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르신에게 듣는다 ④
언론인 출신 원칙주의자로 평택항 발전 위해 남은 인생 헌신
“
당시는 고무신과 막걸리 주고
선거운동하는 것이 다반사였으니까,
돈봉투 돌렸다고 문제가 되지도 않았어.
하지만 내가 목격한 사건은 경찰서장이
여당 후보의 선거운동에
직접 개입한 것이 문제였어.
결국 이윤용은 관권선거를 통해
국회의원에 당선됐고 유치송은 떨어졌지
”

언론인 출신으로 대쪽 같이 꼿꼿한 성격에 불의라고 판단되면 전혀 타협할 줄 모르는 원칙주의자. 유천형(78) 전 평택항발전협의회 회장이 이런 유형에 속하는 사람이다. 이제 팔순을 바라보는 나이에 육체는 쇠약한 노인의 모습이었지만 여전히 평택의 양심으로서 당당한 기백이 느껴졌다.
□당진과 충청도에 빼앗기기만 하고…
23일 오전 평택시내의 한 찻집에서 마주한 그에게 기자는 평택항과 관련한 질문부터 던졌다.
“평택항발전협의회는 2000년도에 민간 주도로 만들었어. 그 전에 나는 평택항독립노조투쟁위원장을 했어. 1998년부터 2년 동안 위원장을 맡아 싸웠는데, 그런 이유로 평택항발전협의회가 창립되면서 초대회장으로 추대를 받았지. 그 후 2012년까지 12년간 회장을 했어.”
그만큼 회원들로부터 인정을 받으셨기 때문에 장기집권을 하신 것 같은데 업적이 있다면.
“해양수산부에서 평택항을 평택당진항으로 이름을 고치겠다고 해서 싸웠지. 당진과 충남의 정치적인 입김이 세서 성공하지는 못했어. 해수부가 지금도 평택당진항이라는 이름을 쓰고 있지만 언론에서는 평택항으로 불려지고 있지. 평택에서는 정치인들이 악착같이 싸우려고 하지 않아 평택항의 이름을 지키지 못한 것이 아쉬워. 평택항발전협의회는 서울의 해수부에 두 번이나 가서 데모를 하고 고속도로 점유 시위도 했지. 나는 경찰에 입건돼 200만 원의 벌금을 물어냈어. 그 밖에 평택해양경찰서를 신설한 것과 출장소였던 세관을 정식 평택세관으로 승격시킨 것 등이 우리가 싸워서 얻은 소득이라고 할 수 있지.”
그는 또 다시 아쉽다는 말을 되풀이했다.
“평택과 당진의 경계지점에 300만 평의 평택항 땅을 되찾지 못한 것도 아쉬워. 자동적으로 우리한테 넘어올 것으로 보이지만 당시 우리 지역 국회의원들이 적극적으로 대처했었더라면 좋았을 걸. 충청도에서는 악착같이 덤벼드는데…. 당진은 김아무개 국회의원이 해수부를 담당하는 상임위원회에 있으면서 활약을 많이 했어. 그러나 우리 쪽 정치인들은 가만히 내버려 두자며 양보하는 태도였지.”
고향 평택을 위해 칠십 노인이 된 후에도 몸을 아끼지 않고 두 번이나 상경시위를 주도했던 전력만 봐도 평택항발전협의회장 12년 장기집권의 비결을 알 수 있었다. 1936년 평택시에서 태어나 서울공고와 홍익대 신문학과를 졸업하고 1960년부터 한국일보 기자로 사회에 첫 발을 딛은 그는 1991년 봄 지방자치제도의 부활로 치러진 제3대 경기도의원선거에 나가 당선될 때까지 31년간 언론인으로서 외길을 걸었다. 80년 신군부가 정권을 강탈한 후에는 반정부 성향의 언론인으로 분류돼 강제해직됐으나 3년 후 복직되는 우여곡절도 겪었다. 도의원은 무소속으로 나가 3~4대까지 하고 물러난 뒤 더 이상 정치에 미련을 갖지 않았다.
□대학시절 배운 ‘정도(正道)’ 평생 좌우명
“경기도의회에서 의정활동을 하는 동안 평택항 독립노조를 빼앗아 오는 일에 내가 앞장섰더니 항운노조원들이 나를 의지하더군. 당시만 해도 평택항운노조가 인천항운노조에 소속된 지부였지. 1998년 의정활동을 마치고 나서도 나한테 독립노조투쟁위원장을 맡겨줘서 2년간 투쟁해 결국 평택항운노조를 독립시켰어.”
4대 도의원시절 항운노조를 대변한 것이 인연이 되어 그는 평택항과 마지막 후반부 인생을 함께 하는 운명이 됐고, 지난 22일에 열렸던 2·3대 평택항발전협의회 공동대표 이·취임식에도 노구를 이끌고 참석해 후배들에게 큰 힘을 실어줬다.
“평택항이 국내에서 자동차 선적규모 1위, 총 물류 규모 4위라고 하지만 국제여객 터미널이 가건물로 5~10년 전부터 확장한다고 했는데 아직 진행되지 않고 있어. 평택항 개발을 위해 10여 년 전부터 황해경제자유구역과 한중테크노밸리를 한다고 했지만 지지부진하니 해외 관광객들이 와도 먹고 자고 볼 게 없어서 서울이나 온양, 수원으로 다 빠져나가 버려. 평택시와 경기도 정치인들이 협력해야 하는데….”
그는 또 다시 지역 정치인들을 탓하며 평택항이 침체기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현실을 안타까워했다.
“나는 대학생 시절 ‘신문기자는 정도(正道)를 걸어야 한다’고 배웠어. 그래서 정도를 찾다보니 타협할 줄 몰라. 신문기자 하면서 밤낮 원칙만 갖고 따지다보니 딱딱한 사람이 돼 버렸어. 지금도 길을 걸어오면서 ‘왜 좌우통행을 안하나?’ ‘왜 깜박이를 안 켜나?’ 했는데, 자꾸 그런 것이 눈에 보여. 30여 년 언론인 생활하면서 몸에 밴 버릇이지. 기자 출신의 오소백 교수님이 ‘신문기자가 돈을 받는 것은 정조를 빼앗기는 것이다’라고 하신 말씀이 떠올라. 그 시절에도 정조는 여성들에게 생명이었지.”
그는 1960년 대학을 졸업하고 평택으로 돌아와 언론인 생활을 줄곧 했고, 지금까지 고향을 지키고 있다.
“내가 한국일보 평택지국을 맡아 배달도 했으니 평택의 밑바닥 민심까지 다 알게 됐지. 한나라당 평택을지역당협위원장을 지낸 김홍규가 초등학생 시절 신문배달을 하겠다고 찾아온 적이 있어. 나는 초등생이어서 안 된다고 돌려보냈던 일이 기억나네.”
□경찰서장 개입한 여당의 관권선거 현장 목격
그는 평택이 배출한 거물급 정치인 유치송 국회의원에 관한 비화도 들려줬다.
“60년대에 유치송은 해공 신익희의 비서실장을 지낸 분으로 평택에 그만한 재목이 없었지. 유치송 의원이 평택에서 민주당 소속으로 1967년 총선에 나가 공화당의 이윤용 후보와 싸운 적이 있어. 이윤용은 무학인데 돈이 많았어. 유치송이 국회의원을 한 번 하고 재선을 위한 선거였는데 공화당의 관건선거가 굉장히 심할 때였지. 하루는 늦은 밤 자정 무렵 내가 신아일보 기자와 둘이 평택경찰서에 갔어. 그런데, 경찰서장실에 불이 켜져 있는 거야. 창문 너머로 가만히 보니 김아무개 경찰서장과 이윤용 후보, 이 후보의 선거참모, 정보과장, 이렇게 네 사람이 같이 이야기를 나누는데, 허술한 창문 틈 사이로 바깥에 다 들려. 엿들어보니 선거가 며칠 안 남았는데 노란 봉투에 500원, 5000원씩 넣어 돌리자며 작전을 짜고 있더군. 나는 녹음기도 없었고, 사진도 찍을 수 없어서 황당하고 곤혹스러웠지. 증거를 남길 방법이 없었어. 할 수 없어 경찰서에서 500m 쯤 떨어진 곳에 있는 유치송 의원의 집에 달려가 이 사실을 알리고 녹음기가 필요하다고 했더니 거기도 그게 없었어. 그래서 보도를 하지 못했지. 그냥 기사를 썼다간 증거를 대라 하면 내가 당할 수가 있거든.”
특종감인데 지역구 주민들이 다음날 돈봉투를 받았을 것 아닙니까. 그것을 증거로 잡아 보이면 되죠.
“당시는 고무신과 막걸리 주고 선거운동하는 것이 다반사였으니까, 돈봉투 돌렸다고 문제가 되지도 않았어. 하지만 내가 목격한 사건은 경찰서장이 여당 후보의 선거운동에 직접 개입한 것이 문제였어. 결국 이윤용은 관권선거를 통해 국회의원에 당선됐고 유치송은 떨어졌지.”
그 후 이윤용 의원에게 엄청난 사건이 터졌다. 그의 당선을 위해 측근들을 동원해 대리투표한 사실이 밝혀졌다. 유천형 기자는 이번에 제대로 기사를 썼다. 취재 과정에서 이 의원의 부인이 유 기자를 호텔로 불러내 울면서 봐달라고 애원했지만 냉정하게 거절했다고 한다. 유 기자는 돈 봉투까지 내미는 것을 뿌리치고 본사에 송고했고, 다음날 그의 기사는 사회면 중간 톱으로 실려 큰 파장을 일으켰다. 그러나 같이 취재했던 신아일보에는 한 줄도 보도되지 않았다. 결국 사회적으로 문제가 커지자 공화당에서는 이 의원을 곧바로 제명했다. 그는 4년간 무소속으로 의정활동을 했지만 그 후부터는 유치송에게 패하고 더 이상 국회 근처에는 가지 못했다.
유천형 씨가 언론인 생활을 마감하고 무소속으로 도의원을 재선까지 한 것도 이채로웠다. 그는 돈공천이 관행이 되고 있는 기존 정당에 혐오를 느끼고 무소속을 고집했다고 한다. 더욱이 지역구 선거에서 거대정당 후보들 틈에 끼어 두 번이나 나가 두 번 다 승리했다. 당시 그의 지역구는 평택시 세교동·통복동·원평동이었다. 조직의 도움을 전혀 받지 않았음에도 그가 지역에서 30여 년간 대쪽 같은 성품으로 목탁의 역할을 제대로 해온 점을 인정한 유권자들로부터 압도적인 지지를 받고 선택된 것이다. 뿐만 아니라 4대 도의회 전반기에는 무소속으로 부의장에 선출되기도 했다.
재선 도의원까지 한 그가 평택시장이나 국회의원은 왜 도전하지 않았을까? 그는 무소속의 한계를 느끼고 더 이상 욕심을 내지 않았다. 끊임없는 정보기관의 사찰과 감시에 혐오를 느꼈고, 공천제도에 문제가 많은 정당에는 들어가기가 싫었다. 그래서 그는 민간인으로 돌아와 평택항 발전을 위해 여생을 바치기로 했다고 한다.
□평택 출신 도지사, 대통령도 있어야
그는 올해 6·4 지방선거에서 경기도지사에 도전하는 원유철 의원에게 큰 기대를 걸고 있었다.
“평택에는 지금 아무 희망이 없어. 그나마 원유철 의원이 도지사로 나간다니 바람직한 일이라고 생각해. 원유철이가 되든 안 되든 평택을 위해 도지사 후보로 나가 싸워줬으면 좋겠어. 선거운동 하는 과정에서 평택 출신이라고 전국에 알려지면 평택의 네임벨류도 올라갈 것 아닌가. 도지사뿐만 아니라 평택 출신 대통령도 나오고, 훌륭한 지도자들이 많이 나왔으면 좋겠어. 지금 평택은 미군기지라는 부정적인 이미지로만 알려져 있잖아.”
비록 원유철 의원이 새누리당을 등에 업고 있지만 고향사람으로서의 도전을 대견하게 여기며 원로 언론인은 경기도청에 반드시 입성하기를 간절히 기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