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락산권의 역사문화자산과 장소정체성 찾기 ⑳ 

평택 부락산권과 한국 도학의 태두 정암 조광조 1

평택 북부지역의 주산인 부락산(높이 143m)은 고려 승장 김윤후, 임진왜란 당시 연안대첩을 승리로 이끈 이정암·이정형 형제, 일제강점기 자전거 영웅 엄복동, 판소리 근대5명창 이동백, 민족 지도자 민세 안재홍, 기지촌 쑥고개의 삶을 노래한 박석수 시인 등 역사인물의 흔적이 남아 있는 곳이다.

삼남대로 대백치에서 이충동 동령마을로 내려오는 흔치고개, 흔치휴게소를 지나 소골로 내려가는 고갯마루 서낭당, 400년 전통의 정제와 줄다리기가 남아 있는 동령마을 등 역사문화자산도 풍부하다. 특히 북부지역의 유일한 생태 휴식 공간으로서 부락산과 덕암산을 잇는 생태통로는 주말이면 1000명이 넘는 시민이 이용할 정도로 사랑받고 있다.

본지는 그동안 부락산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의 필요성을 꾸준히 고민해온 황우갑 민세아카데미 대표와 부락산의 역사문화자산을 깊이 들여다보고 장소 정체성을 어떻게 세울 지에 관한 글을 기획하여 매월 1회 연재한다. 앞서 황우갑 대표는 본지에 국내 공간문화재생 사례, 퇴역 평택함을 활용한 평택시의 장소마케팅 전략, 해외 문화예술 공간 탐방 등의 기획 기고를 게재하며 지역의 정체성을 정립하고 그 공간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방안을 통찰력 있게 제시해왔다.

‘부락산권의 역사문화자산과 장소정체성 찾기’가 평택의 정체성과 문화 다양성을 확립하는 데 마중물이 될 것으로 기대한다.

 

부락산 기슭 조광조와 댕기머리 낭자 안내판
부락산 기슭 조광조와 댕기머리 낭자 안내판

조광조와 부락산 댕기머리 낭자 설화

주말이면 여전히 가끔 아침 시간을 이용해서 가족과 함께 부락산에 오른다. 이충 분수공원으로 해서 산불 감시대에 올랐다가 하산하는 데 40분 정도 시간이 걸린다. 분수 공원 뒤편 야외무대를 지나 가파른 산길을 1분 정도 오르면 소로가 나온다. 이곳에는 길가에 ‘조광조(趙光祖)와 댕기머리 낭자’라는 설화 소개 안내판이 설치되어 있다. 조광조의 호 정암(靜菴)은 고요한 암자라는 뜻이다. 정암은 소년시절부터 늘 평상심을 유지하고자 힘썼다. 이 설화는 소년 시절에도 원칙에 충실했던 선비 조광조를 사모했던 한 여인의 이루지 못한 사랑이야기이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충마을에 살았던 소년시절 조광조의 옆집에는 비슷한 또래의 댕기머리 낭자가 살았다. 낭자는 집 앞을 지나 서당으로 향하는 미소년을 흠모하게 되었다. 하지만 낭자의 집안은 중인층이라 엄혹한 신분의 벽을 뛰어넘지 못하고 끙끙 가슴앓이를 하던 낭자는 그만 마음의 병을 얻어 앓아눕게 되었다. 낭자의 부모는 딸의 애달픈 마음을 조금이나마 위로해주려고 조광조의 집에 사람을 보내 서당으로 가는 길에 단한번 만이라도 고개를 돌려 낭자의 얼굴을 봐달라는 부탁이었다. 하지만 도(道)가 아닌 일에 뜻을 바꿀 수 없는 일이라 다음날 서당가는 길에도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따뜻한 눈길을 고대했던 낭자는 조광조의 냉정한 태도에 상사병이 도져 누웠고 그만 세상을 뜨고 말았다.

 

부락산 자락의 정암로와 추담로

부락산권 역사인물 관련 문화 유산 가운데 거의 매일 한번씩 지나다니는 곳은 충의각(忠義閣)이다. 부락산 자락 동령마을 맞은편 도로옆에는 정조(正祖) 때인 1800년에 세워진 충의각이 있다. 이 비가 향토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정암 조광조 충렬 오학사비’이다. 이 비각의 남북으로 이어지는 도로명은 병자호란기 삼학사의 한 분이었던 추담 오달제의 뜻을 기억하고자 추담로로 이름 지어졌다. 원래는 동녕마을 입구 옛 산길에 있었으나 2000년대 중반 도로가 생기면서 현재 위치로 이전하고 충의근린공원으로 조성했다. 부근 아파트 이름도 추담 마을이다.

이 길과 직선으로 국제대학교에서 서정리역까지 가는 길의 도로명은 정암 조광조의 삶과 정신을 전하고자 도로명이 정암로이다. 아직 도로명 주소가 없던 2001년 필자는 서정리 초등학교 부근에서 지역내 여러 학원장님들과 공동으로 대입전문 종합학원의 원장을 맡았다. 그때 제안한 학원 이름도 한국 도학의 태두였던 정암 조광조 선생의 삶과 정신을 알리고자 정암입시학원으로 했던 적이 있다. 아쉬은 것은 추담로에는 추담의 상징물이 없고 정암로에도 정암 관련 홍보물이 전혀 없다는 점이다.

 

충의각
충의각

조광조와 오달제의 삶과 정신을 추모하는 충의각

충의각이 있는 이 지역은 행정구역상으로는 송탄동과 맞닿은 중앙동이지만 법정동으로는 이충동이라고 불린다. 동령마을 일대는 조선 중종때 개혁정치가 정암 조광조와 삼학사 가운데 한 사람인 오달제가 어린 시절 공부하던 곳이라고 전한다. 이충은 두명의 충신을 뜻한다. 그 한분이 정암 조광조이고 다른 한 분이 추담 오달제다. 충의각 비문을 풀어 읽으면 다음과 같다.

반지산 동쪽에 선생의 터가 전하고

성고개 아래에는 오학사의 옛집이 있네

그 기백은 우리 마음에 경계하기를 바라니

지극한 간함을 이어받아 글로 새겨 비를 세웠네

1800년 6월 세움

 

조선 중종 때 개혁정치가
정암 조광조는 기묘사회로 
생을 마감한 인물 
서울 종로에서 태어났으나 
선영이 있던 용인에서
어린시절을 보내며  
가까운 진위 동령마을에서 
학문 연마했을 것으로 추정

부락산 자락 댕기머리 낭자
설화도 전해지고 있고 
삼학사 가운데 한 명인 
오달제와 더불어 
이충동 지명 유래된 역사인물

1800년 6월에 마을 유림들이 세웠다고 하니 조선 22대 국왕 정조가 47세의 젊은 나이에 승하한 그 시기 전후였다. 조선의 국왕 가운데 신하를 능가하는 독서광이었던 사람이 정조였다. 이 시기에 <이충무공전서> 간행 등을 통해 국민 통합에 힘썼던 만큼 유림과 마을 주민들이 조광조와 오달제라는 두 선비의 개혁정신과 절개를 기억하며 부락산 자락 동령마을의 장소정체성을 강화하기 위해 충의각을 세운 것은 225년이 지난 지금 다시 보아도 소중한 일이다. 아쉬운 것은 도로 공사 등으로 인해 두차례에 걸쳐 비각의 위치가 변경되었다는 점이다. 그래도 이 비석이 없어지지 않고 두 충신의 뜻을 기억하는 소박한 공간으로 남아 있어 마을의 이야기를 보태고 있으니 그마나 다행이다.

 

조선 중종 때의 개혁정치가

정암(靜菴) 조광조(趙光祖, 1482 ∼1519)는 조선조 중종 때의 개혁정치가였다. 조광조는 청년기의 대부분을 무오사화, 갑사사화로 이어지는 정치적 소용돌이 시기에 보냈으며 자신도 기묘사화(1519)로 생을 마감한 인물이다. 정암 조광조에 대해서는 그의 도학정치와 의리론에 초점을 맞춰 정치적 위선에 저항한 숭고한 도덕적 진실을 추구했던 인물로 보는 긍정적인 평가도 있으나 그러나 급진적인 도학적 이상주의를 부정적으로 인식하는 비판적 시각도 있다. 조광조는 이런 도덕적 근본주의 원칙을 바탕으로, 초기에 중종의 신임하에 현량과(賢良科) 실시, 소격서(昭格署) 폐지, 연산군 시절에 득세한 정국 공신의 개정 등을 주장하고 관철했으나 마침내 왕권의 약화를 우려한 중종과의 대립으로 사약을 받았다. 정치의 도덕적 원칙을 지키려했던 조광조의 도덕적 근본주의는 이후 한국정치사상의 전형으로 굳어져 왕권의 도덕적 일탈을 견제하고 교정하는 소명을 꾸준하게 지키게 된 계기를 만들었다

 

훈구 세력의 위기 의식과 신진도학파와의 갈등

정암이 태어나기 전 조선 전기는 세조의 왕위 찬탈이라는 계유정난이 있었고 도학자들이 보기에 이는 조선왕조의 정체성을 뒤흔드는 사건이었다. 또한 조선왕조 개국 이후 권력을 독점해오던 훈구세력이 군주를 무력화하거나 정치의 정도를 훼손하는 일이 많아 정국 혼란의 불씨들이 계속 점화되는 시기였다. 이는 결국 훈구파의 위기의식이 권력과 결탁하여 정암과 같은 신진도학파를 탄압하는 정치적 폭력 현상의 반복으로 나타났다. 그리하여 정암 생애를 전후한 시기에 이른바 무오, 갑자, 기묘, 을사라는 4대 사화가 50년에 걸쳐 발생했고 이는 이후 선조때 시작되는 당쟁과 달리 소인배들이 능력있는 개혁 선비들을 일방적으로 몰아내는 정치적 폭거이기도 했다.

 

선영이 있는 용인 인근 진위에서 어린 시절 수학

조광조는 성종 13년인 1482년 현재의 서울 종로구 경운동 18번지에서 태어났다. 낙원상가 입구에는 조광조가 태어나 살던 집이라는 표지석이 있다. 후에 기묘사화로 죽음을 맞이해 묘소는 용인시 상현동에 있다. 그를 추모하는 서원은 묘소에서 가까운 심곡서원인데 이곳은 조광조의 선영이 있던 곳이다. 용인과 진위(현재의 평택)은 바로 인접한 지역이었기에 어린 시절 선영이 있던 용인에 와서 지내면서 서정리 반지산 동쪽의 동령 마을 부근에서 학문을 연마했을 개연성은 매우 크다. 훗날 퇴계 이황이 쓴 정암 관련 행장에는 나면서부터 아름다운 자질을 가지고 있었고 어려서 놀적에는 이미 성인의 풍모를 가지고 있었다 한다.

율곡 이이도 조선의 선비 중에 자질이 아름답기로 조광조만한 이가 없다고 평가했을 정도였다. 얼굴이 옥과 같아서 어진 사람이나 어리석은 사람이나 정암을 보기만 하면 모두 한결같이 좋아했고 특히 뭇여성들이 정암의 준수한 외모에 연정을 느꼈다고 하니 앞서 댕기머리 낭자의 가슴 아픈 이야기도 사실이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하겠다. 정암이 남달리 조숙했기에 5살 무렵의 정암에 대해서 “어른과 같은 행동거지가 있었으며, 예절 배우기를 좋아하였다. 조금이라고 잘못된 일을 보면 비록 상대가 손윗사람일지라도 지적하여 그만 두도록 하였다”고 한다.

<계속>

 

황우갑 전문기자 민세아카데미 대표
황우갑 전문기자 민세아카데미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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