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내길 일곱 번째 이야기, 평택의 연탄공장들

이계은 전문기자 평택섶길해설사전 평택시 송탄출장소장
이계은 전문기자
평택섶길해설사전
평택시 송탄출장소장

평택섶길’은 평택의 작은 길들이다. 16개 코스 오백리에 이르는 길은 물안개 피어오르는 호수 곁에, 호젓한 숲에, 고즈넉한 시골 마을에, 유서 깊은 시내 골목과 재래시장에 이야기와 함께 짜여 있다. 섶길 여정에는 문화유산과 기념물, 역사 인물에 대한 테마들이 있다. 공직 은퇴 후 취미생활을 찾던 중 섶길과 인연을 맺게 되었다. 필자는 평택에서 나고 자랐지만 섶길을 처음 걷는 날, 곳곳에 숨어있는 경관이 놀라웠다. 그림 그리기에 약간의 소질이 있어 평택섶길 풍경을 펜화로 그려 간단한 글과 함께 평택시민신문에 한달에 한번 연재한다. 이 글을 통해 많은 분들이 섶길을 함께 걸으며 우리 고장을 더 알게 됨은 물론 건강과 즐거움을 얻는 기회가 되길 소망한다.

 

연탄은 일제강점기 일본인 사회에서 만들어 쓰던 중 해방 후 1947년 국내자본으로 대구의 대성산업에서 본격 생산을 시작한다. 1956년 석탄 철도가 개통되자 각 지역별로 연탄공장이 생겨났다. 산림녹화 5개년 계획과 새마을운동으로 시골까지 연탄을 쓰게 되며 수요는 폭발적으로 늘어난다. 연탄이 딸리자 박정희 대통령은 석탄생산과 수송에 차질이 없도록 특별지시를 하고 연탄 철야 생산을 위해 통금을 면제시켰다. 연탄공장은 화물철도 옆에 있었다. 무연탄 하역과 야적의 편의 때문이다. 평택엔 세 곳의 연탄공장이 있었다. 변두리에 발동기를 놓고 소규모로 찍는 곳들도 있었지만 영세한 미인가 시설이다. 구역제가 있어 다른 곳의 연탄은 못 들어왔다. 세 공장의 주인들은 탄광을 가지고 있거나 석탄공사에 줄이 있었던 서울 출신 자본가들이었다. 주인들은 먼지 속에서 일하는 직원들에게 자주 고기를 먹였다. 엉터리갈비와 고향갈비는 그들의 단골식당이었다. 25공탄 한 장의 표준열량은 3.6kg에 4600칼로리다. 하지만 평상시엔 좀 모자라게 나온다. 가끔 서울서 암행 검사반이 오지만 그들은 미리 알고 있다. 그들은 검사반을 하늘처럼 받들어 모신다. 연탄공장은 아파트가 늘고 기름보일러와 LPG(액화석유가스)가 일상화되자 사양길에 들어서 80년대 말과 90년대 초 무렵 대부분 없어졌다.

‘대동연탄’은 옛날 땡땡거리 원평동 철로변의 천여 평 부지에 있었다. 석탄공사에 인맥이 있었던 주인 이용우는 무연탄을 원활하고 저렴하게 수급했다. 함백, 장성, 철암 등지의 석탄공사 생산량은 전체의 60%가 넘었다. 50년대 후반 평택에서 제일 먼저 시작했던 공장이었다. 생산시설이 크고 거래처도 제일 많았다.

사업이 번창하던 시절 주인 이용우는 집권당의 후원활동을 하는 등 지역사회 활동을 하기도 했다.

‘광신연탄’은 롯데캐슬아파트 철도 건너편에 있었다. 이천여 평 부지에 야적장까지 전용 철로가 연결되어 있었던 큰 공장이었다. 태백에 탄광을 가지고 있던 강제희가 부인 김순송 명의로 공장을 열었다. 현장 운영은 44년생의 처남 김인근에게 맡겼다. 당시 돈으로 수백만원 하던 독일제 품질측정 기계를 사놓고 활용하던 공장은 80년대 후반까지 운영했다.

‘동보연탄’은 평택역 오른쪽의 평택3리 철로변에서 1966년에 시작했다. 6.25 때 폭탄이 떨어져 움푹 파인 자리가 옆에 있었다. 1915년생의 이필용은 보령지구에서도 큰 동보탄광과 세화탄광의 광산주다. 하청 업체만도 스무 곳이 넘었다. 하청업체로부터 생산량의 10% 정도를 받았고 수금 날은 묵직한 돈가방들이 한남동의 이필용 집으로 모였다. 그는 1938년생 아들 이덕형에게 연탄공장을 맡긴다. 이덕형은 성남고 동기동창인 친구 전석진과 함께 공장을 운영했다.

평택호 현충탑
평택호 현충탑

TV가 귀하던 시절 일이 끝난 저녁이면 공장마당에 TV를 내놓아 동네 사람이 보게 했다. 운동경기가 있거나 인기 드라마 시간이면 사람들이 빼곡했다.

공장 주변은 유곽으로 변해갔고 포주들은 아가씨들을 앞세워 분진과 소음을 항의한다. 급기야는 왕회장 이필용의 서울 자택까지 찾아가 옷을 벗는 등 소란을 피우자 78년 공장을 넘겨 손을 뗀다. 그때 전석진은 광신연탄으로 자리를 옮긴다. 보령 출신의 새 주인 성원경은 상호를 일자표연탄으로 바꿔 80년대 중반까지 운영했다. 함께 있던 근로자들은 보령의 세화연탄으로 이직했다. 이필용의 공장이었다.

‘연탄판매점’은 안중·평택·서정리·송탄을 합해 이십여 곳 있었다. 인가제였던 판매점은 위치에 따라 가격이 다르다. 공장에서 실어다 주는 거리에 따라 운임이 붙기 때문이다. 구역을 독점한 판매점은 매점매석으로 비싸게 받기도 한다. 그러니 수요가 큰 개인은 공장을 상대로 직거래를 한다. 현금을 들고 와 실어 가니 공장은 마다할 이유가 없다. 공장 앞에 줄지어 선 개인들의 우마차와 말마차 행렬은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결국 판매점의 아우성으로 개인당 100장으로 제한하기도 했다. 손수레 한 대에 100장이 실렸다.

1922년생 임종태는 직장 은퇴 후 새시장에서 연탄가게를 연다. 몸은 고단했지만 장사는 잘되어 경찰서 앞 삼성생명 자리에 창고를 사놓기도 했다. 나중에 창고와 박애병원 뒤 두 채의 집을 팔아 아파트로 옮긴다. 그 당시는 썰렁했던 떠난 자리는 지금 젊은이들이 북적이는 명동거리가 되어 있다. 누구나 앞일은 모르니 항상 미련은 남는다.

 

평택의 요정(料亭)들

요정은 50~60년 전 한복을 차려입은 고운 여성들이 시중을 들던 고급 요릿집이다. 그 시절 사업상 큰 손님을 접대하거나 돈 있는 한량(閑良)들이 즐겨 찾던 곳이다.

‘대연관’은 평택역 앞 서울면옥 옆에 있었다. 60~70년대 평택에서도 크고 고급스런 집이었다. 여자 주인 김일제는 손님 대하는 수단이 좋고 예쁜 여종업원을 뽑아 두는 것으로 소문나 있었다. 그 집에는 기관장들, 사업가들과 부잣집 아들, 건달들도 드나들었다. 그곳을 자주 찾던 한 사업가는 여종업원과 정분이 나며 아이가 생기자 작은 부인으로 들여앉히기도 했다. 하루는 공화당 당 의장이던 김종필이 평택을 방문하여 그곳에서 회합을 갖는다. 당직자들을 격려하기 위함이었는데 수행원 한 명이 소매치기를 당한다. 경찰은 비상이 걸렸다. 근처의 소매치기 전과자들을 긴급수배하여 결국 잡아내었고 사건은 가까스로 수습되었다.

‘개성옥’은 통복시장 코스모스백화점과 쌍방울메리야스 사이에 있었던 전용악단이 있는 큰 요정이었다. 주인은 왕마담으로 불렸던 덩치가 큰 여인이다. 그녀는 400cc 외제오토바이를 타며 앞에 걸리적거리는 사람을 발로 밀어내는 괄괄한 여장부다. 반면에 꼭 근처에서 물건을 사는 등 시장 상인들과는 친하게 지냈고 손님 관리와 종업원 관리도 잘했다. 큰 부자였던 도축장 사장 김병안 등이 단골이었다.

‘금강’은 통복시장 근처의 제천옥 자리를 개화식당 왕본동에게 처분하고 JC공원 앞에 현대식 인테리어로 차린 고급스럽고 큰 요정이었다.

‘우래옥’은 고향주점 옆에 있었다. 군문동 천석꾼의 아들이었던 1936년생 김종선은 서울서 스테인리스 밥그릇 공장을 하다가 망하고 내려온다. 의리가 있었던 친구들은 우래옥을 차리는 데 도움을 준다. 고급스럽진 않지만 보통 사람들이 즐겨 찾는 수수한 집이었다. 단골이 되면 외상거래도 했다. 장사가 잘되어 다시 일어선 김종선은 나중에 삼양주유소 옆 건너편에 빌딩을 짓기도 했다.

덕동산찔레꽃
덕동산찔레꽃

찔레꽃이 피면

시아버지가 며느리를 데리고 아들 면회를 간다. 결혼 두 달여 만에 군에 간 아들이다. 저녁을 먹이고 여인숙에 아들 내외를 재운다. 그리고 네 달 뒤 면장과 정복 입은 군인 두 명이 찾아와 흰보자기에 싼 작은 단지를 내민다. ‘남편께서 전사하셨습니다’ 집 앞 도랑에는 찔레꽃이 피어 있었다. 그녀의 뱃속에 자라나는 작은 생명, 아들이었다. 아들이 커가는 모습은 그의 삶을 지탱시켰다. 아들만을 바라보며, 아들의 봉양으로 살아온 90 중반의 세월 지금도 찔레꽃이 필 때면 그의 가슴은 저려온다.

평택에는 1979위의 호국영령이 3개 현충탑에 모셔져 있다(평택호 1251위, 덕동산 628위, 송탄 둥구재 100위).

둥구재현충탑
둥구재현충탑

평택호 현충탑 하단에 새겨진 글귀가 눈길을 끈다.

 

오늘도 저 햇빛 속에

그대들 꽃다운 모습 보이고

지금도 바람결 속에

그대들 고운 음성 들리네

짧은 일생을 영원한 조국에 바쳤기에

가고도 가지 않은 그대들이라

조국의 산천과 역사와 함께 길이 살리라

정든 조국 정든 고향

여기서 그대들 길이 살리라

뒷산엔 밤꽃이 피었다. 어디선가 뻐꾸기 소리가 들린다.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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