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해규의 문화살롱 16
스페인 출신의 화가 피카소의 미덕은 반파시즘 평화주의적 삶이다. 프랑코의 민간인 학살을 고발한 ‘게르니카’로 파시즘의 광기를 고발했고, 평생을 그림을 무기로 반 자유, 반 평등, 반인권에 맞서 싸웠다. 작가들이 갖춰야 할 가장 큰 미덕은 문제의식, 비판의식이다. 황혜인은 평택 출신의 사진가다. 그가 앵글로 담아낸 사진들은 문제의식으로 가득하다.
평택은 성장의 뿌리
황혜인의 성장 과정은 복잡하다. 태어난 곳은 부모님의 고향 충남 예산인데 생후 얼마 되지 않아서 평택으로 이주했다. 유치원은 평택에서 다녔지만 초등학교 입학 후에는 서울로 이주했으며 4학년 때 다시 평택으로 내려왔다.
그가 자란 고덕면 두릉2리 계루지에는 외가가 있었다. 안재홍 선생 옛집이 있어서 유명했던 계루지는 고덕국제신도시 개발로 사라졌다. 외할머니는 종덕초등학교 앞에서 ‘종덕상회’라는 구멍가게를 운영했다. 그래서 황혜인은 ‘종덕상회’집 손녀로 통했다. 어릴 때는 무척 활동적이었다. 동네 친구들과 종일 뛰어놀았다. 자연을 관찰하고 변화에 민감한 감수성도 지녔다.
중학교 2학년 때는 혹독한 사춘기를 겪었다. 학급 반장을 했을 만큼 공부도 잘하고 리더십도 있었지만 모든 것에 부정적이고 반항했다. 반장은 수업 시작 전 교실을 정돈하고 선생님께 인사도 해야 했지만 엎드려 자는척하기도 했다. 황혜인이 사춘기 시절을 무난하게 넘길 수 있었던 것은 부모님과 담임 선생님의 배려 때문이다. 부모님은 참고 인내하며 기다려줬고 선생님은 끝까지 감싸고 보듬었다. 그것이 감사하다.
중3이 되자 사춘기 증세가 한순간에 사라졌다. 스스로 생각해도 참 신기했다. 고등학교 시절에도 뚜렷한 삶의 목표가 없었다. 사실 10대 후반의 청소년에게 삶의 목표를 뚜렷하게 가지라고 하는 것은 무리다. 황혜인은 그저 ‘좋아하는 것을 하면서 살자’라는 막연한 생각을 했다. 고등학교 시절 영화 보고 음악 듣는 것을 좋아했다. 자연을 관찰하는 것도 좋았다. 대학진학을 앞뒀을 때 구체적인 진로가 필요했다. 속으로는 영화감독이나 뮤직비디오 감독이 되고 싶었지만 정작 대학은 성적에 따라 중앙대학교 무역학과로 진학했다.
대학에 진학해서 하고 싶은 걸 찾아
무역학과에 진학해서야 이것이 내 길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 달쯤 다니다가 휴학해버렸다. 휴학하고 2년 동안 계루지에서 지냈다. 자전거 타고, 개미 관찰하고, 영화 보고, 노래를 듣는 것이 일상이었다. 황혜인은 이 시기를 제2의 사춘기라고 표현했다. 사진작가 황혜인을 만든 진정한 성장통이었다.
대학교에 복학하면서 사진학과로 전과했다. 비록 전과는 했지만 황혜인은 사진기를 잡아본 적이 없는 햇내기였다. 그래도 개의치 않았다. 지금도 그렇지만 사진은 테크닉보다 예술적 개념이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 같은 철학을 갖게 된 것은 ‘기초사진실기’라는 강좌가 영향을 끼쳤다. 교수님은 사진에 대한 고정관념을 극복하라고 주문했다. 사진은 답을 찾는 과정이지 정답은 없다고 가르쳤다. 사진작가로서의 철학과 방향성이 이때 형성됐다.
전과 후 이듬해부터 인턴 생활을 시작했다. 덕분에 남들보다 오랫동안 학교에 다녔지만 강의실보다 현장에서 배운 것이 더 많았다. <PARK HERE>라는 용산미군기지 관련 전시, <워터스케이프>, <준비족 연대기>같은 전시 코디네이터로 다양한 프로젝트에 참여하면서 세상을 보는 눈, 비판의식과 문제의식도 키웠다.
다양한 프로젝트에 참여하며 성장
2017년에 개최된 <2017 서울도시건축비엔날레 주제전 식량도시(돈의문 박물관마을)>부터는 작가로 참여했다. <식량도시>는 세계적으로 기후위기에 대한 문제의식이 부족했던 시기 미래의 기후재난을 연상하며 기획한 전시회였다. 황혜인은 자연재해와 기후변화에서 사람들의 이야기를 카메라에 담으려고 했다. 우리가 먹고 마시는 것에 자본주의적 욕망이 얼마나 가득한지, 그것으로 인해 지구가 얼마나 몸살을 앓는지를 알게 하는 기획이라고 말할 수 있다.
2018년부터 용산미군기지 이전에 따른 아카이브사업으로 미군기지 내 일상을 카메라에 담는 기록작업에 작가로 참여했다. 이 작업의 결과물은 용산 전쟁기념관에서 <Yongsan, The Unreachable Land, 2017-2018>라는 이름으로 전시되었다.
황혜인은 2019년 대학을 졸업하면서부터 개인 작업을 본격화했다. 작가로서, 큐레이터로서 자기 정체성도 확고히 했다. 이 시기에 <엉뚱한 사진관: 리메인드 인 서울(2019)>, <다중세계를 향해 작동하는 안테나(2019)>, <멸종도감(2019)>, <리틀아메리카(2019)>, <PLAN B 2020-서울을 바꾸는 예술(2019)>, <우리동네 예술 프로젝트-당신의 수원은 어디입니까(2019)>, <공공예술프로젝트-기후시민 3.5(2020)>, <공공예술프로젝드 S-CUBE(2020)>, <평택의 얼굴들(2020)>, <미래학교 기후를 위한 런치케어(2021)>, <작가의 시선-평택아카이브전(2022)>, <GREEN LIGHT(2023)>, <도착예정시간 ETA(2024)>, <마을의 귀환(2024)> 등 매우 다양한 프로젝트에서 작가와 기획자로 활동했다.
2019년 <멸종도감>이라는 전시는 기억에 남는다. 기후위기에 대한 문제의식을 배경으로 기획한 전시였다. 황혜인은 이 전시에서 도시가 확장되면서 쉽게 사라져버리는 일상적인 것들을 수집 전시하여 경각심을 일깨우려 했다. 같은 해 경기문화재단 지원사업으로 추진했던 미군기지 아카이브사업 <리틀아메리카> 프로젝트도 의미 있었다. 이 전시를 통해 향후 미군기지 아카이브 사업을 지속할 필요성을 느꼈다. 미군기지 이전으로 마을의 풍경과 주민들의 일상이 어떻게 변하는지를 살펴야겠다고 생각했다. 황혜인은 지금도 사회변화의 흐름 속에서 각 개인의 일상이 어떻게 변하는지에 관심 많다. 앞으로도 이러한 기조의 작업은 계속될 예정이다.
사진작가로 평택에서 작업하는 의미
황혜인에게 평택은 일상적 공간이었다. 성장기 추억의 장소이고 부모님이 계시는 곳이었을 뿐이다. 그러다 보니 ‘평택’을 객관적으로 볼 기회가 없었다. 그러다가 2018년경 서울의 신논현역에서 평택미군기지 주변의 렌탈하우스 광고를 보게 되었다. ‘이게 뭐지’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내려와 본 평택은 한마디로 난리가 나 있었다. 용산미군기지가 이전하고 모르는 건물, 낮선 도로가 생겼으며 공장과 도시가 크게 확장되고 있었다. 변하지 않을 것 같았던 미군기지 주변 풍경도 급변하고 있었다.
2016년부터 팽성읍 안정리 주변 기록작업을 시작했다. 2018~2019년 부터는 서울과 평택을 오가며 본격적으로 작업에 참여했다. 2020년에는 불나방기획단에서 기획한 <S-CUBE 프로젝트>에 참가했다. 신장동을 대상으로 주민 인터뷰와 사진 작업을 병행했다. 황혜인에게 신장동은 중·고등학교를 다녔던 아주 익숙한 공간이었다. 하지만 프로젝트를 수행하면서 ‘안다’고 생각했던 공간이 실제로는 ‘아무것도 모르는 공간’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익숙한 장소, 익숙한 풍경, 익숙한 사람들을 새롭게 인식하는 계기가 되었다.
평택을 방문하는 빈도가 늘면서 본격적으로 ‘평택을 주제로 작업’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미군기지 이전에 따라 마을과 사람들의 일상이 어떻게 변하는지, 개인의 일상도 시간의 흐름에 따라 어떻게 변해가는지를 기록하고 싶었다.
평택을 중심으로 활동하면서부터는 평택시문화재단과 연대하여 다양한 프로젝트를 수행했다. 2021년에는 평택시문화재단 청년예술인지원사업 <평택의 얼굴들> 프로젝트를 수행했다. 2024년에는 안정리예술인광장에서 <평택오-다> 프로젝트로 기후위기에 경종을 울렸다. 2024년에는 신장동 국제중앙시장 근처에 동료작가와 대안문화공간 ‘샐리’를 열었다. 샐리는 창작과 전시를 동시에 수행하는 대안공간이다. 황혜인은 샐리를 중심으로 최대한 기지촌 주변의 다양한 사람을 만나려고 한다.
중심 활동공간을 평택에 두면서 평택시 문화예술이 엄청나게 발전하는 것을 본다. 평택시문화재단의 청년예술인지원사업이 젊은 예술가들에게는 엄청난 기회를 제공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질적으로 수준 높은 문화예술이 발전하려면 평택시의 지원과 함께 예술가들도 분발이 필요하다. 답을 정해 놓고 하는 작업, 형식을 우선하는 작업에서 탈피하여 문제의식을 키워야 수준 높은 예술로 발전할 수 있다고 본다.
황혜인은 ‘예술가들의 자립’에 관심이 많다. 그래서 예술가들이 현실에서 어떻게 살아가고 살아내는지를 리서치하고 있다. ‘새로운 관점, 다른 방식의 보기’도 늘 고민한다. 당연한 것을 당연하지 않게 보려고 노력할 것이며 사진이라는 매체에 얽매이지 않고 다양한 방식의 표현을 시도하고 싶다. 향후 황혜인 작가의 행보가 주목된다.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평택인문연구소 소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