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차성진 편집주간

1.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어떤 사람에게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가운데 한 마리가 길을 잃었다고 하면, 그는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다 남겨 두고서, 길을 잃은 그 양을 찾아 나서지 않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가 그 양을 찾으면, 길을 잃지 않은 아흔아홉 마리 양보다, 오히려 그 한 마리 양을 두고 더 기뻐할 것이다. (새번역 성서 마태복음 18장 12~13절)

 

2. 믿음이 부족한 사람들은 경전의 본뜻을 받아들이기 쉽지 않아 이런저런 궁리를 합니다. 만일 양치기가 아흔아홉 마리 양들의 안위를 더 중요하게 생각해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아 나서지 않는 결정을 내린다면 어떻게 될까요? 이 결정은 ‘합리적’일까요?
만일 잃어버린 양이 평소에 양치기가 수없이 되풀이한 ‘안전주의사항’을 잘 지키지 않는 양이었다면 양치기가 그 양을 찾아 나섰을까요? 말 잘 듣는 양이 사라졌다면 어땠을까요?
양치기가 결정을 내리기 전에 아흔아홉 마리의 양들에게 어떻게 하는 것이 좋으냐고 물어 보면 양들은 어떤 의견을 말할까요? 이런 자세는 ‘민주적’인가요? 이렇게 의견을 물어 보고 양들의 의견과 관계없이 잃은 양을 찾아나서는 것이 바람직한가요?
양을 찾은 양치기가 길을 잃지 않은 아흔아홉 마리 양보다 오히려 그 한 마리 양을 두고 더 기뻐하는 모습을 보면서 아흔아홉 마리의 양들은 어떤 기분을 느낄까요?

 

3. 양치기가, 경위야 어쨌든,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아 나서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아흔아홉 마리를 안심시키기 위해서일 것이라 생각합니다. 한 마리를 찾는 동안에는 양치기 없이 벌판에 놓인 양들은 불안에 떨고 있겠지만, 자신이 언제 길을 잃더라도 양치기가 찾아 나설 것이라는 믿음이 양떼와 양치기 사이에서 손상되지 않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판단할 것입니다. 양들 사이에 양치기에 대한 믿음이 사라지면 양들은 저마다 살 길을 찾으려 할 테고, 이 혼란의 비용은 양치기의 다른 선택의 결과에 비해 엄청나게 클 것입니다.
그렇지만 사람 사는 세상은 양과 양치기 사이의 관계보다는 훨씬 복잡하고 다양한 측면을 갖고 있어서 잃은 양을 찾아 나서는 결정이 최선이라고 잘라 말할 수는 없습니다. 당장 성서에도 잃은 양을 되찾아 기뻐하는 것이 그리 간단하지 않음을 말해줍니다. 집 나간 둘째 아들이 재산을 탕진하고 거지꼴로 돌아왔을 때 아버지가 기뻐하는 모습을 보면서 큰 아들이 불평을 하니까요.
가장 견고한 공동체인 가족 안에서도 이럴진대, 느슨한 공동체의 지도자가 잘 있는 아흔아홉 마리를 제쳐두고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아 나서는 결정은 되레 양들의 반란을 부를 수도 있습니다. 

 

4. 사람 사는 세상과 양들이 사는 세상의 결정적인 차이는 사람들이 양치기를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이겠지요. 양들에게 양치기는 운명이지만, 사람들은 지도자를 선택합니다. 그 선택의 기준은 시대와 장소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잃은 양 한 마리를 대하는 양치기의 자세도 기준의 앞부분에 놓여야 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아흔아홉 마리로 상징되는 ‘대다수’의 행복과 공동체의 발전을 기약하는 많은 공약들이 곧 우리 앞에 던져질 것입니다. 공약이 잘 지켜지지 않는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고 있지만, 그래도 판단의 기준이 달리 없으니, 약속들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는지 눈여겨봐야겠지요. 
그렇지만 투표권 없는 청소년과 어린아이들, 숫자로는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는 장애인은 물론 투표권 없이 이 땅 위에서 함께 살아가는 결혼이민 여성들과 외국인 노동자들을 위해 어떤 공약을 내 놓는지 살펴볼 일입니다.
개발 바람에 밀려나기를 거부하고 저항하고 있는 평택 뉴타운 예정지역의 힘없는 사람들을 위해 어떤 해결책을 제시하는지 눈을 부릅뜨고 지켜볼 일입니다.
지금은 아흔아홉 마리에 섞여 있지만 언제 길 잃은 한 마리의 양이 될지 알 수 없는 세상입니다. 까딱 잘못 선택하면 양치기가 잃은 양을 찾기는 고사하고 통통하게 살찐 양들에게 방해된다고 비루먹은 양들을 내쫓는 일이 벌어질 수도 있습니다.

저작권자 © 평택시민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