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락산권의 역사문화자산과 장소정체성 찾기 ⑭ 

민세 안재홍 선생은
1924년 4월 시대일보 
논설기자를 시작으로 
본격적인 언론 활동 
 

신간회 창립을 마치고 철야 후 (1927년 2월 16일 새벽)
신간회 창립을 마치고 철야 후 (1927년 2월 16일 새벽)

평택 북부지역의 주산인 부락산(높이 143m)은 고려 승장 김윤후, 임진왜란 당시 연안대첩을 승리로 이끈 이정암·이정형 형제, 일제강점기 자전거 영웅 엄복동, 판소리 근대5명창 이동백, 민족 지도자 민세 안재홍, 기지촌 쑥고개의 삶을 노래한 박석수 시인 등 역사인물의 흔적이 남아 있는 곳이다.

삼남대로 대백치에서 이충동 동령마을로 내려오는 흔치고개, 흔치휴게소를 지나 소골로 내려가는 고갯마루 서낭당, 400년 전통의 정제와 줄다리기가 남아 있는 동령마을 등 역사문화자산도 풍부하다. 특히 북부지역의 유일한 생태 휴식 공간으로서 부락산과 덕암산을 잇는 생태통로는 주말이면 1000명이 넘는 시민이 이용할 정도로 사랑받고 있다.

본지는 그동안 부락산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의 필요성을 꾸준히 고민해온 황우갑 민세아카데미 대표와 부락산의 역사문화자산을 깊이 들여다보고 장소 정체성을 어떻게 세울 지에 관한 글을 기획하여 매월 1회 연재한다. 앞서 황우갑 대표는 본지에 국내 공간문화재생 사례, 퇴역 평택함을 활용한 평택시의 장소마케팅 전략, 해외 문화예술 공간 탐방 등의 기획 기고를 게재하며 지역의 정체성을 정립하고 그 공간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방안을 통찰력 있게 제시해왔다. ‘부락산권의 역사문화자산과 장소정체성 찾기’가 평택의 정체성과 문화 다양성을 확립하는 데 마중물이 될 것으로 기대한다.

 

1924년 4월 안재홍은 그의 삶에서 커다란 전환점을 맞이한다. 1차 옥고를 치르고 나와 고향에서 칩거하던 민세는 새로운 모색을 한다. 아마 이미 대구 감옥에서 그 미래의 삶에 대한 꾸준한 구상을 했을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좋아하고 잘 하는 일을 할 때 큰 성과를 낼 수 있다. 민세도 이 해 4월에 시대일보 논설기자로 언론계에 첫발을 내딛는다. 1920년 조선, 동아 등 우리말 신문이 간행된 이후부터 1950년 한국 전쟁 전 시기까지 최고의 언론인은 단연 민세 안재홍이다. 그만큼 민세는 이때부터 언론계에서 두각을 나타냈고 이를 수단으로 일제 식민통치의 문제점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해방 후 조선언론인협회가 만들어질 때 서재필과 안재홍 두사람 만이 고문으로 추대됐다. 당시 언론계에서 민세의 위상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자신의 일본 유학시절 동기였던 최두선의 형 육당 최남선의 주선으로 시대일보에 들어간 민세는 그해 9월 신석우가 인수한 혁신 조선일보에 주필로 자리를 옮겼고 이 신문에 항일의 기운을 불어넣는다.

 

민세의 서울 종로 평동 집은

신간회 최초 창립 논의 장소

조선일보 주필 시절 민세는 한국독립운동사에 커다란 족적을 남기는 단체 창립을 주도했다. 서울 종로구 평동 75번지. 민세의 서울집 주소이다. 이곳에서 민세는 동생 안재학 가족, 여동생 안재숙과 남동생 안재직 등과 함께 지냈다. 현재는 강북 삼성병원 뒤쪽 주차장의 일부로 편입되었다. 이 병원 동쪽에는 해방 후 중국에서 귀국한 백범 김구 선생이 머물렀던 경교장도 있다. 바로 이 평동집에서 민세와 벽초 홍명희, 평주 이승복 등이 모여 일제강점기 최대 항일운동단체 신간회 창립의 뜻이 모아졌다. 그리고 1927년 2월 15일 종로에 있던 중앙YMCA 회관에서 신간회가 창립되었다. 민세는 이 신간회운동에 대단한 희망을 가졌으며 절대 독립을 포기하고 자치론을 강조했던 당시의 타협 세력을 비판하고 그 필요성에 대해 언론을 통해 지속적으로 글을 발표했다.

 

시작이 반이라는 속담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일은 시작만으로 그 전체를 판단할 수 없다. 차라리 미미한 최초 걸음이라고 보고 싶다. 그 금후의 운동과 성과가 어떨지는 전혀 그 발기자를 일부로 하는 동회 회원들의 진지한 노력 여하를 기대할 것이다. 그럼으로 우리는 이제 어떠한 예단을 내릴 수는 없다. 그리고 현재의 조선에 있어서 민족적 좌익전선을 형성하여 우경적 사상과 그 운동을 배척하고 대중으로 하여금 일정한 목적의식에 의하여 그 반발적 전진을 지속하게 하도록 그 존재 의의와 시대 사명을 견실하고 선명하게 표현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이러한 처지에 있어 족히 외부에서 오는 압력을 견뎌가며 대중의 신뢰를 집중하여 그 최후의 신지(信地)까지가는 것은 존귀하고 지난한 일인 것을 단언한다.

- 조선일보, 1927년 1월 20일, 1면 1단

1927년 최대 항일운동 단체

신간회와 근우회 창립

1927년 2월 15일 종로에 있던 중앙YMCA 회관에서 신간회가 창립되었다. 정치적 경제적 각성을 도모하고 단결을 공고히 하며, 일체 기회주의를 부인한다는 3개의 강령 발표와 함께 시작된 창립대회는 일제의 감시속에 입추의 발 디딜 틈 없이 많은 사람들이 참여해 그 뜻을 모았다. 당시 사진 자료를 보면 이날 민세는 밤을 세워가면서 창립 발기인들과 함께 창립 이후 신간회 조직의 전국화에 대해 많은 대화를 나누었던 것 같다.

신간회는 여타의 독립운동 단체들과는 달리 일제가 창립을 허용한 합법단체였다. 당시 일제 당국은 조선인의 역량을 과소평가했다. 절대 전국적인 조직화는 하지 못할 것으로 판단했다. 그러나 이는 잘못된 판단이었다. 신간회는 창립 이후 전국 곳곳에 지회가 만들어져 120여개 지회에 5만 이상의 회원을 확보했다. 또한 같은 해 5월에는 한국 여성운동사에 큰 발자취를 남긴 자매단체 근우회도 만들어졌다. 1919년 3.1운동을 통해 전민족적 독립운동의 뜻이 모아져서 이를 뒷받침할 상해에 대한임시정부가 1919년 4월 11일 수립되었다. 신간회와 근우회는 이를 조직적으로 강화시키는 준정당과 같은 민족운동단체였으며 특히 절대독립을 위해 안재홍과 같은 우파 비타협 민족주의자와 좌파 사회주의자가 뜻을 모았다는 점이다.

 

조선 민족의 정치적 의식이 각성됨을 따라 무슨 과가 암암리에 활동하느니 혹은 무슨 과가 단체적으로 결속하느니 하여 사회 각 방면에 여러 가지 풍설이 유행하는 것은 일반이 아는 바이거니와 이제 순민족주의 단체로 신간회가 발기되어 눈앞에 창립 준비 중이다. 그 회의 목표는 우경적 사상을 배척하고 민족주의 중의 좌익 전선을 형성하려는 것이라는데 조선에 있어서 어느 의미로 보든지 드물게 보는 회합이므로 각 방면의 영향이 크리라고 일반이 추측하는 바 그 회의 강령과 발기인의 씨명은 아래와 같다 하며 창립 총회는 2월 15일에 개최하리라고 한다.

 

발기인 명단

김명동 김준연 권동진 정재용 정태석 이갑성 이관용 이석훈 이승복 이정 문일평 박동완 박래홍 백관수 신석우 신채호 안재홍 장지영 조만식 최선익 최원순 하재화 한기악 한용운 한위건 홍명희 홍성희

- 조선일보, 1927년 1월 20일, 2면

 

민족협동 전선 조직과 확대를 위해

바쁘게 종로 일대 누벼

1927년 한해 민세는 오늘날의 택시 기능을 한 인력거를 타고 참 바쁘게 종로 일대를 돌아다녔다. 평동 집을 나와서 제야의 종을 치는 보신각 종에서 북쪽에 위치한 옛 조선일보 견지동 사옥에서 글을 쓰고 사람을 만나며 그 뒤편에 있는 100년 역사를 자랑하는 이문설렁탕에서 점심을 먹고, 행사와 회의가 열리는 천도교 중앙대교당, 서울중앙 YMCA 회관 등을 바쁘게 다녔다. 1927년 2월호인 <별건곤 4호>에 경성명물남녀 신춘지상대회라는 제목으로 ‘노상의 인, 안재홍’이라는 기사가 실렸다. 일이 많아 어느때든지 바쁘게 인력거를 타고 종로거리를 분주하게 다니는 안재홍을 묘사하고 있다.

 

속은 화평하여도 입에는 항상 불평이 많은 듯. 준수한 얼굴에 뿔테 안경을 쓰고, 수달피 털을 댄 외투 입고 인력거 위에 점잖게 앉아 오는 신사 한 분. 관리면 고등관이요, 아니면 돈 많은 중년신사로 보이는 좋은 신수. 그이가 조선일보 주필로 계신 민세 안재홍씨이다. 시평쓰시랴 사설쓰시랴 무명회 일보시랴 신간회 주선하시랴 가시는 곳 보시는 일이 많아서 어느때든지 저렇게 바쁘게 인력거를 타시고 분주히 다니신다. 그러나 그렇게 바쁘신 중에도 멍텅구리까지 고안해 내신다니 참말 바쁘실 것이다.

- 별건곤 4호, 1927년 2월호

 

 

전국 각지를 돌며 신간회 지회 설립을 독려하고 지역주의 극복 호소

창립 이후 민세는 전국 각지를 돌며 신간회 지회 설립을 독려했다. 북으로는 평안북도에서 황해도 해주, 함경도 원산과 함흥 지회를 비롯해서 남쪽으로 전남 나주와 충남 공주지회, 경북 문경과 상주지회, 경북 대구지회, 하동, 진주, 함안 등 연중 전국을 돌며 강연을 통해 신간회운동의 필요성을 널리 알렸다. 특히 민세는 신간회 운동의 성공을 위해 과도한 파벌과 배타적 태도, 지방열로 알려진 지역연고주의를 강력히 비판하며 이를 벗어나야 조선은 희망이 있다고 생각했다.

 

조선 쇠퇴의 주요한 한 원인인 파쟁의 전통을 계승하는 영웅주의의 변형적 표현인 지방열 그것을 엄정하게 제척해야할 것은 물론이고 비록 그 경향이 아직 짙지 않은 자라할 지라도 그 가능성·필연성을 가진 단체에 대하여 지금 문제가 되어 있는 것은 당연하다 하겠다. 논자가 있어 말하기를 지방열 단체 운운은 도리어 소멸되어 가는 지방열이란 것을 각성시키는 매우 현명하지 못한 일이라고. 그러나 한편으로 단일당의 운동이란 것이 있고 한편으로 지방열단체 배척운동이 있으니 이미 출현한 운동은 마땅히 그 결말을 보는 것이 당연할 것이다.

- 조선지광, 1927년 10월호

 

신간회 운동 시기

조선일보 필화 사건으로 연거푸 수난

신간회운동의 확산에 일제는 긴장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힘을 약화시키기 위해 당시 신간회 전국지회 소식을 실어 기관지 역할을 했던 조선일보를 탄압하기 시작했다. 민세는 1928년 일본 군대의 산동 파병을 비판한 조선일보 사설 ‘제남사건의 벽상관’으로 금고 8개월이 언도되어 보석이 취소되면서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었고 1929년 1월 초에 서대문 형무소에서 출옥하였다.

 

일찌기 본보 필화사건으로 금고 8개월의 판결을 받고 고등법원에 상고하였다가 기각을 당하고 작년 7월 26일에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된 안재홍은 작년 11월에 일반감형으로 그 형기 4분의 1인 2개월의 감형을 받아 오는 25일 이 그 형이 만기로 되는 다음날인 26일 오전 7시에는 출옥되리라고 한다.

- 조선일보, 1929년 1월 21일 2면 1단

 

조선일보 필화사건으로 8개월 동안 서대문 형무소에서 복역중이던 안재홍씨는 26일 오전 7시에 건강한 몸으로 출옥하였는데 바로 자택으로 들어가서 그간에 적체한 가사를 처리한 후에 어느 한가한 절로 가서 얼마간 휴양하리고 한다.

- 동아일보, 1929년 1월 27일 2면 5단

 

고향으로 내려와 휴양과 등산을 하며

항일의 뜻을 다져

민세는 감옥에서 나와 고향 평택으로 내려와 요양한 것으로 보인다. 자료를 보면 어느 절에서 휴양한 것으로 되어있는데 이 절은 평택시 진위면에 있는 만기사로 추정할 수 있다. 다른 자료에서 보면 1929년 3월에 민세가 고향 평택 고덕 두릉리 집에서 요양 중 잡지 <삼천리>의 주간 김동환은 천안 정거장에서 온양 온천 가는 민세를 만났다고 회고하고 있다.

 

차를 놓치고 할 수 없이 나는 온양온천으로 향하였다. 객부를 보니 바로 내 앞 차로 중성사의 이종린 선생이 떠나 버렸다. 온천장 같은 치벽한 곳에선 만나는 것도 한 가지 기연인데 섭섭한 일이다. 또 돌아오는 길에 이번에는 천안 정거장에서 바로 온천장으로 가는 민세 안재홍 선생을 만났다. 이번 걸음은 남과 같이 노는 복이 무던히 없었던 모양이다. 나는 이제 50만 원을 던지어 부르주아의 향락장으로 무소 불비한 시설을 한 이 유명한 온천장을 해부하여 보리라.

- 조선일보, 1929년 3월 20일 3면

 

고향에 내려와 요양하는 중에도 민세는 늘 그렇듯이 고덕 일대의 월명산을 아침마다 오르며 시간을 내서 부락산, 덕암산 일대로 등산을 했을 것이다. 1929년 4월 초에는 조선일보 부사장에 취임하며 감옥살이와 평택에서의 휴식 기간중 구상했던 생활 개신운동과 문자보급운동을 본격적으로 추진하기 시작했다. 부락산․고성산 등산은 민세에게 민족운동의 새로운 가능성을 가다듬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계속>

 

황우갑 민세아카데미 대표
황우갑 민세아카데미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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