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락산권의 역사문화자산과 장소정체성 찾기 ⑬
평택 북부지역의 주산인 부락산(높이 143m)은 고려 승장 김윤후, 임진왜란 당시 연안대첩을 승리로 이끈 이정암·이정형 형제, 일제강점기 자전거 영웅 엄복동, 판소리 근대5명창 이동백, 민족 지도자 민세 안재홍, 기지촌 쑥고개의 삶을 노래한 박석수 시인 등 역사인물의 흔적이 남아 있는 곳이다.
삼남대로 대백치에서 이충동 동령마을로 내려오는 흔치고개, 흔치휴게소를 지나 소골로 내려가는 고갯마루 서낭당, 400년 전통의 정제와 줄다리기가 남아 있는 동령마을 등 역사문화자산도 풍부하다. 특히 북부지역의 유일한 생태 휴식 공간으로서 부락산과 덕암산을 잇는 생태통로는 주말이면 1000명이 넘는 시민이 이용할 정도로 사랑받고 있다.
본지는 그동안 부락산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의 필요성을 꾸준히 고민해온 황우갑 민세아카데미 대표와 부락산의 역사문화자산을 깊이 들여다보고 장소 정체성을 어떻게 세울 지에 관한 글을 기획하여 매월 1회 연재한다. 앞서 황우갑 대표는 본지에 국내 공간문화재생 사례, 퇴역 평택함을 활용한 평택시의 장소마케팅 전략, 해외 문화예술 공간 탐방 등의 기획 기고를 게재하며 지역의 정체성을 정립하고 그 공간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방안을 통찰력 있게 제시해왔다. ‘부락산권의 역사문화자산과 장소정체성 찾기’가 평택의 정체성과 문화 다양성을 확립하는 데 마중물이 될 것으로 기대한다.
언론을 무기로
시대의 불의에 저항하며
희망을 일구다
1919년 3.1운동에 자극받아 서울로
올라가 대한민국청년외교단 조직
1917년 봄 부친의 사망 이후 민세는 고향에서 칩거하며 우울한 나날을 보냈다. 민세는 1919년 고향 평택에서의 3.1운동에는 가담하지 않았다. 당시 그는 29세이었는데 3.1운동 선두에 나서기를 꺼렸다. 당시 안재홍은 부단히 시국대책을 연구하는 상황이었다. 아무것도 못하고 상심만 했던 그는 3.1운동에 나서면서 징역살이를 하기에는 자신이 너무 가엾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1919년 3월 9일 고향 평택의 현덕면 계두봉에서 시작된 기미만세운동의 감동을 아래와 같이 회고하고 있다.
내가 3월 1일이 훨씬 지난 그믐경 어느 날 밤, 어느 농촌 높다란 봉우리에 우두커니 홀로 서서 바라본 즉, 원근 수백리 높고 낮은 봉과 봉, 넓고도 아득한 평원과 하천지대까지, 점점이 피어오르는 화톳불과, 천지도 들썩거리는 듯한 독립만세의 웅성 궂은 아우성은, 문자 그대로 인민항쟁이요 민족항쟁이었다(민세 안재홍선집 1권, 1983).
전 민족이 일어나 자주독립을 외친 3.1운동에 안재홍은 크게 자극을 받았다. 그래서 다시 서울로 올라왔다. 그리고 평택과 가까운 용인이 고향인 중앙학교 교장 유근 집에 머물면서 연병호·송내호 등과 함께 상해임시정부를 지원할 목적으로 1919년 5월 대한민국청년외교단을 조직하고 총무로 활동했다.
대구 감옥에서 1차 옥고
그러나 그해 11월 애국부인회 회원의 밀고로 발각되어 이병철·김마리아·황에스더 등과 함께 대구 감옥에서 옥살이를 했다. 출옥 후인 1926년 조선일보 주필 시절 민세는 경부선 열차를 타고 대구역에 잠시 내려 대구 감옥살이의 기억을 떠올린다.
대구는 나의 잊기 어려운 인상 깊은 도시이다. 오른편으로 달성공원의 들뜨는 봄색을 바라보고 왼편으로 금호강의 잔잔한 물결을 바라보며 추억 많은 대구역에 왔을 때에는 벌써 십수년 전의 추억은 사라지고 다만 기미 임술 동안 깊고 깊던 옥중 생활의 인상이 되살아난다. 10분간 정거를 이용하여 구름다리를 건너 개찰구까지 가서 역앞에 몰리는 군중을 쳐다보았다. 동쪽으로 팔공산, 서쪽로 남산의 푸른 경치가 더욱 회고하는 필자의 감회를 돕는다. 삭풍이 살을 에는 듯한 감옥 중의 운동장에서 백설 하얀 팔공산의 연봉을 바라보던 덜덜 떨리는 수인(囚人)에게는 마치 세차게 매운 운세의 마왕과 같이 보이더니 지금에는 자못 강산의 풍경 빼어나게 뻗어나가는 바가 있음을 깨닫게 한다. 더욱이 남산은 감옥의 창으로 들어 쏘이는 햇볕을 실어오는 봄날과 함께 인간 세상 동경의 상징으로 바라보던 바 오늘날에도 더욱 다정해 보인다(조선일보, 1926년 4월 21일 2면).
감옥살이 중에 가족에 대한
그리움도 크게 느껴
안재홍은 이 첫 옥고 관련해서 후에 몇편의 회고 기록도 남겼다. 첫 옥고 때는 7살 정용과 5살 민용을 집에 두고 옥살이를 했다. 민세도 인간이었기에 가족에 대한 애틋함은 감옥살이 내내 불면의 밤을 만들게했다.
지금으로부터 꼭 십 년 전인 1921년 가을의 초저녁이었다. 나는 그때 마침 일곱 살 된 큰아이와 다섯 살 된 작은 아이를 집에 두고 한 3년째 못 보고 있는 터였다. 그 아이는 어찌 되었을까? 이런 생각이 날수록 즐기는 독서도 안 되었다. 취침의 명령을 받고 자리에 누웠으나 보송보송하게 긴장되어 가는 눈에는 잠이 올 생각도 안한다. 자정이 지나 새벽이 되고 날이 휘어밝어 기상의 명령이 날 때까지! 선하품으로 그 이튿날 하루를 가까스로 지냈다(동광, 1931년 5월호).
독거의 방에서 독서를 통해
새로운 의지를 다지고 조선학 구상
또한 안재홍에게 이 감옥은 독거의 방에서 삶의 새로운 의지를 다지는 성찰의 공간이었다. 감옥에서 민세는 유불선의 경전과 성서, 톨스토이의 <인생론> 등을 읽었다. 특히 이 시기 읽은 모건의 <고대사회>는 고대사의 보편성에 대한 인식을 넓히는 계기가 되었다. 이 책은 1930년 2월 조선일보에 연재한 ‘조선상고사 관견’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나-기미의 해에 남옥(南獄)에 매인지 수 삼년에 답답하되 원에 따라 시원할 수 없고 덥되 때맞춰 서늘할 수 없고 추위와 주림과 온갖 괴로움과 부자유가 나를 만족시키지 않을 때에 온갖 정염으로 스스로 걷잡을 수 없는 상황에서 새로이 독서를 하매 수일에 몇 장 만족할 수 있고 만일 대담하게 독파하면 수 시간에 몇 백 장이라도 풀풀 넘길 수 있었나니 이는 독서에서도 새로운 기원이었고 인생으로서도 더욱 큰 고비를 넘어선 것이었다(학등, 1935년 11월호)
1922년 6월 감옥에서 나와
다시 평택에서 칩거
안재홍은 1922년 6월 9일 대구 감옥에서 가출옥 했다. 그리고 고향 진위에서 요양을 했다. 조카딸인 안명희씨의 증언에 의하면 민세의 모친인 홍여사는 진위 만기사에 많은 지원을 했다. 일제 강점기에 만기사에 큰 불이 났을 때 복구 비용을 지원하기도 했다고 한다. 민세는 9번의 옥살이 중간에 고향에 내려와 절에서 요양을 했다고 하는데 어머니가 다니던 만기사였을 가능성이 크다. 어려서부터 유교의 충효관념을 삶의 중요한 가치로 알고 살아온 안재홍은 부모 봉양에서 최선을 다하는 지도자였다. 바쁜 서울 생활에도 평택 시골에 계신 노환으로 고생하는 어머니를 2주에 한 번씩 꼭 찾아가는 효자였다.
안재홍씨는 지난해 12월 28일 하루 종일을 책상 앞에서 원고지와 씨름하시는 때에 집으로 찾아뵈니, 원 요사이 같아서는 밤낮 원고 때문에 부대껴 건강을 상해 소화불량까지 얻었어요. 이제 새해를 잡아 초순경에는 또 시골로 늙으신 노모님 문안하러도 내려갔다 와야 하겠구. 모친께서는 이제 칠순이 되셔서 내가 이 주일에 한번은 꼭꼭 아무리 별일이 다 있더라도 내려갔다 오고는 하는데 한 번 갈 때마다 허-연 머리카락이 점점 더 백발로 변하시면서 얼굴도 차츰 더 파리해 지시는 것을 보니 원 마음도 잘 놓이지 않고 해서 이번에도 또 내려갔다 와야 하겠고 하시는 안재홍씨의 거룩하신 얼굴에는 지극하신 효심의 빛이 어리어지는 듯 하다(삼천리, 1936년 2월호).
안재홍은 1927년 자신이 주도해 창립했던 신간회운동의 주요사업 가운데 하나로 당시 차별을 받던 백정의 신분 차별 철폐운동이었던 형평(衡平)운동의 지원이었다. 안재홍은 서정리초등학교를 다닌 큰 아들 정용의 초등학교 가정환경조사서에 신분을 평민이라고 적었다. 다 함께 평등한 세상의 소중함을 자식에게 깨우치려 했던 안재홍의 자녀교육 의지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소학교 시절의 일이다. 학교에서 가정 환경조사가 있어 신원카드를 돌리고 있었다. 모두가 양반으로 적고 있는데 나만 평민으로 신고되어 일인 교장에게 심문을 당한 일이 있다. 마침 귀가하였던 아버지가 적어준 것을 멋도 모르고 학교에 내놓았을 뿐이다. 교장이 심문하는 뜻을 알아볼래야 부친은 이미 상경한 후였다. 그러나 중학교에 다니면서 부친이 식육업자들의 조직인 형평사를 열심히 변호하여 일인에게 민족차별을 반항하면서 동포인 형평사원(衡平社員)에게는 차별할 것이고 맹렬히 비판하는 것을 보고 비로소 평민의 뜻을 깨달은 것이다. 그 다음부터 나는 평민으로 자처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내가 받은 교육의 방식은 대체로 이러한 것이었다(민세안재홍선집 3권).
1922년 6월 이후에서 시대일보 논설기자로 다시 사회활동을 시작하는 1924년 4월 사이에 민세는 평택에 있으면서 만기사를 비롯해 부락산, 고성산을 오르며 본격적인 언론활동을 구상했을 것이다. 당시 신문은 오늘날의 스마스폰과 같은 최첨단의 홍보 매체였다. 동서고금을 아우르는 해박한 지식에 속필인 민세는 언론을 통해 민족을 일깨우는 것이 자신이 가장 좋아하고 잘하는 일이라고 판단했을 것이다.
<계속>
민세아카데미 대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