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하게 자신을 드러내야 문화를 즐길 수 있어
최승호 사진작가는 11년째 고향 고덕면 동고리에 살고 있다. 2014년 개인 암실을 만들며 터를 잡았다가 각종 문제가 불거진 마을을 외면해선 안 되겠다는 생각에 대안문화공간 루트를 꾸몄다. 주민과 예술인과 교류하고 신도시 개발로 사라지는 고덕면 17개 부락을 사진으로 아카이빙하고 정겹고 따스했던 마을의 문화적 풍경을 기록했다. 지난해에는 동고리 마을기록관을 개관했으며 매년 동고리 주민이 함께 어울려 노는 마을음악회를 열고 있다.
요즘 어떻게 지내고 있는가.
평택 아티스트 페스티벌 ‘피:아트(P:art)’ 동고리 투어 때문에 정말 바쁘다. 매주 토·수요일 동고리를 찾는 시민에게 동고리를 알리고 소개하고 있다. 대안문화공간 루트, 동고리마을기록관, 음악연습실, 문화센터 등의 문화공간과 사진·옻칠·목공·대리석조각 등 다양한 장르의 문화예술인 6명을 연계해 진행하는데 반응이 매우 좋다. 한결같이 평택에 이런 곳이 있었냐고 놀라워한다. 무엇보다 마을 주민이 좋아한다. 많은 사람이 그들의 삶을 알아주는 것도 좋고, 동고리의 삶이 행복함을 인정받는 것도 기분 좋은 일이다.
10년간 개발로 고덕면은 상전벽해의 변화를 겪었다. 동고리도 크게 다르지 않았을 텐데.
먼저 마을 길이 점점 좁아졌다. 예전에는 우리집과 옆집 간에 경계가 없었는데 개발이 되며 여기는 내 땅, 내 집 하는 경계가 생겼다. 원룸 같은 다세대주택이 들어서면서 외지 사람들이 크게 늘고 쓰레기·주차·소음 등의 갈등이 빈번해졌다. 원룸에 사는 분들은 낮에 직장 다니고 밤에 들어와 잠만 자는 생활을 하니 동고리가 어떤 곳인지, 여기에 누가 사는지 관심이 적을 수밖에 없다. 마을 부녀회와 노인회가 작은 갈등으로 서로 본체만체하는 난처한 상황도 있었다. 동고리에서 자리 잡고 마을 총무를 맡아 눈으로 보게 된 마을의 문제들을 어떻게 해결할지 골몰했다. 예술은 세상을 조금 좋게 변화시키는 데에 그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작은 음악회를 열었다. 마당에 사람들을 모아 연주하고, 삼겹살을 구웠다. 부녀회 회원도 노인회 회원도 오고, 원룸에 있던 분들도 밖으로 나왔다. 서로 어울려 즐겁게 놀다 보니 마을 분위기도 좋아졌다.
문화가 소실되면 회복할 수 없어
사진작가로서 주민의 삶을 기록
주민이 문화의 주인공 반열 올라야
마을의 문화, 지역의 문화 발전해
고덕의 변화를 기록하는 작업을 꾸준히 해왔다고 들었다.
각종 개발로 고덕은 매우 혼란스러웠다. 땅값이 오르고, 보상으로 돈이 풀리면서 경제적 여건이 좋아졌지만 주민은 그만큼 행복해지지 않았다.
고덕국제신도시 개발로 고덕면에서 17개 부락이 사라졌다. 3년간 17개 부락의 아카이빙 작업을 하며 만났던 주민들은 불안감을 감추지 못했다. 오랫동안 어울려 살아온 이웃과 헤어지고, 낯선 곳에서 낯선 이웃과 부대끼며 살아야 하기 때문이었다. 충북 보은으로 이주한 지인은 지금도 “일 마치고 집에 들어오면 그렇게 쓸쓸할 수가 없다”고 한다.
그들의 삶이, 오랫동안 대대로 이어왔던 농촌마을의 문화가 사라질 상황이었다. 문화가 소실되면 회복할 수 없다. 그냥 없어진다. 사진작가로서 지역에서 평생 살아온 주민을 존중하고 그 삶을 기록했다.
동고리 마을기록관도 같은 맥락에서 준비한 것인가.
마을을 기억하는 것은 삶을 기억하는 것이며 삶을 기억하는 것은 사람을 기억하는 것이다.
마을음악회, 마을사진전 등 문화예술의 힘으로 동고리는 화목하고 살기 좋은 마을로 발전해왔다. 이들의 이야기가 동고리 마을기록관에 고스란히 기록됐다.
마을기록관 건립과정은 문화 변방이 아닌 우리가 희망하는 문화안전망을 넘어 사회안전망의 기초가 단단히 뿌리내리고 있는 마을을 발견하는 일이다. 우리의 삶을 기억하는 공간이자 과거와 미래가 만나는 곳이 되기를 기대하며 동고리 마을기록관 개관을 준비했다. 마을의 주민 모두를 사진으로 담아내고 30여 가구를 방문해 구술 기록했다. 그리고 지난해 12월 6일 동고리 마을기록관을 개관했다.
본인의 예술관을 정립한 계기가 있었는지.
30대 후반 어떻게 살아야 나답게 살 수 있을지 삶의 태도에 관해 고민했다. 세상을 나 혼자 살 수 없고, 지금의 나로 성장하기까지 부모 형제를 비롯한 주변 사람들의 도움이 컸다. 세상은 함께 살아가야 한다. 50대가 되면 가족과 이웃으로부터 받은 도움을 다시 사회로 환원해야겠다고 결심했다. 환원할 분야로 문화예술을 정하고 예술사·미술사·사진학 등을 꾸준히 공부했다.
지역사회에서 평택의 문화가 척박하다는 의견이 계속 제기돼왔다. 원인을 무엇이라 보는가.
우리 스스로 주인공이 되지 못해서다. 공연이든 전시든 동원의 대상이었다. 보고 박수치고 돌아왔다. 서로 존중하고 함께 놀았던 기억이 없으니 축제도 없었다. 이제 시대가 변했다. 사람들은 보고 싶은 공연에는 비용을 아끼지 않는다. 문화예술인이 아니어도 직접 생산하고 소비한다.
중요한 것은 ‘참여’다. 우리가 주인공으로 참여하는 문화예술이 풍부해져야 한다. 동고리에서 매년 가을 마을음악회를 열며 주민이 참여하는 프로그램을 하나씩 넣었다. 할머니들이 그린 동화 그림으로 작품을 만들었고, 형수들과 전진현 작가가 함께 옻칠한 쌀통을 만들었다. 한 형수는 쌀통에 자개로 “내가 먹여 살린다” 글귀를 새겼다. 정말 진솔하지 않은가. 솔직하게 자신을 드러내야 문화를 즐길 수 있다. 이런 즐거움과 성취감에 주민은 문화의 주인공 반열에 오르게 되고 마을의 문화, 지역의 문화도 발전할 것으로 기대한다.
후배 예술인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예술은 소외된 사람, 사회적 약자 그리고 사회의 아픈 곳을 대변해야 한다. 그래서 민예총에서 활동했고 사회 환원을 염두에 두고 대안문화공간 루트를 만들었다. 누구도 강요하지 않은 나만의 신념에서 비롯된 활동이다.
그렇지만 다음 세대에게는 “똑같은 전철을 밟으면 안 된다”고 말한다. 저는 오랜 시간 준비해 50대에 시작했지만 젊은 세대가 처한 상황은 같지 않다. 첫째 성취감, 둘째 명예, 마지막으로 문화예술이 공공재 기능을 하게 해줄 경제적 측면을 고려해야 한다. 문화예술은 어떤 철학을 정립해 시작할지가 중요할 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