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해규의 문화살롱
절대음감을 가진 아이
피아니스트 지해원은 강원도 문막에서 태어났다. 한두 해 지나서 서울로 이사했고 또 한두 해 뒤에는 전북 익산과 천안으로 이사해서 10여 년을 살았다. 평택에는 중학교 1학년 때 이사왔다. 평택은 부평초 같았던 어린 시절의 종착지였다. 고향이라는 정체성을 선물했고 사랑하는 친구들과의 추억을 갖게 했다. 그래서 고향이 어디냐고 물으면 선뜻 ‘평택’이라고 대답한다.
어머니는 유치원 교사였다. 유아교육과에서 피아노를 배워 결혼 후에는 피아노도 구입했고 유치원 교사도 했으며 나중에는 피아노학원도 운영했다. 지해원은 어릴 때부터 어머니의 피아노 소리를 듣고 자랐다. 한두 살에 불과했던 어린아이가 피아노 소리에 반응하는 것을 본 어머니는 4살짜리 아이를 피아노 앞에 앉혔다. 지해원은 하루 두 세 시간씩 연습했다. 오랜 시간 연습해도 싫증 내거나 투정 부리지 않았다. 지도했던 선생님들도 ‘절대음감’이라며 놀라워했다. 어머니는 유명 피아니스트를 모셔다가 조언과 교습도 받게 했다.
어릴 때부터 놀라운 재능을 보였지만 부모님은 반드시 음악가로 키우겠다는 생각까지는 하지 않았다. 중학교에 진학해서도 취미반에서 교습받았다. 그러다 보니 입시반 아이들과 실력 격차가 커졌다. 초등학교 때는 수시로 입상했던 콩쿠르에서도 탈락했다. 마침 1학년 1학기 기말고사에서 전교 2등을 하면서 부모님은 음악교육을 중단시켰다. 공부만으로도 충분히 잘 해낼 수 있겠다고 판단했다. 지해원은 특히 수학을 잘했다. 스스로의 힘으로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과정이 흥미로웠다. 때로는 학급 아이들로 학습동아리를 만들어서 직접 가르치기까지 했다.
서울예고에 입학한 수재
지해원은 공부가 재밌었다. 성적도 항상 전교 15등 이상을 유지했다. 피아니스트를 포기한 것은 아쉬웠지만 우수한 성적이 이를 상쇄해줬다. 방향 전환은 우연한 계기에 찾아왔다. 중학교 2학년 때 어머니는 친구 아들이 실기 3등이라는 우수한 성적으로 서울예술고등학교에 입학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이 사건은 ‘아들을 피아니스트로 만들고 싶다’라는 욕망을 다시 끓어오르게 했다. 어머니는 친구로부터 피아니스트 한동일 선생을 소개받아 당장 레슨에 돌입했다. 지해원은 전철을 타고 2시간씩 서울을 오가며 레슨을 받았다. 레슨을 시작한 지 불과 3개월 뒤에는 음악신문사 주최 콩쿠르에서 전체 대상도 수상했다. 당시 심사위원장은 ‘향후 음악계를 이끌어 나갈 인재’라며 격려했다. 이때의 입상과 격려는 지해원에게 ‘반드시 서울예고에 진학하여 훌륭한 음악가가 되겠다’는 꿈을 갖게 했다.
본격적인 입시 레슨을 받은 지 불과 1년 반 만에 서울예술고등학교에 합격했다. 지도했던 한동일 선생님도 놀랐고 부모님과 주변 사람들도 놀랐다. 서울예고는 청량리의 할아버지 댁에서 통학했다. 학교가 평창동에 있어 버스를 세 번이나 갈아타며 다녀야 하는 수고로움이 있었지만 견딜만했다.
고등학교 시절은 시련과 좌절의 연속이었다. 학교에 입학하니 새로운 세계가 펼쳐졌다. 평택에서는 피아노에서도 1등이었고 공부도 상위권이었지만 전국의 수재들만 모인 서울예고에서는 평범한 학생에 불과했다. 입학 후 첫 시험을 치렀는데 성적은 앞섰지만 실기는 뒤에서 다섯 번째였다. 그래도 좌절하지 않았다. 열심히 연습만 하면 얼마든지 따라잡을 수 있으리라 믿었다. 하지만 기대가 컸던 부모님, 특히 어머니의 입장은 달랐다. 어머니는 응원보다 따가운 시선으로 질책했다. 음악콩쿠르에서도 몇 차례 탈락하면서 질책이 두려워 출전을 중단했다. 그럴수록 실기보다 성적에 집착했다. 공부에서만큼은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방황의 시기에 다시 만난 피아노
대학입학수학능력시험에서 언어·외국어·사회과목 평균 2등급을 받았다. 서울대학교에 지원했지만 탈락했다. 수능성적은 우수했지만 피아노 실기에서 기본기 부족이 발목을 잡았다. 대학입시 실패 후 잠시 방황했다. 어머니는 충분히 서울대학교에 입학할만한 재능이라며 재수를 권했다.
재수 생활은 힘들고 고통스러웠다. 무엇보다 좋아하는 음악이 아닌 입시 곡들을 반복적으로 연습한다는 사실이 고통스럽고 힘들었다. 재수하고도 서울대학교 입시에 실패하면서 회의감이 밀려들었다. 가족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다시 도전할 것을 요구했지만 지해원은 국민대학교를 선택했다. 당시 입시는 서울대를 비롯해 주요 7개 대학은 과제곡이 서로 달라서 중복지원 할 수 없었지만 국민대학교는 자유곡이어서 지원이 가능했다. 지해원은 국민대학에 입학하면서 ‘서울대가 아니어도 충분히 음악가로 성공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입증하겠다고 스스로 다짐했다. 부모님께도 혼자서도 잘 해낼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드리고 싶었다. 그래서 고시원에서 생활하며 피아노학원 강사로, 성악·관현악 반주자로 일하면서 힘든 대학 생활을 했다. 그렇게 1년을 생활하자 몸과 마음이 지쳤다. 더 이상 버티기 힘들어 부모님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어머니는 재수와 유학이라는 두 갈래 선택지를 제시했다. 지해원은 독일 유학을 선택했다.
독일은 대학이 평준화된 데다 학비가 저렴하고 학생에 대한 혜택이 많았다. 근래에는 미국 학제까지 도입해서 실용적 측면도 강화되었다. 지해원은 프란츠 리스트 바이마르 국립 음악대학에 지원했다. 바이마르는 소도시였지만 바흐·리스트 같은 음악가, 괴테·실러 같은 대문호를 배출했으며 산업디자인의 대명사 바우하우스가 있는 유서 깊은 도시였다. 독일에서는 4년을 머물렀다. 어렵다고 하는 언어코스도 6개월을 독학하여 B2까지 취득했다. 이때 배운 독일어로 통역 아르바이트도 했다. 대부분 음악 관련 티칭 통역이었다. 바이마르음악대학에서는 피터 바스에게 사사했다. 피터 바스는 바흐·모차르트·베토벤 등 고전음악의 스페셜리스트였다. 지도방식도 꼼꼼하고 철저했다. 피터 바스의 지도는 힘들고 고됐지만 연주자로의 재능을 다듬고 고전음악에 대한 이해 폭을 넓히는 계기가 되었다. 지해원은 지금도 바흐·모차르트·베토벤·라흐마니노프의 고전음악을 연주할 때가 가장 즐겁다.
피아노로 세상에 희망을 주고 싶어
다시 평택으로 2016년 귀국을 결심했다. 아직 더 배워야 했지만 상황이 학업을 계속할 수 없게 했다. 귀국하는 발걸음은 무거웠다. 가슴 한구석에는 좌절감도 들었다. 음악을 포기하고 외국어대학교에 진학해서 통역사로 일할 생각도 했다. 그러던 차에 플룻을 전공했던 친구가 평택에서 피아노 레슨을 해 보라고 제안했다. 거절할 여력이 없었다. 그렇게 다시 평택으로 내려왔다.
친구의 소개로 학생을 소개받았다. 학부모에게는 자신의 처지를 상세하게 설명했다. 세 번째 레슨을 마치자 학부모는 대학입시까지 지도해달라고 요청했다. 비록 적은 인원이었지만 최선을 다했다. 열정과 성실성에 감동했던지 학부모는 다른 학생도 소개해줬다. 하지만 학생 두세 명을 지도해서는 생활비를 벌기도 힘들었다. 그래서 음악학원 아르바이트도 하고 독일어 과외수업도 했다. 독일에서의 티칭 통역과 중학교 때의 경험이 큰 도움이 됐다. 학생지도는 새로운 보람을 주었다. 세계적인 피아니스트가 되는 것만이 최고의 삶, 행복한 삶을 보장하는 것이 아니라는 깨달음도 얻었다. 이제는 홀로 설 수 있다는 자신감에 ‘어머니를 만족시키려는 삶보다 스스로 원하는 삶을 살겠다’고 선언했다.
처음에는 모든 것이 막막했다. 연주 활동을 꾸준히 하는 것도 아니었고 레슨이나 아르바이트로 생활이 보장되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다가 우연히 기회가 찾아왔다. 레슨 받던 학생이 선화예술고등학교 진학을 희망했다. 실력이 출중하지 않아서 불가능할 거라는 의견이 많았다. 지해원은 학생과 면담하면서 ‘최선을 다해 자신의 벽을 깰 자신이 있냐’고 물었다. 학생은 학교를 자퇴하고 연습에만 매진하는 열정을 보였다. 결과 1년 만에 학생콩쿠르에서도 입상하고 예술고등학교에도 합격했다. 그 뒤로 학생 수가 급증했다. 티칭 실력을 인정받으면서 실력 있는 학생들도 몰려들었다. 2023년에는 ‘쇼팽 애비뉴 국제콩쿠르’에서 지도자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2019년 평택시청 앞에 ‘제이뮤직스튜디오’를 열었다. ‘제이뮤직스튜디오’는 지해원의 음악 활동 공간이면서 지역 음악가들의 연습실이었으며, 마땅한 커뮤니티가 없었던 청년 음악가들에게는 소통과 교류·협력할 수 있는 오아시스 같은 공간이 되었다.
지해원은 우리나라 음악교육의 문제점을 ‘성급한 욕망’에서 찾는다. 어릴 때부터 ‘영재’를 만들고 싶은 조급함, ‘조기에 성공하고 싶은 열망’이 아이들의 재능을 망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기초 튼튼’을 가장 중요시한다. 이 같은 방식은 때때로 학부모들의 반발을 샀다. 경제적 안정을 위해서는 학부모들의 요구를 수용해야 했지만 지해원은 자신의 교육철학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입시 레슨에 지쳐 있던 어느 날 우연히 보험설계사 자격시험에 응시했다. 그렇게 보험업을 겸업하면서 새로운 깨달음을 얻었다. 지금껏 자신의 의사 표현과 소통이 서툴렀다는 깨달음이었다. 새로운 깨달음은 마음의 고통과 갈등을 단번에 해소했다. 지해원은 문제점을 하나씩 개선해나갔다. 교육 방식도 개선했을 뿐 아니라 학생·학부모와의 소통, 피아니스트로서 관객과의 소통도 원활해졌다.
지난해 지해원은 연주자로도 다시 무대에 섰다. 작은 무대였지만 관객들의 환호와 박수 소리에 잠자고 있던 연주자의 정체성과 본능이 되살아났다. 중단했던 학업도 다시 시작했다. 음악실을 운영하면서 평택지역에도 재능과 실력을 겸비한 연주자들이 많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 지해원은 앞으로 이들과 연대하여 ‘희망을 주는 음악’을 하고 싶다. 평택시민의 행복증진에 음악으로 기여하고 싶다. 국악이나 다른 장르와의 협연도 구상한다. 멋진 무대 위에서 그의 모습을 볼 날도 멀지 않다.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