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내길 여덟 번째 이야기

이계은 시민기자평택섶길해설사전 평택시 송탄출장소장
이계은 시민기자
평택섶길해설사
전 평택시 송탄출장소장

‘평택섶길’은 평택의 작은 길들이다. 16개 코스 오백리에 이르는 길은 물안개 피어오르는 호수 곁에, 호젓한 숲에, 고즈넉한 시골 마을에, 유서 깊은 시내 골목과 재래시장에 이야기와 함께 짜여 있다. 섶길 여정에는 문화유산과 기념물, 역사 인물에 대한 테마들이 있다. 공직 은퇴 후 취미생활을 찾던 중 섶길과 인연을 맺게 되었다. 필자는 평택에서 나고 자랐지만 섶길을 처음 걷는 날, 곳곳에 숨어있는 경관이 놀라웠다. 그림 그리기에 약간의 소질이 있어 평택섶길 풍경을 펜화로 그려 간단한 글과 함께 평택시민신문에 한달에 한번 연재한다. 이 글을 통해 많은 분들이 섶길을 함께 걸으며 우리 고장을 더 알게 됨은 물론 건강과 즐거움을 얻는 기회가 되길 소망한다.

 

7월의 뜨거운 햇살 아래 더욱 푸르른 이충분수공원 잔디광장
7월의 뜨거운 햇살 아래 더욱 푸르른 이충분수공원 잔디광장

새로운 의무감으로

이제 33회차, 매번 쫓기듯 마무리하며 다음에는 미리미리 준비하리라 마음먹지만 번번이 임박하여 허둥대게 되니 항상 스트레스였다. “선생님 혹시 신문에 글 쓰시는 분 아니신가요?” 얼마 전 피부과 진료 후 친절한 의사 선생이 내게 묻던 말이다.

지인들로부터 “잘 보고 있다”는 인사는 가끔 듣지만 잘 모르던 이의 알은체 한마디가 괜히 기운을 솟게 한다. 알 수 없는 의무감이랄까...

 

시내길을 마무리하며

차령(車嶺)의 북쪽 비탈면에서 발원한 안성천이 드넓은 소사벌을 적시며 흐르는 그곳, 어떤 거인이 흙덩이 셋을 흘리고 떠난 자리는 매봉·덕동·자란산이다. 시내길은 시청 앞 광장에서 그 동산들을 지나 통복천과 통복시장, 그리고 원평동을 돌아 제자리로 오는 평택의 고도(古都) 탐방로다. 애초 네 편 정도로 계획했던 시내길 이야기는 자료 수집 중 또 다른 얘깃거리들이 감자 캐듯 딸려 나오며 많이 늘어났다. 도움 주신 분들께 감사한 마음이다.

 

평택의 토건 사업가들

평야 지역 평택은 간척과 수리시설이 확충되며 경지정리 사업이 많아진다. 아울러 토건업자도 많이 생겨났다. 70년대와 80년대다.

최찬웅은 1919년생의 결단성 있는 인물이다. 그가 평택군의 간부 공무원으로 있을 때 5.16 정변이 일어나고 그를 비롯한 일부 간부들을 퇴임시킨다. 3년 뒤 회복되어 복직 기회가 왔지만 그는 사양하고 사업의 길을 선택한다. 다른 동료들은 복직하여 부군수까지 오른 사람도 있었다. 그는 소규모 토목사업을 맡아 하던 중 68년 원평동 방학소주 공장 자리에 냉동공장 ‘(주)대한수산진흥’을 맡아 짓는다. 고위인사였던 지인의 몫으로 대일 청구권 자금이 투입된 산업시설이었다. 그는 전무를 맡아 경영에도 참여하면서 토건 사업을 병행한다. 토건 사업은 순조롭게 성장하여 종합건설업체인 ‘제일산업’을 인수하기에 이른다. 그는 대단위 경지정리사업과 평택고 배미교사 신축, 동일공고 신축, 평택역 아케이드 건축, 금암교 건설, 진위천 정비사업, 송탄배수지와 송탄정수장 건설 등 굵직한 공사들을 수주받는다. 최찬웅은 제일산업을 경기·인천지역 굴지의 업체로 키워 83년 큰아들에게 이어주고 은퇴했다.

권달수는 1936년생의 재랭이 사람이다. 그는 토목 전문 건설업체 한림산업을 만들어 경지정리사업 위주의 공사를 많이 한다. 60년대 이윤용이 국회의원일 때 보좌관 경험이 있던 그는 여당의 지역구 부위원장을 맡아 정치활동도 한다. 87년 선거구가 바뀌며 갑(송탄시·평택시), 을(평택군) 지역구로 분구된다. 기존의 위원장이던 다선의 이자헌은 ‘을’ 지역구로 가고 ‘갑’ 지역구는 무주공산(無主空山)이다. 토목사업가 권달수에게 기회가 온 것이다. 경복고 출신 유영조는 권달수의 사업을 돕던 성동초등학교 동창지간이다. 기획력이 있던 그는 권달수에게 ‘갑’ 지역 여당 공천을 신청하도록 조언한다. 결국, 이자헌의 도움으로 여당 공천을 받은 그는 88년 4월 13대 총선에서 같은 재랭이 출신의 원로 정치인 유치송을 이기고 국회의원에 당선된다.

이취우는 1932년생의 용인 송전 사람이다. 그는 젊은 시절 강원도 홍천·양구지역에서 임목 벌채사업을 하던 중 5.16이 나며 사업을 접는다. 63년 송탄 신장동에서 낚시점 ‘용인낚시’를 열어 조용히 살던 그는 돌연 이충동 석산 개발에 뛰어든다. 다섯 사람이 망해나갔던 자리였다. 그의 배짱 있는 결정은 마침 새마을운동이 시작되며 운이 맞아떨어진다. 농촌현대화사업, 농로 포장, 사리 부설 등 각종 새마을 사업으로 골재는 만들기 바쁘게 팔려나갔다. 그는 직접 ‘신흥토건’을 직영하며 79년 서정리 소도읍 기반 시설 공사, 80년 평택 합정동 일원 구획정리사업 기반 공사 등을 맡아 했다. 경리장부가 없어도 될 만큼 기억력이 좋았던 그는 아들 3형제 모두 명문 서울대를 졸업시켰다.

옛날 종합건설 대표였던 모 인사의 말이다. “건설업은 한 시절 잘 나갔지만, 지금의 상황은 건설업계의 위기로 본다.” 인건비와 자재값 상승, 온라인 거래로 상업시설 슬럼화, 건설업체 난립 등 총체적 난국이라는 것이다.

덕동산에 있는 이성열시혜비 영모각. 방학소주의 주인인 이삼규의 부친인 이성열은 1919년 기미년 흉년 때 백미 300석을 풀어 근동 9개 리 빈민들을 구휼했다.
덕동산에 있는 이성열시혜비 영모각. 방학소주의 주인인 이삼규의 부친인 이성열은 1919년 기미년 흉년 때 백미 300석을 풀어 근동 9개 리 빈민들을 구휼했다.

평택의 공작소들

남흥철공소는 KB국민은행 자리 400여 평 터에서 발동기 등 농기계를 만들던 곳이다. 일본인들에게서 기계공작기술을 배운 부친으로부터 기계기술과 철공소를 물려받은 1912년생 김완석이 주인이었다. 기술이 뛰어났던 그는 양수기를 처음 만들어 60년대 초 박정희 정부 때 열린 전국박람회에 출품하였다. 상공부에 납품하는 등 발동기와 양수기는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당시 대동공업(트랙터 등 농기구 생산기업)과 견줄만한 기술 수준이었다. 김완석은 얼음 공장 ‘남흥제빙’도 차려 운영했다. 아들 김한중이 이어 운영하던 철공소는 주변 상업시설이 활성화되자 매각하였다.

태창공업사는 1916년생 최재덕이 1940년에 옛날 땡땡거리 근처에 세운 마차공장이다. 말마차와 우마차가 모든 운송 수단을 담당하던 시절이다. 마차공장에는 목공장비뿐 아니라 선반과 용접시설에 풀무시설까지 갖추어져 있다. 바퀴 굴렁쇠와 연결 볼트 등을 만드는 공정들 때문이다. 마차공장 근처에는 말 편자 만드는 대장간들이 생겨났다. 공장 옆의 박영식이 주인인 박 대장 집이 그중 잘되었다. 자동차가 늘며 마차 수요가 줄자 공장은 72년 문을 닫았다.

 

원평동을 거쳐 원점으로 되돌아가며

원평동은 옛날 군청·경찰서·세무서 등이 있었던 소재지 동네다. 동사무소 주관으로 옛날의 터에 동판을 박아 표시를 해놓았다.

조선호텔은 지금 평택초등학교 자리에 있었던 일본인 소유의 호텔이었다. 적산(敵産)이었던 건물은 한동안 남아있었다. 6.25동란 중 평택중학교 교실이 불타자 학생들은 그곳에서 2년간 공부했다. 당시 중학생이던 교장 출신 이갑종(88)의 회고다. 한번은 상이용사들이 임시 교사에 찾아와 행패를 부렸다. 유도 5단의 영어 선생 최병익은 110kg이 넘는 거구로 그들을 막아서며 물러가게 했다. 그 후 그들이 다시 찾아오는 일은 없었다. 같은 반의 김병룡은 나이가 많고 어깨가 떡 벌어진 친구였다. 어느 날 수영을 한다며 갯고랑(지금의 안성천)에 들어가 익사하는 일도 있었다.

방학소주는 상업조합 터에 지은 굴뚝이 높은 건물이었다. 1912년생의 주인 이삼규는 주변에 덕을 많이 베푼 사람이다. ‘덕동산’ 아래 길가에는 작은 비각이 있다. 1919년 기미년 흉년 때 백미 300석을 풀어 근동 9개 리 빈민들을 구휼한 이성열에 대한 시혜비(施惠碑)다. 이성열은 이삼규의 부친이다. 부전자전이었다. 이삼규는 안타깝게도 지인의 보증을 선 것이 잘못되어 사업과 살림이 크게 기울었다.

통미는 신평동 사무소 앞 동네다. 옛날 통미 앞의 들 가운데에 작은 동산이 있었다. 지금은 택지개발로 없어졌지만 마치 됫박을 엎어 놓은 듯해 됫박산으로 불리웠다. 신평동 사무소 뒤쪽이었다. 내 글에 관심을 갖는 한 분이 ‘우리땅 이야기’라는 글 한 편을 보내준다. 내용은 전국적으로 벌판 가운데에 똥을 눈 듯 ‘볼록한 동산이 있는 곳’은 흔히 ‘똥메’, ‘똥뫼’, ‘통미’의 이름이 있더란 얘기다. 필연 우리 동네 ‘통미’도 됫박산 ‘똥뫼’에서 유래됐을 터다. 옛사람들의 해학이 깃든 작명 지혜에 웃음 지어진다.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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