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해규의 문화살롱

8월 5일에서 9월 2일까지 지산동 프리퍼 캘러리에서는 ‘종심화필전(從心畵筆展)’이 열렸다. 올해 고희를 맞은 한국화가 김은숙(여·1956년생)의 개인전이다. 이번 전시작들은 진경산수와 인물화에 천착했던 이전 그림들과 경향이 달랐다. 여전히 진경산수가 배경이었지만 말·독수리·고래와 같은 생명체를 등장시켜 세상을 관조하는 철학적 새로움을 담았다.

 

예술적 기질은 집안의 DNA

화가 김은숙은 대구 태생이지만 실질적 고향은 서울이다. 아주 어릴 때는 삼선교 근처에 살다가 답십리 뱀산이라는 곳에서 성장했다. 김은숙은 남자아이들과 어울려 선머슴처럼 뛰놀았다. 어머니와 언니들은 중랑천에 나가 빨래했고 논밭에서는 마을 사람들이 농사지었다. 답십리의 목가적 풍경은 김은숙의 예술적 정서에 큰 영향을 끼쳤다. 어쩌면 평생을 진경산수에 몰두했던 것도, 지금 마산리 시골에서 그림을 그리는 것도 어린 시절 영향이라고 생각한다.

부모님은 슬하에 8남매를 두었다. 그 가운데 둘은 한국전쟁 중에 죽었고 6남매만 살아남았다. 어머니는 43세까지 아이를 낳아 길렀다. 어머니는 작고 강단 있어 ‘작은 거인’으로 기억된다. 얼마 전 어머니 기일에는 형제들이 어머니께 편지를 써서 함께 읽고 추억했다.

어려서부터 그림을 좋아했다. 예술적 재능은 집안의 대물림이었다. 아버지는 성품은 엄하셨지만 그림에 재능이 있었고 형제들도 그림·음악·시에 출중한 재능을 보였다.

꿈 많고 다방면에 관심이 많았던 사춘기 때는 화가도 되고 싶고, 음악가도 되고 싶고, 생물학자도 되고 싶었다. 마을을 뛰놀며 살아 있는 생물을 관찰하기 좋아했으며 한때는 오빠의 양계장에서 닭을 돌보며 조류들과 교감을 나누기도 했다. 하지만 결국 그림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단 한 번도 붓을 놓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고 살았다.

한국화가 김은숙은 8월 5일~9월 2일 지산동에 있는 프리퍼갤러리에서 ‘종심화필전’을 열고 말·독수리·고래와 같은 생명체를 등장시켜 세상을 관조하는 철학적 새로움을 담아낸 작품 15점을 선보였다.
한국화가 김은숙은 8월 5일~9월 2일 지산동에 있는 프리퍼갤러리에서 ‘종심화필전’을 열고 말·독수리·고래와 같은 생명체를 등장시켜 세상을 관조하는 철학적 새로움을 담아낸 작품 15점을 선보였다.

한영섭·남영희 선생님과 만남

중·고등학교 때는 줄곧 미술반 활동을 했다. 당시만 해도 미술학원은 부자들만 다녔다. 중학교 때는 서울예고에 진학하고 싶었다. 그러나 부모님은 돈이 많이 드는 예고보다는 일반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교대에 진학하기를 원했다. 서울 혜화여고 3학년 때 남영희 선생님이 부임했다. 홍익대학교 미술대학을 졸업하고 부부화가로도 활동했던 선생님은 우연히 김은숙이 데생한 작품을 보고는 깜짝 놀라며 화실을 운영하던 남편 한영섭 선생님에게 데려갔다. 한영섭 선생님은 미술학원에 등록해서 본격적인 미술수업을 받자고 했다. 하지만 가정 형편은 미술학원에 다닐 처지가 아니었다. 사정을 알게 된 한 선생님은 수업료의 30%인 7000원만 내도록 하고는 화실 조교로 일하도록 배려했다. 하지만 김은숙에게는 월 7000원도 부담이었다. 돈이 없어 화실에 가지 못하는 날도 많았다. 들쑥날쑥 화실에 나갔지만 그림 실력은 크게 늘었다.

한영섭 선생님의 배려로 본격적으로 입시지도를 받았다. 학교 성적도 우수해서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진학을 권유받았다. 서울대를 진학하려면 특별한 성적관리가 필요했다. 집안일을 돕고 화실에서 일하며 입시를 준비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마음속으로 서울대학교를 포기하고 후기대학인 홍익대학교 미술대학만 생각했다. 당시 홍익대학교는 성적보다 실기능력을 중시했다. 결과적으로 서울대학교 응시는 불발됐다. 우습게도 집안에서 토정비결을 봤는데 서울대는 불길하다고 했다며 말렸던 것이 원인이었다. 차선으로 수도여자사범대학(현 세종대)에 원서를 냈다. 당시 수도여자사범대학 회화과는 이당 김은호의 제자 운보 김기창이 교수로 있어 명망이 높았다. 수도여자사범대학 회화과에 합격했지만 즐겁지 않았다. 한영섭·남영희 선생님도 못내 아쉬워했다. 후기로 홍익대학교 미술대학에 진학하려던 것도 가족 반대로 좌절됐다.

이태용, 김은숙 부부 화가의 집
이태용, 김은숙 부부 화가의 집

평생의 화우(畵友) 이태용 화가와 결혼

수도여자사범대학에서 오태학·이철주·오용길 선생을 만났다. 당시 30대였던 그들은 열정이 넘쳤고 개성과 능력이 출중했다. 재밌는 것은 오용길 선생은 남편 이태용의 서울예술고등학교 스승이었고, 오태학·이철주 선생은 아들의 중앙대 미대 스승이기도 했다는 사실이다. 나중에 오용길 선생은 이화여대로, 오태학·이철주 선생은 중앙대로 자리를 옮겼다. 이들은 곁에서 세심하게 지도하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스스로 열심히 하도록 배려하고 지켜보는 스타일에 가까웠다. 학생 때는 그것이 불만이었지만 돌이켜 보면 그 방식도 괜찮았다는 생각이 든다.

대학 1학년 때는 서양화와 동양화를 함께 그렸다. 전공은 2학년 때 정했다. 선택하지 못해 머뭇거릴 때 오태학 선생이 “당연히 동양화를 해야 한다”고 잡아끌었다. 그렇게 동양화가로의 첫발을 내디뎠다. 오태학 선생은 대한민국미술전람회(일명 국전)에 부정적이었다. 국전을 거부하고 제자들의 출품까지도 막았다. 그래서 대학 시절 공모전에 출품할 기회가 매우 적었다. 대학교 2학년 때 ‘대학미전’이라는 공모전에 처음 출품하여 특선으로 당선됐다. 그런데 나중에 “교수님이 4학년 선배를 배려하기 위해 은상이었던 김은숙을 뒤로 밀어내고 특선을 주었다”는 뒷이야기를 듣고는 크게 실망했다. 공정하지 못한 공모전에 더는 출품하고 싶지 않아서 오랫동안 응모하지 않았다. 공모전 출품은 대학원에 진학하고 나서야 다시 시작했다. 중앙미전에 출품했었는데 우수상을 받았다.

대학 졸업 후 10년은 방황의 시간이었다. 졸업 직후에는 도봉구 안방학동과 수유리에서 화실을 운영했다. 독실한 불교 신자였던 언니 영향으로 불교에도 귀의했다. 하지만 불교로는 신앙적 갈등이 채워지지 않았다. 방향을 전환해서 서울의 영락교회·새문안교회를 다니며 신앙의 진리를 탐구했다. 그러다가 어머니 병구완을 하던 중 뜨거운 신앙적 체험을 하기도 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갈피를 잡지 못하던 시기 남편 이태용을 만났다. 화실의 인수인계를 위해 업무상 만났던 사이였는데 첫눈에 반해 2개월 만에 면사포를 썼다. 1987년이었다.

 

‘평택과 만남’ 화가로 재탄생하는 계기

남편 이태용은 지산동 좌동마을에서 9대를 살아온 토박이다. 아버지는 경기남부 지역에서 중등학교 교장을 지낸 교육자 집안이기도 했다. 부부가 잠실에서 화실을 운영할 때 시부모님이 함께 살자고 제안했다. 김은숙은 시아버지에게 물었다. “당신의 손주들이 조상들의 터전에서 살기를 원하세요?” 시아버지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두말하지 않고 보따리를 쌌다.

송탄으로 내려와 화실을 열었다. 시아버지가 지어준 ‘예원’이라는 아호를 따 ‘예원학원’으로 명명했다. 학원만으로 생활하기 어려워지자 남편은 진위고등학교 미술교사로 취직했다. 서예 작가로도 명성이 있었던 시아버지는 김은숙에게 작품활동을 하라고 종용했다. 시아버지의 후원에 힘입어 10년 동안의 묵은 먼지를 털어버렸다.

송탄미술협회 회원전에 ‘송탄의 여명’이라는 작품을 출품했다. 운영하던 미술학원에서 바라본 송탄 시내 풍경을 화폭에 담았다. 이 작품은 송탄시에서 매입해 공공기관에 영구 전시됐다. 송탄미술대전과 경기미술협회 회원전에도 연이어 출품했다. 그렇게 몇 년을 보내자 중견 미술작가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프랑스 파리한인회 초청으로 파리 ‘가람아트’에서 초대전도 개최했고, 보름 동안 유럽 7개국 스케치 여행을 하는 호사도 누렸다. 그러는 동안 잠자던 화가로서의 정체성도 되살아났다.

1997년에 결혼 후 처음으로 내 집을 장만했다. 살림하며 아이들을 키우고 화실을 운영하며 그림에 몰두했다. 아파트 입주 뒤 지산동 동막과 마산2리 수촌에 작업실도 마련했다. 그러다가 2003년 우연히 거주하던 아파트를 팔아서 진위면 마산2리 빈 교회 건물을 매입했다. 솜씨 좋은 남편 이태용은 예배당을 개조해서 살림집과 아뜰리에를 만들고 교회 사택을 개조해 갤러리로 꾸몄다. 그렇게 ‘부부화가의 집’이 탄생했다. 이곳을 터전 삼아 개인전 5회, 부부화가전 3회, 각종 초대전과 단체전을 열었다.

김은숙의 화풍은 장식적이지 않으면서도 힘찬 붓질이 특징이다. 하지만 이제 변하고 싶은 욕망이 꿈틀거린다. 중앙대 미대와 교육대학원을 졸업하고 효명중학교 미술 교사로 재직 중인 둘째 아들 택인도 변화의 단초를 제공했다. 한때는 변화의 초점을 인간에게 뒀다. 천인(千人)을 그려 사회와 삶, 삶의 다양성을 표현하려다가 근래 동물이나 조류로 바꿨다. 사실적 그림만을 원하는 대중적 요구에 갇혀 화가의 창의성을 발휘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인터뷰를 마무리하며 지역 화단(畫壇)에 대한 조언을 구했다. 김은숙은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는 화가들의 노력, 대중들의 관심, 지자체의 지원’ 세 가지를 꼽았다. 제자들에게도 화가답게 사람답게 살 것을 가르쳤다. 그게 화가 김은숙의 삶이며 꿈이다.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김해규 평택인문연구소 소장
김해규 평택인문연구소 소장

 

매월 넷째 주에 ‘김해규의 문화살롱’을 싣습니다. 김해규 평택인문연구소 소장이 만난 다양한 문화예술인 인터뷰를 통해 평택 문화를 향한 독자들의 관심과 이해를 높이고 공감대를 이루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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