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짓거 코쟁이 가르쳐 시나위 할란다” 

2017년 필자가 하와이 출장에서 얻은 성과였던 지영희 은관문화훈장증을 2024년이 되어서야 지영희 선생 묘소에 바쳤다.
2017년 필자가 하와이 출장에서 얻은 성과였던 지영희 은관문화훈장증을 2024년이 되어서야 지영희 선생 묘소에 바쳤다.

 

1909년 평택시 포승읍 내기리에서 태어난 지영희 명인은 민속음악 근대화의 선각자로 알려졌다. 1973년 중요무형문화재 제52호 시나위 보유자로 인간문화재가 되었으나 1974년 새로운 국악단체의 설립을 주도하다 당시 국악협회와의 갈등으로 1975년 미국 하와이로 떠나면서 중요무형문화재 지정이 취소되었다.

50년이 흐른 2025년 현재 평택시민은 지영희라는 예술인을 알지 못하고, 시나위가 평택의 문화유산임을 인지하지 못하게 됐다. 하지만 지영희 명인의 업적은 잊거나 놓아버리기엔 너무도 찬연했다. 당연히 평택문화의 맥으로, 평택의 대표문화로 계승·발전시켜야 한다. 이러한 때 오랜 기간 평택시청에 근무하며 지영희 명인의 업적을 계승·발전시키는 토대를 닦아온 오민아 작가가 미국 하와이 현지를 다녀와서 평택의 보물을 새롭게 발견한 감회를 글로 보내왔기에 2회에 걸쳐 게재한다.

호놀룰루 다문화센터 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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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영희가 국악교습소를 운영했던호놀룰루 다문화센터 건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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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영희 국악 몸부림의 흔적

노장의 몸으로 뜬금없이 낯선 섬나라에 떨구어진 지영희는 사실 많이 무력했다. 억울함과 고통스럽게 밀려드는 향수에 입술만 앙다물고 침울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의 국악혼은 단 한 번도 주눅 든 적이 없었다. 그는 어느 날 분기탱천하여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까짓거 코쟁이 가르쳐 시나위 할란다.” 그리고 벌떡 일어나 국악 공연을 하기 시작했다.

우리가 하와이에서 처음 찾아간 곳은 비숍박물관이다. 비숍박물관은 하와이 인근의 태평양 섬들의 문화 유물들을 전시한 곳이다. 1889년에 세워졌고 지영희가 있을 당시에도 다문화 예술 공연을 활발하게 개최했다. 지영희는 이곳 연주홀에서 공연을 자주 열었다.

다음으로 하와이 대학교를 찾았다. 지영희는 이곳 하와이대학 오르비스홀과 케네디홀에서 자주 공연하면서 서양인과 대학생들에게 한국 음악의 매력을 알렸다.

 

하와이대학 오르비스홀
하와이대학 오르비스홀

하와이에서 국악 교육

지영희는 할라함 스튜디오를 빌려 국악강좌를 열었다. 또 하와이 주정부에서 각국의 이민자들을 위해 만든 다문화센터에서 ‘한국민속예술학교’ 강좌도 열었다. 이후에는 그의 단독 국악교습소도 열었다. 이때 보관된 홍보물 속에서 ‘한국민속예술학교 수강생 모집’이라는 문구를 발견하고 가슴이 시큰하게 내려앉았다.

민족의 자존이 만든 보물

국가무형유산을 영문으로 ‘리빙 내셔널 트레져’라고 한다. 무형문화유산 제도는 전 세계 오직 한국과 일본만 있는 문화 제도이다. 다만 일본은 인간문화재가 떠나면 그 예술도 끝난 것으로 처리한다. 그러나 한국은 원천 보유자가 작고한다고 해도 그 제자들이 계속 이어 나간다. 예술은 한 개인의 것이 아닌 민족의 유산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들의 이런 자존이 반만년 민족 문화를 탄탄하게 이어온 근간이다. 우리가 실로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음식 문화를 가진 까닭도 모두 유구한 역사와 이런 민족성 덕분이다. 사실 지금의 K푸드 열풍은 모두 반만년 우리 민족의 역사를 담은 것이다.

내셔널 트레져 표현 기사
내셔널 트레져 표현 기사

 

절박한 시나위 부활

전 인류사상 최초 금속활자본인 직지심체요절은 우리 민족의 것이다. 우리 민족의 위대한 발명품이다. 하지만 직지는 지금 프랑스가 소유하고 있다. 모두가 그 안타까운 상황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우리 민족의 위대한 음악 예술 시나위가 하와이에서 사라져 버렸다는 것은 잘 모르고 있다. 올해가 벌써 지영희 시나위 보유가 해제된 지 50년, 반백 년이 된다. 그동안 우리는 우리 문화에 너무 무심했다. 그러면서 K드라마가 K팝이 K푸드가 전 세계를 감동시킬 때마다 시쳇말로 국뽕이라며 뿌듯해하고 있다.

 

억울함 속에 침울했던 지영희

노년 마지막 날까지 하와이에서

서양인 상대로 공연과 교습활동

벌이며 국악에 대한 끈 놓지 않아

 

대한민국 국악사의 거장 지영희

그의 죽음으로 사리질 위기에 처한

민족의 보물 시나위, 해제 50주년인

올 해부터라도 본격 살려 나가자

지영희는 국악사에 가장 위대한 거장이다. 입으로만 조악하게 전해지던 우리 음악을 서양의 오선지에 옮겨 정리했다. 대학에서 전문적으로 배울 수 있도록 교재와 교습법도 마련했다. 전통악기를 다시 조립해서 서양의 화성과 어울리게 만든 천재다. 그래서 국악관현악단도 최초로 만들었다. 뉴욕 카네기홀에서 아시아인 최초로 자국의 음악 공연을 한 사람이기도 하다. 지영희는 K팝 최초의 한류였다. 국악에서 가장 어렵다는 시나위 무형문화재를 처음으로 보유한 사람도 지영희이다.

지영희가 영면한 묘소 밸리오브템플 메모리얼파크
지영희가 영면한 묘소 밸리오브템플 메모리얼파크.

하지만 그가 떠나고 그 누구도 시나위를 잇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아직도 늦지 않았다. 지영희의 직속 제자들이 비록 노쇠하였지만 생존해 있어 기회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시나위 속에는 반만년 동안 깊게 우러나온 우리 민족의 정수가 흐르고 있다. 전 세계를 강타하고 있는 K문화가 반짝 유행이 아니라 계속 빛나기 위해서는 ‘시나위’라는 국가적 보물을 계승·발전시키려는 노력이 절실하다. 물론 정치적으로 큰 혼돈 속에 있는 지금이다. 하지만 오천 년 우리의 보물, 정신적 자존은 늘 그랬듯 강하게 이어질 것이다. <끝>

 

글 오민아스토리텔링 작가
글 오민아스토리텔링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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