을 받아 든 사람이 그 자리에서 꾸겨 내던지기라도 하면 아버지 송길용씨 부부는 한 장이 아까워 다시 주워 펴 또 돌리곤 했다.

가출은 의심하지 않으시냐는 질문에 “우리 딸은 절대로 부모를 배신할 성품을 가진 녀석이 아니었습니다.

만약에 그랬다면 시내버스를 타고 집까지 돌아왔겠습니까. 분명 누군가에게 납치된 것으로 봅니다.

생사를 확인하지 못하는 것이 가장 가슴이 아픔니다.”라고 전하는 송길용씨는 딸아이와 비슷한 시체가 들어왔으니 와서 확인하라는 경찰서의 연락을 받았을 때 차라리 내 딸이었으면 하는 심정으로 갔단다.

생사를 알 수 없는 고통, 어디에 있는지 확인 할 수 없는 뼈속 깊이 서린 아픔, 이것은 사람을 살 수 없도록까지 만드는 크나큰 재앙이었기 때문이다.


"그날 내가 옆에만 있었어도......”

술을 먹지 않고는 견디기 힘든 하루하루.

송길용씨 부부는 하루종일 딸을 찾아 헤메이느라 몸이 피곤도 하여 밤에 그냥 쓰러질 만도 한데 도저히 잠을 이루지 못했다.

어린것이 어디서 죽었는지, 살았는지, 살았는데 이렇게 소식이 없다면 갖혀서 무서운 공포에 떨고 있는 것은 아닌지, 혹은 자신을 찾지 못하는 부모를 원망하는 것은 아닌지.

별별 생각이 머리를 때리고 가슴을 쳐대니 부인과 송씨는 제대로 잠을 자기도, 먹기도 힘들었다.

그러던 어느순간부터 송씨 부인이 입에도 못대던 술을 마셨다.

피곤한데도 잠까지 이룰 수 없으니 견디기 힘든 하루하루였다.

술기운에 자려고 마시던 술. 그렇게 되다보니 부인의 술 섭취량이 점점 많아졌고 술이 없이는 견딜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렇다.

그러다 미어지는 가슴을 부여안다 어떻게 하지 못한 부인이 우울증에 걸린 것을 뒤늦게 알았다.

올해 봄에 송씨 친구 아들 결혼식에 갔다 온 부인. 그 날을 기억하면서 송씨는 다시 피울음을 흘린다.

“그날 내가 옆에만 있었어도......” 말을 잊지 못하는 송씨는 겨우 그날 상황을 이야기한다.

먹고살아야 하니 결혼식장에서 돌아온 송씨는 부인을 집에 데려다 준 후 일을 보러 나갔다.

장안동에 위치한 개사육장에 나와야 될 시간이 됐는데도 오지 않는 부인. 한번 가봐야겠다고 생각한 송씨는 처음엔 집에 부인이 없어 인근 누구네 갔나보다 했고 다시 나가 일을 마친 후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부인은 싸늘한 시체로 변해 있었고 영원히 돌아오지 못할 길을 떠난 것이다.

끔찍이도 사랑했던 둘째 딸을 4년 넘게 찾지 못해 모든 것을 황망해 하고 허무함을 견디기 힘들어했었다는 송씨 부인이 술 한 병과 농약을 함께 입에 털어 넣고 만 것이다.

그렇게 허무하게 보내고 나니 빈자리의 허전함이 얼마 전 결혼한 큰딸 결혼식에서 더욱 크게 느껴지며 “있을 때 좀더 잘해 줄껄”하는 생각이 회한으로 남는다고 한다.


"혜희’는 내가 사는 삶의 끈

기울대로 기운 가산. 송길용씨는 포스터가 붙어 있는 작은 트럭에서 손을 떼지 못한다.

금방 “아빠”하고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딸이 뛰어들어올 것만 같다. 문소리만 들려도, 개가 짖어도, 전화벨 소리가 울려도 혹시나 혹시나 하는 것이 생활화되어 버렸다.

송씨는 장안동에서 개사육을 하고 있다.

한 때 1천여 마리를 사육할 때에 비하면 ‘세발에 피’만큼도 안 되는 마리 수지만 자신의 생활을 해야하기 때문에 식당에서 음식물 찌꺼기를 나른다.

문뜩문뜩 하늘 나라에 가 있을 부인을 따라가고 싶은 생각도 했다고 한다. 삶이 너무 고통이고 희망이 없다고 보니 자주 밀려오는 생각이다. 오히려 그게 더 났다며..... .

그러나 그래도 그럴 수 없는 이유가 혜희를 찾아야 사람도리도 하고 아버지의 역할도 하는 것이라 봤다.

혜희를 찾을 수 있다는 한 가닥 희망이 자신이 잡고 있는 삶의 끈이 되고 있는 것을 깨달았다.

“꼭 찾아야지요. 살아만 있다면 어디서 뭔 일을 하든지 그게 무슨 상관이겠습니다. 아무 상관 없습니다.

생사만 확인되면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을 정도입니다”라고 말하는 송씨는 기자에게 혜희의 어릴 적 사진과 즐거웠던 지난날의 가족 사진을 보여주며 혜희가 지금은 어떻게 변했을까 알아보지 못하면 어쩌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 혜희의 모습을 더듬고 있었다.

진한 고통의 눈물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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