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락산권의 역사문화자산과 장소정체성 찾기 ⑫

민세가 일본 유학 후 돌아와 지은 안재홍 생가 안채(1914년 건립)
민세가 일본 유학 후 돌아와 지은 안재홍 생가 안채(1914년 건립)

평택 북부지역의 주산인 부락산(높이 143m)은 고려 승장 김윤후, 임진왜란 당시 연안대첩을 승리로 이끈 이정암·이정형 형제, 일제강점기 자전거 영웅 엄복동, 판소리 근대5명창 이동백, 민족 지도자 민세 안재홍, 기지촌 쑥고개의 삶을 노래한 박석수 시인 등 역사인물의 흔적이 남아 있는 곳이다.

삼남대로 대백치에서 이충동 동령마을로 내려오는 흔치고개, 흔치휴게소를 지나 소골로 내려가는 고갯마루 서낭당, 400년 전통의 정제와 줄다리기가 남아 있는 동령마을 등 역사문화자산도 풍부하다. 특히 북부지역의 유일한 생태 휴식 공간으로서 부락산과 덕암산을 잇는 생태통로는 주말이면 1000명이 넘는 시민이 이용할 정도로 사랑받고 있다.

본지는 그동안 부락산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의 필요성을 꾸준히 고민해온 황우갑 민세아카데미 대표와 부락산의 역사문화자산을 깊이 들여다보고 장소 정체성을 어떻게 세울 지에 관한 글을 기획하여 매월 1회 연재한다. 앞서 황우갑 대표는 본지에 국내 공간문화재생 사례, 퇴역 평택함을 활용한 평택시의 장소마케팅 전략, 해외 문화예술 공간 탐방 등의 기획 기고를 게재하며 지역의 정체성을 정립하고 그 공간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방안을 통찰력 있게 제시해왔다. ‘부락산권의 역사문화자산과 장소정체성 찾기’가 평택의 정체성과 문화 다양성을 확립하는 데 마중물이 될 것으로 기대한다.

 

고성산 운수암에서 안재홍 (1918년 8월)
고성산 운수암에서 안재홍 (1918년 8월)

외동딸 안서용씨 앨범 속에서 
찾은 민세의 고성산행 사진

평택 부락산권의 장소정체성과 관련해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있다. 평택 출신의 민족지도자 민세 안재홍이다. 2008년 10월쯤으로 기억한다. 민세의 외동딸 안서용 여사가 2007년 타계했는데 2008년 가을 서울 서초구에 사는 아들 이돈영씨 집을 방문한 적이 있다. 1925년생인 안 여사는 평택서 오빠인 민세의 장남 안정용, 차남 안민용과 함께 서정리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일제 말기에는 서울 배화여고를 나왔다. 이때 학교 친구가 후에 박정희 대통령의 부인이 되는 육영수 여사이다. 해방 후인 1946년 이태호 씨와 결혼했다. 민세는 외동딸 안서용 씨를 아주 귀여워했다. 자료를 보면 민세는 1928년부터 소파 방정환 등이 주도한 어린이 운동에도 동참했다. 이 시기는 외동딸 안서용이 아동기였기에 더 큰 관심을 가졌을 것이다.

안여사 타계 후 유품 가운데 민세 관련 자료가 있을까 해서 전화상으로 문의를 드렸는데 오래된 앨범 1권을 보관하고 있다고 말씀해 주셨다. 그래서 급히 찾아뵙고 그 앨범을 확인했다. 빛바랜 수십 장의 민세와 가족들의 사진이 들어있었다. 1927년 2월 15일 신간회 창립 후 찍은 사진은 역사적 가치가 있는 사진이었다. 그리고 아주 낡은 사진인데 1918년 여름 안성 고성산 무한산성에 오른 민세의 사진 하나를 찾았다. 구전으로만 확인했던 민세와 부락산의 인연을 추정해 볼 수 있는 자료였다.

 

20대 중반 일본 유학 후 돌아와 
고향에 칩거할 때 찾은 부락산

민세는 24살인 1914년 일본 와세다대학 정경학부를 졸업하고 귀국했다. 부푼 꿈을 가지고 귀국했지만 20대 초반 청년 민세에게 삶은 그리 녹록하지 않았다. 몇 가지 일을 계획했으나 뜻한 바대로 이루어지지는 않았고 심적 좌절과 방황의 연속이었다. 이 시기 고향 평택에 있으면서 논을 건너 산마루 넘어 정처 없이 다니면서 20살 일본 유학 중에 다짐했던 민세, 즉 민중의 세상을 어떻게 만들 것인가를 소리치며 고민했다. 현재 남아있는 경기도 문화유산인 안재홍 생가 안채는 초가집이다. 민세는 실제로는 이곳에서 서쪽으로 100M 정도 떨어진 부친 안윤섭의 큰 기와집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1914년 여름 일본 유학에서 돌아와서 부인 이정순 씨와 살림을 차렸다. 두 사람이 1905년 결혼했으니 서울 황성기독교 청년회 학관과 일본 동경 유학 이후 9년 만에 살림을 차린 것이다. 그런데 초가집을 짓고 1915년 큰아들 안정용, 1918년 둘째 안민용, 1925년 딸 안서용을 낳은 것이다. 기와집을 지을 수 있는 경제력에도 불구하고 초가집을 지은 것은 민세의 소박한 뜻이 담겨 있는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자신의 호 민세와 좌우명 “늘 민중과 함께 가라, 민중의 일을 함께하도록 하라”는 다짐은 첫 살림집이었던 초가집 짓고 살기로 구체화하였다. 이 집에는 또 하나의 특징이 있다. 통상 초가집 부엌과 마루는 연결이 되지 않아 음식을 나를 때 마당을 통해서 마루로 올라가야 한다. 이런 불편을 해소하기 위해 이 집은 부엌과 마루가 바로 연결되도록 쪽문을 만들어 실용성도 강조했다. 민세는 이 시기 서정리를 지나 부락산, 덕암산에 올랐을 가능성이 크다. 그런 의미에서 청년 민세에게 부락산은 무엇이고 하나씩 하되 의미 있는 일을 찾기 위한 깊은 사색의 산이었다.

 

민세 안재홍은 20대 중반이던

1914년 일본 유학을 마치고

고향 고덕면 두릉리에 돌아와

칩거할 때, 부락산·덕암산에 올라

나라 잃은 설움과 좌절감

달래며 미래를 설계했고

 

1918년 부친이 사망하자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약 2년 정도 머물며

역사서에 몰두하는 한편

부락산·고성산 등에 다니며

민족과 사회, 공동체에 대한

책무를 고민하는 사색과

성찰의 시간을 보내

 

 

이런 사정이 있으므로 감격성(感激性)이 적지 않은 나로서는 경성에서 동경의 학창 시대에 그리고, 꿈꾸던 모든 일이 그저 다만 한 개의 유토피아로 슬어지고 마는 것을 볼 때 애달프고 서글프고 혹 조마조마하고 또 화가 더럭더럭 나서 앉았다 일어섰다, 누웠다 또 벌떡 일어나 작대기를 끌고 논을 건너 산마루 너머로 훼적훼적 쏘다니다가 혹 으슥한 골짜기에 들어서면 마치 목소리를 다듬는 젊은 성악가처럼 몇십 번이라도 줄기차게 소리를 지르고 나면 비로소 가슴속이 좀 시원해진 것 같았다. 학생 시대가 가장 그립던 것은 지금이 아니고 그때 몇 해 동안이었다. (안재홍, <신동아> 55호, 1936년 5월 학생 시대의 회고)

 

중앙학교 학감으로 많은 인재를 키우다

방황도 잠시 이듬해인 1915년 5월 민세는 와세다대 유학 동창인 인촌 김성수의 권유로 서울 중앙학교 학감으로 취임했다. 교육자로서 사회에 첫발을 내디뎠다. 학감은 현재의 교감 지위이다. 이 시기 민세는 훗날 독립운동과 민족문화 발전에 힘쓰는 뛰어난 제자들과 인연을 맺는다. 한글 수호와 민족문화 발전에 이바지한 국어학자 이희승도 중앙학교 시절 제자이다. 안재홍은 1942년 그와 함께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수난을 겪는다. 민세는 학감으로 있을 당시 설립자 김성수의 요청으로 중앙학교 장학생으로 일본에 유학 중인 춘원 이광수에게 장학금을 보내주기도 한다. 이 시절 그가 교육을 통해 항일의식을 일깨운 제자에는 훗날 의열단을 이끌며 일제가 포상금을 가장 많이 걸었던 독립운동가 약산 김원봉이 있다. 또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쓴 민족시인 이상화도 중앙학교 시기 민세와 사제의 연을 맺는다. 후에 안재홍은 1919년 3.1운동에 참여했던 제자이자 독립운동가 이병우의 중국 망명을 돕기 위해 거금 150원을 지원하기도 했다. 민세는 해방 후 이병우의 사망으로 어려움을 겪던 당시 서울대 영문과 학생이던 딸 이정상 씨를 민정장관 여비서로 일하도록 지원하고 1950년 봄 덕수궁에서 열린 결혼식때는 직접 주례를 맡기도 했다.

 

일제 탄압으로 중앙학교 사임
부친의 별세로 다시 낙향

중앙학교 학감 안재홍은 이때 조선산직장려계에 일반계원으로 가입하여 활동하는 등 학교 안팎에서 교육과 사회 활동에 적극 참여하였는데, 1917년 3월 5일 조선산직장려계의 임원·계원 등이 보안법 위반으로 검사국에 송치 당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안재홍은 이 사건과 평소의 언동이 문제가 되어, 중앙학교의 교장으로 조선산직장려계의 협의원으로 활동한 유근과 함께 1917년 3월경 중앙학교를 사임해야만 했다. 이후 1917년 4월 모교인 황성기독교 청년회 학관에서 간사로 활동했던 민세는 그해 5월 25일 부친 안윤섭이 별세하자 바로 고향에 내려왔다.

 

중앙청년회 간부 안재홍(安在鴻)씨는 지난 25일 오시(午時)에 엄부(嚴父) 안윤섭(安允爕)씨의 상을 당하였는데 진위 고덕면 두릉리의 향제(鄕第)에서 상을 치러 29일 마을 선영에서 장례를 행한다더라. (매일신보 1917년 5월 30일 자, 2면 7단).

 

부락산 덕암산 고성산 오르며 
새로운 모색을 하다

어려서부터 유교의 충효 사상을 몸에 익힌 민세에게 부친의 사망은 큰 충격이었다. 20대 중반 청년 안재홍은 이때 2년 정도 고향에서 지낸다. 산을 좋아했던 민세는 이 시기에도 부락산, 덕암산, 고성산 줄기를 따라 등산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민세의 삶에서 고향에서 보낸 긴 내적 성찰의 시간이었다. 부락산은 그에게 삶의 새로운 좌표를 모색하는 소중한 공간이었다.

1918년 5월 차남 안민용(安旻鏞)이 태어났다. 안민용은 서정리 초등학교를 나와 서울로 가서 민세가 학감으로 있던 중앙고를 졸업하고 일본 와세다대 문학부에 유학을 다녀왔다. 1940년대 초 박갑인씨와 결혼했다. 민세를 닮아 조용하고 관조적인 성격으로 사회 활동을 활발하게 하지 않았다. 1950년 한국전쟁 중 지병으로 이른 나이에 별세했다. 두 아들의 아버지가 된 민세는 부친의 갑작스러운 죽음, 가족에 대한 책임, 민족과 사회 공동체에 대한 책무 등을 깊이 고민했다. 민세 자신의 회고에 의하면 이 시기 고향 평택에서 역사서를 읽는 일에 몰두했고 주변 지역 여행을 하며 다시 깊은 사색의 시간을 가졌다. <계속>

황우갑 민세아카데미 대표
황우갑 민세아카데미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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