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석기시대부터 억압 가난 수탈 반복된 고난의 땅, 형극의 삶

평택의 역사와 문화 기행 - 1

김 해 규 (한광여고 교사)

민중들의 삶의 터전인 평택


평택은 있는 것보다 "없는 것"이 많은 고장이다. 인물도 없고, 문화도 보잘것없고, 유적이나 유물도 신통치 않다. 지금이야 달라졌지만 생산물도 별로 없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평택은 별 볼일 없는 고장"이라고 말한다. 그러면 전 근대사회에서 "없다"라는 의미는 무엇인가. 무엇이 없다는 말인가. 그것은 가진 자들, 권력자들이 적었으며, 그들의 문화유산이 적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마방목(조선시대 향시합격자 명단)에는 조선시대 전체를 통 털어 향시 합격자가 33명이었으며, 문과방목(문과합격자 명단)에는 9명의 문과 합격자만이 올라있다. 제법 이름 있는 인물도 홍익한, 원균, 이정함, 이정좌, 이태좌 등 극 소수에 불과하다. 이처럼 평택에는 이름난 인물이 적다. 그러므로 그들이 남긴 문화유산도 적을 수밖에 없다. 이 말은 평택은 지배자들이 고장이 아니라 피지배층의 고장이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조선 후기 실학자 이중환의 택리지에도, "평택현과 진위현은 땅이 척박하여서 사람살기에 적합하지 않으나 바다가 가까워 흉년을 나기에는 좋다"라고 쓰여있다. 땅이 기름지지 못하고 바다가 가까워 상놈들이 많은 땅에 양반님네들이 자리잡을 까닥은 없었을 것이다. 평택에는 양반문화 보다 상민, 천민들과 같은 민중들의 문화가 숨쉬고 있다. 그러므로 평택의 역사와 문화를 보는 시각은 민중 지향적이어야 한다. 그것은 높은 것, 화려한 것, 위대한 것에서 멀어져야만 가능하다. 산과 계곡, 들판과 마을, 그리고 사람들의 가슴속에 숨겨진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그들의 삶의 의미를 찾아갈 때 평택의 역사는 진정으로 드러날 수 있다.

역사의 변방 그러나 역사의 중심에 선 땅

평택의 역사는 우리나라에서 사람이 살기 시작한 만큼이나 오래되었다. 구석기 유적으로 판단되는 지역만 해도 포승면 원정리 멍거니유적을 비롯하여 희곡리, 홍원리, 석정리, 안중면 현화리, 대반리, 송담리, 현덕면 운정리, 청북면 용성리 등이 거론되고 있다. 또한 고덕면 방축리, 오성면 양교리, 포승면 원정리 등에서는 신석기 유물과 유적이 발견되었고, 포승면 원정리, 안중면 현화리, 대반리, 청북면 백봉리, 후사리, 토진리, 안화리, 진위면 견산리, 현덕면 기산리에서는 청동기 유적과 유물이 발견되었다. 이와 같은 사실은 평택지방이 해양과 구릉을 배경으로 구석기시대부터 청동기, 철기시대까지 지속적으로 사람이 살았음을 증명한다.

사회와 경제가 급속히 발전하고 정복활동이 활발했던 삼한시대에 평택은 마한의 영역으로 북으로 수원(화성)에 중심을 두었던 모수국과, 남으로 직산에 중심을 두었던 목지국(목지국의 위치는 익산설도 있다)의 변방에 위치하였다. 삼국시대 초기에는 백제의 변방으로 연달부곡, 송촌활달부곡(진위지역), 하팔현(평택지역), 용성현(청북면), 광덕현(현덕면) 등으로 불려졌다. 부곡(部曲)이란 고대, 중세시대의 천민집단으로, 정복지역이나 반란이 일어났던 지역을 대상으로 하는 행정구역이다. 그렇다면 평택은 백제의 새로운 정복지역으로 천민집단화된 지역이었다는 말이 된다. 그러고 보면 평택에는 부곡(部曲)이 유난히도 많다. 고려시대에 들어와서도 안정리와 계양방면에서 반란이 일어났다는 이유로 백랑부곡이 설치되었고, 송탄에는 송장부곡, 고덕, 서탄지방에는 천장부곡이 있었다.

해안선이 복잡하고 농경지가 적었던 평택지방의 사람들은, 고려시대에도 대부분 가난한 농민이나(백정농민), 목장이 있었던 홍원리, 원정리 일대의 사람들은 목부(牧夫)로서 고역을 면치 못했다. 고려 말에는 팽성읍 지역과 청북면 용성리 일대에 왜구가 침입하여 노략질을 하였는데, 관군이 왜구를 막지 못하자 평택의 민중들은 강제 징발되어 왜구격퇴에 동원되었다. 억압과 수탈 속에 살았던 평택의 민중들은 고려 무신정변 이후 전국적 민중항쟁이 전개되는 틈을 타서 민란을 일으켰다. 진위민란 외에도 평택지방은 민란에 자주 연루되었다. 조선시대 이괄의 난 때에는 토호들을 중심으로 호응하는 세력이 있었고, 조선 후기 이인좌의 난이 일어났을 때에도 소론 계통의 사족(士族)들이 적극 호응하였다.

조선시대에 와서도 평택지역은 큰 변화가 없었다. 단지 왕권이 강화되고 중앙집권이 강화됨에 따라 그동안 존재했던 향, 소, 부곡이 없어지고 일반 행정구역인 군, 현제가 시행되었을 뿐이다. 조선시대 평택은 약간의 변동이 있었지만 안성천을 경계로 북쪽은 경기도 진위현, 남쪽은 충청도 평택현, 진위천을 경계로 서쪽은 수원부 지역이었다. 특히 평택현은 8도 350여 개 현 가운데 가장 작은 현이었고 변방에 속하여서 관리들이 부임을 꺼렸던 고장이었다. 그만큼 땅이 척박하고 소득이 없었다는 이야기다. 조선왕조실록에는 "평택현에서는 실농(失農)으로 굶어죽는 경우가 많았는데, 원인은 가뭄과 홍수, 해일 때로는 전염병 때문이었다"고 전한다. 또 실록에 천둥과 우박, 바람, 지진 등에 의한 피해가 자주 기록되고 있는 점으로 미루어 기후조건도 사람살기에 좋지 못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근대에 와서도 평택은 고난의 땅이었다. 외세의 침략이 거세지던 19세기 말 평택은 청일전쟁의 격전지였다. 인천항을 통하여 수원방면으로 남하하던 일본군과 아산만을 통하여 상륙한 청나라 군대가 군문동에 주둔하고 소사벌에서 전투가 있게 되면서 평택의 민중들은 많은 고통을 당해야만 하였다. 본디 전쟁이란 전투에 참여한 군인들보다 군대가 주둔하고 전투가 벌어지는 지역의 민중들이 더 고통을 겪게 마련이다. 특히 외세들의 침략 전쟁에 곡식과 재물을 수탈 당하고, 인력이 징발되어 목숨을 잃었으니 그 설움과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평택에 전해오는 "아산이 깨지나 평택이 무너지나"라는 하소연은, 외세의 침략과 지배층의 수탈로 고통스런 삶을 살았던 평택지방 민중들의 울부짖음이었다.

일제하에서 평택은 경부선 철도역이 가설되면서 교통의 요지로 부상되었다. 현재의 평택시가 새로 건설되었고, 화물과 사람의 왕래가 평택역을 중심으로 이뤄지면서 평택에는 일본인들이 몰려들기 시작하였다. 평택에 들어 온 일본인들은 총독부의 비호를 받으며 토지와 상권을 넓혀갔다. 평택은 수원과 함께 일본인 지주와 일본인 회사지주의 토지가 가장 많은 지역이었으며, 상권도 일본인이 주도했다. 외세가 들어와 생산수단인 농토와 상권을 장악하면서 평택의 민중들은 일본의 지배를 받고, 일본인의 농토와 상점에서 일하며 살아야 했다. 일본인의 거주가 적었던 계양이나, 현덕면 등이라 할지라도 토질에 염기가 많아 하루 세 끼 연명하기도 벅찰 정도였다. 이처럼 평택의 민중들은 질긴 생명력이 아니면 견뎌내기 어려운 조건에서 살아야 했다. 1970년대 초 아산만 방조제가 건설되고 경제발전이 진전되면서 평택에서 가난의 그림자는 많이 사라졌지만, 지금에 이르기까지 민중들은 척박한 환경을 떠나지 않고 이 땅을 지켜낸 것이다. 그들의 생명력은 역사발전의 동력이 되고, 이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살찌운 자양분이었다.

질긴 생명력의 고장

평택의 민중들의 삶 속에서 가난과 수탈은 항상 반복되는 단어였다. 민중들은 고단한 삶 속에서도 삶을 포기하지 않고, 때론 소처럼 우직하게, 때론 울부짖는 맹수처럼 순응과 저항을 반복하며 살아왔다. 임진왜란 때는 임금과 사대부들이 떠난 자리에서 평택의 민중들은 인내와 저항으로서 이 땅을 지켜냈다. 봉건적 수탈과 정치권의 파행이 계속되던 조선 후기에도, 민중들은 농사기술을 발전시키고 감자와 고구마로 연명하며 이 땅을 지키고 발전시켰다. 외세의 침탈을 온 몸으로 당하면서도 굳굳하게 견뎌냈던 것도 민중들이었다. 임진왜란의 최대 격전 중 하나인 소사벌 전투에서 조선-명나라 군대를 도와 전쟁을 승리로 이끈 것도 평택의 민중들이었다. 일제의 식민지배에 저항했던 3.1운동이 평택에서 일어났을 때에도, 수천의 군중을 이끌었던 인물들은 영세 상인들과 농민들이었다.

평택의 역사를 제대로 보려면 민중의 삶을 들여다보라고 권하고 싶다. 땅과 바다에서 노동으로 삶을 일구었던 그들의 이야기, 민중들 사이에 전해오는 민담과 전설, 심지어 사랑방에서 이야기되었던 농담과 육담패설에 담겨진 진실에 귀를 기울일 것을 권한다. 콩을 심으련 콩 나고, 팥을 심으면 팥이 나는 평범한 진리를 믿고 살았던 질긴 그들의 생명력이 역사로 복원될 때 평택의 역사는 올바로 자리메김 될 것이다.

<역사/문화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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