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반 농민 천민 3계층 3색의 애환 눈에 보이는 듯

평택의 역사와 문화기행 - 2

김 해 규 (한광여고 교사)

진위로 가는 길


상큼한 봄날이면 우리학교 선생님들 중에는 주말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좋은 장소가 없느냐고 물어오는 분들이 많다. 그러면 나는 "어떤 목적으로 가느냐"고 반문한다. 술꾼들 눈에는 좋은 술만 보이고, 서생(書生)의 눈에는 좋은 책만 보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관심사가 어디에 있느냐에 따라 보이는 것이 다르고 느끼는 것이 다를 수밖에 없다. 진위는 주말이면 가족과 함께 답사할 수 있는 좋은 답사장소이다.

진위는 삼국시대부터 구한말까지 진위현(현 평택시)의 읍치(邑治)였고, 1938년까지 진위군의 행정 소재지였던 평택의 고읍(古邑)이다. 일반적으로 옛 고읍에는 볼거리도 많다. 조선시대에는 면(面)지역의 경우 양반들과 농민, 천민들이 주로 살았고, 읍내(邑內)에는 현령을 비롯한 지방 관료층과 아전, 군속, 관에 소속된 천인들(관노, 기생 등), 그리고 상공업에 종사하던 상민층들이 살았다. 그러므로 오랫동안 진위에 살았던 사람들 중에는 상인이나 수공업자 또는 아전의 후예들이 많다고 생각해도 무방하다.

진위 가는 길은 1번 국도를 따라 송탄을 거쳐가는 길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나는 원곡으로 우회하는 옛길을 즐긴다. 이 길은 좀 불편하고 후미졌지만 정말 사람냄새 나고 운치 있는 길이다. 조선시대에는 이 길을 따라 역(驛)과 원(院)이 설치되었다. 원곡을 지나 지문리에는 작고 아름다운 상지저수지와 주변의 카페들 그리고 유서 깊은 해주 최씨 6백년 세거지가 있다. 늦가을 억새풀이 하얀 손을 내밀 때 상지 저수지 주변으로 들어선 풍광 좋은 카페에 앉아 차를 마시면 누구나 저절로 시인의 마음이 된다.

길은 역사와 문화의 보고(寶庫)이다. 경제가 발전하면서 넓고 곧은 길이 구불구불한 옛 길을 삼켜버렸지만 옛 길에는 역사가 있고, 사람들의 삶이 있고, 마을마다 이야기가 있다. 평택주변의 길들도 대로(大路)에 밀려 소로(小路)가 사라지고 있는 추세이지만, 진위로 가는 이 길은 경제적 가치가 적은 관계로 좀처럼 사라지지 않을 전망이다.

고읍(古邑)이 갖춰야 할 조건

진위는 백제와 고구려의 지배를 받던 삼국시대에는 연달부곡, 송촌활달, 부산(釜山)으로 불리다가, 신라 경덕왕 때 지방행정구역명을 중국식으로 바꾸면서 진위(振威)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행정과 문화의 중심지였던 현(懸)의 읍치(邑治)는 일정한 조건을 갖추기 마련이다. 조선시대 읍치(邑治)에는 동헌을 중심으로 좌, 우에 향교와 객사가 있었다. 또한 농사의 신(神)에게 제사를 올리는 사직단과 여단, 성황당, 그리고 조세를 보관하던 사창과 해창도 읍치에 존재하던 기관들이었다. 읍치의 행정관서(공해·公 )는 읍성(邑城)이 감싸고 있다. 읍성이 없으면 산성(山城)이 있었다. 읍성이나 산성이 인위적으로 읍치를 보호하고 구분 짖는 요소라면, 산과 강은 자연적인 요소이다. 농경사회에 살던 우리 선조들은 배산임수(背山臨水) 지형을 최고의 터로 생각해서, 읍치는 대부분 산을 뒤로하고 강을 앞에 두고 있다.

진위현에는 읍성이 없고 부성과 무봉산성(山城)만이 있었다. 대신 산과 강의 보호를 받았다. 진위의 진산은 무봉산이다. 무봉(舞鳳)이란 "봉황이 춤춘다"는 뜻으로, 풍수지리에 의거한 지명이다. 읍치가 있던 봉남리라는 지명도 무봉산의 남쪽마을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봉남리 앞에는 진위천이 흐른다. 진위천은 1872년 진위현 지도에는 "장호천"으로 기록했는데,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개편 때부터 진위천으로 고쳐 불렀다. 고려와 조선시대에는 진위천과 안성천을 중심으로 조운(漕運)이 발달하였으며, 삼남대로가 봉남리 앞의 진위천을 건너 마산리 방면으로 지났기 때문에 사람의 왕래가 잦았다.

읍치(邑治)의 기본 구조는 동헌(東軒), 향교(鄕校), 객사(客舍)를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통상적으로 동헌을 중심으로 좌우에 객사와 향교가 들어서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진위현은 맨 좌측에 동헌이 있었고 우측으로 객사 그 우측에 향교가 있었다. 동헌의 위치는 지금의 진위초등학교 자리와 면사무소 서편으로 일부였으며, 객사는 지금의 동부마을에, 향교는 향교말에 있었다. 그 중 지금까지 온전하게 남아있는 것은 향교뿐이다.

유교문화의 보고(寶庫) - 진위향교

봉남교를 넘어서 진위향교로 들어섰다. 향교 입구 유림회관 앞에는 진위향교 재무이신 정 선생님이 기다리고 계셨다. 정 선생님의 안내로 외삼문을 들어섰다.

진위향교의 건립연대는 정확하지 않다. 조선시대 향교가 건국 초에 설립되었기 때문에 진위향교도 같은 시기에 설립된 것으로 생각할 뿐이다. 조선시대 향교는 관료 예비자 양성과 유교적 윤리의식을 강화하기 위한 지방 양인층의 교육을 담당하였는데, 구조는 서울의 성균관을 본떴다. 그래서 건물배치는 중국과 우리나라 선현의 신위를 모시는 대성전과 강학공간인 명륜당이 건물배치의 중심을 이루고 명륜당 좌우에 기숙사인 재를 두었다. 일반적으로 조선시대 향교의 건물배치는 전학후묘 또는 전묘후학 등으로 구분하는데, 진위향교는 명륜당이 전방에 배치된 전학후묘 형식을 취하고 있다.

건립연대는 오래되었지만 현존하는 건물은 그리 오래된 것이 없다. 위치도 조선 후기에 중건되면서 좀 더 위쪽에 있었던 것을 정 남향으로 내려지었다. 진위향교는 약 30도 정도의 경사면에 축대를 쌓고 건물배치를 하여 전망이 트이고 수려한 외양을 갖췄다. 자연을 거스르지 않는 건축기법은 우리나라 고건축의 미덕이다. 그 중 명륜당이 들어선 자리는 명당 중에 명당이다. 명륜당 대청마루에 앉아 진위천을 내려다보면 한 여름에도 더위를 가시게 한다. 우리나라에서 손꼽히는 영주 부석사의 건물배치에서 느낄 수 있는 아름다움을 진위향교 명륜당에서도 느낄 수 있다.

명륜당을 답사하는 사람에게는 보너스가 하나 있다. 명륜당 앞의 회화나무 두 그루가 그것이다. 이 나무는 250여 년이 넘는 고목으로 여름이면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 준다. 나무가 얼마나 울창한지 녹음이 우거지는 7월이면 향교 건물들이 보이지 않을 정도이다. 회화나무는 고고하고 단아한 자태 때문에 일명 학자나무라고도 불린다. 이 나무에서는 우리나라가 일제에 강점당한 후로 밤마다 울부짖는 소리가 났었는데, 해방 후에는 울음을 그쳤다는 이야기가 전해 온다. 나라를 빼앗긴 진위지방 선비들의 마음에 회화나무에 걸린 바람소리가 울부짖음으로 들렸는지 모르겠지만, 이 나무가 사람들의 마음에 절개와 의기가 굳은 영험한 나무로 인식되고 있었음을 알려주는 대목이다.

향교답사를 끝내고 내려오면서 입구의 향교말(校村)을 지난다. 조선시대의 향교에는 운영경비를 마련하기 위해 상당량의 전답이 지급되었는데, 이 전답들을 경작했던 사람들이 향교말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국가로부터 전세와 역을 면제받는 대신 향교에 전세를 납부해야 했으며, 잦은 부역에 시달렸다. 심지어 조선 후기에는 사림(士林)들의 사적인 노역에도 동원되는 경우도 있어서 고통의 강도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역사에는 빛과 그늘이 있게 마련이지만, 향교에서 공부하던 선비들과 이 마을에 살았던 가난한 농민들 중에서 누가 더 역사 발전에 기여했는지를 생각해 본다. 지식과 재산의 많고 적음이나, 정치 사회적 지위의 높고 낮음이 역사발전에 대한 기여도에서 높고 낮음을 판가름하진 않기 때문이다.

<역사/문화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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