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종환 시인의 긴 이야기

어디에 피었느냐 보다
아름답게 피었느냐가 중요

언젠가 다시 꽃 필 것이라고
믿고 기다리는 게 사랑
어떤 경우에도 끝까지
희망 놓지 말아야

시를 쓰는 사람은 쓰고자 하는 대상에 대해서 연민의 눈으로 바라봐요. 관심으로 들여다보고 애증으로 바라보고 어떤 경우에는 애정으로 대상을 바라보고 그리고 시로 표현하려는 대상을 존중해요.

아주 작은 들꽃도 최선을 다해 꽃이 핀 것이에요. 그냥 꽃 핀 것은 하나도 없어요. 최선을 다해 꽃피고 최선을 다해서 살아요. 우리만 최선을 다해서 사는 게 아니에요. 꽃 한 송이도 최선을 다해서 주어진 자기 목숨 자기 운명을 살다가 가구요. 끊임없이 거듭나고 거듭나니까 봄이면 새로운 꽃이 피는 거예요.

내안에서 끊임없이 거듭나면서 피고 또 피고 그래서 우리에게 사랑받는 것이죠. 남들에게 잘 보이지 않는 구석진 곳에 핀 꽃이 있어요. 남들에게 잘 보이지 않아서 이 꽃이 ‘나는 왜 이렇게 구석진 곳에서 살다 갈까’ 이렇게 자책하거나 못났다고 생각할까요? 어디에 피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아름답게 피었느냐 아니냐가 중요한 것이에요. 내가 서울에 핀 꽃인지 지방에 핀 꽃인지 남의 시선에 잘 보이는 꽃인지 구석진 곳에 핀 꽃인지가 이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모든 꽃은 나름대로 예쁘게 피었느냐를 생각하고 피어있어요.

벚꽃이 봄에 일찍 피니까 축제도 하고 막 사람들이 많이 보러 옵니다. 이때 들국화는 눈에 띄지 않았어요. 그럼 들국화는 게으른 꽃입니까? 벚꽃은 부지런한 꽃입니까?

우리는 우리 아이들이 내가 남들보다 먼저 뭔가를 이룩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꽃은 봄에 피고 어떤 꽃은 가을에 핍니다. 그것은 생태리듬이 그렇게 설계되어 있는 것 뿐이에요. 먼저 피고 먼저 뭔가를 이룩해 내고 먼저 생각해 내는 것이 꼭 좋은 것만은 아니에요. 장미는 5~6월에 피지만 꽃의 여왕이라고 하잖아요.

내 아이도 언젠가 다시 꽃필 것이라고 믿고 기다리는 것이 사랑일까요? 아니면 빨리 피게 하는 것이 사랑일까요? 조금 기다릴 필요가 있어요. 그리고 꽃이 필 것이라고 믿어주는 것이 더 중요해요. 아이들에게 다그치는 경우가 많은데 믿고 기다려주는 것 그게 진짜 사랑이고 진짜 관심이고 진짜 애정이죠.

저는 지방대를 나왔고 지방에서 생활을 많이 했어요. 모든 사람이 중앙으로 가길 바라고, 서울로 가길 바랄 때 눈에 띄는 생활을 하길 바랄 때 내가 태어난 곳에서 열심히 일하며 생활했어요.

똑같은 벌레 먹은 상추잎이나 배추잎을 보고 어떤 사람은 “벌레먹었네? 버려” 이렇게 이야기 해요. 그런데 어떤 사람은 다르게 말을 해요. “난 이렇게 벌레 먹어서 예쁘다. 귀족의 손처럼 상처 하나 없이 매끈한 것은 밉다. 벌레 구멍이 뚫려서 그 구멍으로 하늘이 보이는 것은 이쁘다. 남을 먹여가며 살았던 흔적이 아름답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어요.

벌레를 먹여가며 살았다고 보는 후자가 시인의 눈, 이게 연민의 눈이에요. 살다가 상처도 받고 깨지기도 하는 사람도 있어요. 이런 사람들을 보고 “무슨 나쁜 짓을 햇길래 천벌을 받았냐” 이렇게 말을 할 수도 있지만 그게 아니라 “남을 먹여가며 살려고 하다가 저렇게 상처가 났네” 이렇게 볼 수도 있어요.

쌍용차를 바라보는 시각도 두 가지가 있어요. 어떤 사람은 “쌍용차 보세요 나라가 저러면 큰일 나요. 큰일 날 뻔 했어요” 이렇게 보는 사람도 있어요. 그 소리를 듣고 깜짝 놀랐어요. 그렇게 바라보지 않고 연민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사람도 있어요.

<너에게 묻는다> 안도현 시를 보세요. 우리 주변에 자기 생을 다해서 남을 위해 연탄처럼 불타는 삶을 살고 재가 된 그런 사람들 우리 주위에 있습니까?

우리 시대에 어머니가 있죠. 우리 시대 어머니들은 자식이라면 끔찍하게 생각하고 다 내주고 하다가 재가 되어 하얗게 소외 돼서 구석에 앉아계신 어머니들이 있죠. 또 누가 있을까요? 또 해고된 쌍용차 노동자들 있죠. 77일간 노동자들 자신들을 불태운 그런 사람들이 또 있습니까?

지나가다가 핀 꽃이 있어 코스모스인가 하고 바라보고 있는데 바람이 살짝 불었는데 휘청하고 흔들려요. ‘아 바람이 살짝 불었는데 이렇게 흔들리면 평생 흔들려 산다는 이야기네. 빗방울이 맺혀있는데 비가 오면 엄청 시달리겠구나’하고 생각하다가 ‘저렇게 비에 젖고 시달리면서도 꽃을 피우네?’ 그래서 <흔들리며 피는 꽃>이란 시를 썼어요.

이 세상 어떤 꽃도 비바람에 시달리며 꽃을 피워요. 허리가 휘고 꽃잎이 떨어지고 하면 원망도 욕도 하고 싶겠지만 힘들면서도 꽃을 피우잖아요. 다른 사람들은 평범하고 똑바로 가는데 나는 왜 자꾸 흔들릴까? 나는 왜 갈등하고 방황할까? 나만 그럴까? 생각하겠지만 이 세상 어떤 사람도 방황하고 흔들리지 않는 사람 없다고 봐요.

저는 해고 생활을 10년 했어요. <접시 꽃 당신>이란 시로 100만부이상 팔리고 영화화 되면서 수백만의 독자를 가지고 있었어요. 마음만 먹으면 노동운동 안하고 수없이 많은 돈을 벌면서 살 수 있는 조건이었어요. 하지만 저는 부끄럽지 않은 길을 선택했고, 그 결과로 감옥을 가서 치욕 속에 살았고 나오니 동료들이 하나 둘 죽어 가는 거예요.

수익이 있으면 사무실에 다 동료들을 위해 주었어요. 내년이면 될 것 같고 2년이면 해결될 것 같고 이렇게 지나간 시간이 5년이 지났어요. 5년 만에 동료들이 복직했어요. 동료들이 다 복직하고 저 혼자 남았는데 제가 그동안 사무실에 동료를 위해 가져다 준 것이 이제 저에게 돌아오기 시작했어요. 혼자 5년을 더 버티는 동안 이번엔 동료들이 저에게 얼마씩 걷어서 도와주었어요. 그렇게 10년 만에 법이 바뀌어 합법화 되고 명예도 회복되고 유공자가 되어 회사로 돌아갔어요. 10년 동안 노동운동 안하고 글만 써서 100만부씩 책을 팔고 살았으면 훨씬 돈을 많이 벌고 살았을거에요. 그렇지만 자아를 찾아가는 지금이 행복해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이런 삶의 과정에 무엇이 옮고 가치 있는 삶인지 알려주었고, 오히려 얼마나 더 자랑스러운지 몰라요. 결국 복직을 했고 내 인생이 지금 어디쯤 와 있는 가 돌아보는 시를 썼어요. <세시에서 다섯시 사이>.

시 앞부분에서처럼 내 인생에 12시에서 1시 사이는 치열하게 살았어요. 40대 후반 직장도 잃고 몸도 아프고 유배 생활 비슷한 생활을 한 적도 있어요. 그러나 앞으로 내 인생의 앞에 뭐가 기다리고 있는지 예단 할 수 없어요. 절망만 있을 거라고 말할 수는 없어요. 어떤 인생이 놓여 질 지 단언할 수도 없어요. 이제 끝났다고 생각했는데 새로운 인생이 시작되는 경우도 있어요. 저는 여러 번 그런 것을 경험 했어요. 그래서 어떤 경우에도 끝까지 희망을 놓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혼자가 아니라고 지켜봐주고 같이 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해고된 후 버티면서 그래도 살만한 세상이라고 느꼈어요. 그동안 나를 지켜본 대지와 자연, 다람쥐, 아이들이 다 내편이었어요라고 말해 줄 것으로 믿어요. 아직 살아있는 것을 감사하자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우리 앞에 놓인 재벌의 벽, 불평등의 벽, 이념의 벽, 차별의 벽, 혼자 힘으로는 못 넘지만 함께 넘을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럼 어떻게 넘어가야 할까 말을 할 때 벽을 넘는 담쟁이처럼 넘자고 이야기 하고 싶어요. 담쟁이는 산도 많고 숲도 많은데 이런 벽에 살게 되었을 때 다른 식물들은 비옥하고 좋은 곳에서 사는데 왜 우리만 이런 곳에서 살아야하는지 얼마나 원망이 많았겠어요. 흙이나 물 한 방울 나오지 않는데도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나만 힘든 것이 아니라 내 옆에 있는 이파리, 아래 있는 이파리 힘들다고 생각하고 손을 잡고 다 연결되어 있어요. 나만 힘든 것이 아니라 백 개의 이파리들이 손에 손을 잡고 이 절망적인 환경을 아름다운 풍경으로 바꿀 때까지 잡은 손을 놓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해서 <담쟁이>라는 시를 썼어요.

독립운동 하시다 돌아가신 분들의 자녀들이 비참하게 사는 분들이 많아요. 이건 정상적인것이 아니요. 우리가 비록 비주류라고 취급받아도 이런 세상을 바꾸기 위해 사람들을 설득하고 노력하는 것이 우리가 만들어가는 이 역사가 주류의 가치가 있는 것이에요.

여러분들을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기억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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