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해규의 문화살롱 12

평택 덕동초‧세교중 거쳐 서울
국립전통예술고와 서울대 음대
국악과 졸업한 김민지, 86:1의
경쟁 뚫고 평택시립 국악관현악단 
가야금 정규단원 합격

대학원 박사과정 다니며 정악과
민속악, 창작음악 경계 탈피하는
노력 기울이고, 관현악단 활동과
더불어 평택 국악발전 위해 시민과
함께 하는 국악 프로그램 구상 중

평택은 민속 음악의 성지(聖地)다. 너른 들판과 바다가 잉태한 농악·농요·어로요·무속음악은 평택지역 민속 음악을 대표한다. 악성 지영희의 음악도 만호리 바다와 무속음악에 뿌리를 두고 있다. 최은창의 평택농악도 너른 평택평야가 고향이다. 지난 7월 평택시립국악관현악단이 창단됐다. 평택시립국악관현악단에는 대한민국 최고의 박범훈 교수가 예술감독, 국립국악관현악단 지휘자를 지낸 김재영 교수가 상임지휘자로 초빙되었다. 평균 9.3대 1의 경쟁률을 뚫고 연주자 42명이 단원으로 선발됐다. 올 하반기에 무대에 올린 ‘창단연주회’와 ‘평택의 소리, 아시아의 소리 만남’ 그리고 얼마 전 공연한 ‘국악성가의 밤’은 우리의 기대가 헛되지 않았음을 보여줬다. 평택시립국악관현악단에는 평택이 배출한 뛰어난 연주자가 있다. 가장 경쟁이 치열했다는 가야금 파트의 수석연주자 한민지다.

 

가야금에 꽂히다

한민지는 서울에서 태어나 평택에서 자랐다. 초등학교 1학년 때 부모님의 직장을 따라 평택으로 이주했다. 덕동초등학교와 세교중학교를 거쳐 서울의 국립전통예술고등학교와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국악과에서 학사와 석사를 졸업했으며 지금은 박사과정에 있다.

어린시절 ‘KBS 국악한마당’을 즐겨봤다. 가야금 연주에 꽂혀 눈을 떼지 못했다. 플루트를 전공한 엄마의 영향으로 피아노와 여러 악기를 섭렵할 때 경험하지 못했던 희열을 느꼈다. 9살 때 엄마 손에 이끌려 가야금학원에 등록했다. 정동환(정윤정) 선생의 지도로 가야금을 배웠다. 한민지는 그때의 감정을 ‘할머니가 재밌게 놀아주는 느낌’이었다고 표현한다.

중학교 때까지 가야금을 배웠지만 전공하려는 생각은 못 했다. 아버지는 공부 열심히 해서 공무원이나 회사원이 되기를 바랐다. 그러다가 국악인이었던 어머니 지인의 권유로 국악예고 진학을 준비했다. 당시 서울에는 국립국악고등학교와 국립전통예술고등학교가 있었다. 국립국악고등학교는 정악(正樂) 과제곡이 포함된 시험이 치러지는데 준비할 시간도 부족했고 정악을 해보지도 않아서 국립전통예술고등학교로 진학을 결정했다.

 

 

국립전통예술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이제 국악인의 길로 접어들었다’고 생각했다. 국립전통예술고등학교에서는 다양한 국악을 가르쳤다. 평소에 접하지 않았던 장구와 무용, 노래도 접했다. 뒤돌아보면 고등학교 3년은 고독하고 힘들었던 시간이었다. 특히 입학 후 1년 동안이 그랬다. 중학교 때 체계적인 교육을 받지 않다 보니 국악예술중학교를 졸업한 동기들보다 모든 것이 뒤쳐졌다. 심리적으로 위축되고 흥미도 잃었지만 한민지에게는 오기와 성실성이 있었다. 답답하고 힘들수록 연습에 몰두했다. 고등학교 내내 연습실에 가장 먼저 들어가고 가장 늦게 나오는 학생으로 생활했다. 실기뿐 아니라 내신관리도 열심히 했다. 고등학교 3학년 때는 실기 1등도 해봤다. 딱 한 번뿐이었지만 대단한 성취감을 느꼈다.

 

민속음악으로 방향을 잡다

고등학교 시절 성적이 좋았다. 정악(正樂)을 실기지도하던 선생님은 정악의 기량을 중요하게 보는 서울대 입시에서는 힘들 것 같다고 다른 대학을 추천했다. 하지만 한민지는 서울대로 진학하고 싶었다. 연습실에 틀어박혀 피눈물 나게 연습했다. 국립전통예술고등학교 연습실은 오전 5시 30분에 개방하는데 문을 열어주는 경비보다 일찍 도착해서 기다리다가 들어가기도 했다. 피나는 노력의 결과 서울대학교 국악과에 가야금 전공자 5명 중 한 사람으로 당당히 합격했다. 국립전통예술고등학교 전체 합격자 세명 중 한 명이었고 가야금 전공자 중에는 유일했다. 국악예고라는 산을 넘자 대학에서는 더 높은 산이 기다리고 있었다. 한민지는 고등학교에서 채우지 못했던 정악의 배움을 대학에서 채울 수 있었다. 스스로 정악에 적합한 음악적 성향을 지녔다고도 생각했다. 정적이면서 섬세한 연주방식도 마음에 들었다. 학생들 가운데 절반 이상이 국립국악고등학교 출신이었고 교육적 배경이 다른 동기들과의 경쟁이 존재했지만 그럴수록 더욱 열심히 공부하고 가야금에 몰두했다.

일반적으로 국악예고나 대학교 국악과에서는 실기 위주로 수업한다. 종일 연습실에 틀어박혀 연습하거나 합주하는 게 일상이다. 그러다 보니 이론을 체계 있게 공부하거나 논문 쓸 기회가 많지 않은 실정이다. 서울대학교 국악과에서는 한 사람의 인재에게 연주 기량 외에 이론적인 면을 중시하고 교육한다. 한민지는 실기만 잘하는 가야금 연주자가 되는 것이 싫었다. 이론적 바탕도 튼튼한 연주자로 무대에 서고 싶었다. 이론을 깊이 있게 공부하고 싶어 대학원에 진학했다. 석사과정을 공부하면서 정악과 민속악, 창작음악으로 나뉘어 있는 국악계의 현실을 탈피하고 싶었다. 특정 분야를 편식하는 한정된 음악 활동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다양한 음악을 섭렵하고 공부하는 가운데 고등학교 때 공부한 민속 음악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갖게 되었다.

석사과정을 마칠 때 졸업논문을 쉽게 쓰고 싶지 않았다. 민속악에서도 꽃이라 할 수 있는 산조는 국악기 전공자라면 필수이며 떼어놓을 수 없는 분야다. 교수님과 실기 선생님들도 결국 연주자는 산조를 잘해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한민지는 산조를 학문적으로 연구하고 싶었다. 석사 논문도 ‘산조연구’로 제출했다. 이론적 학습은 연주 활동에도 큰 도움이 되었다. 음악의 원리를 이해하면서 연주의 깊이도 더해졌으며, 음악이 새롭게 보이고 다양하게 해석됐다. 석사과정을 마친 뒤 박사과정에도 진학했다. 대학 강단에 서서 공부한 것을 후배들과 나누고 후학을 양성하고 싶은 꿈도 꾸게 되었다. 제대로 공부한, 제대로 된 연주자로 음악발전에 기여하고 싶은 욕구가 생겼다.

 

평택과 다시 인연을 맺다

 

대학원을 다니며 연주 활동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공부하느라 바빠서 프로젝트 중심의 활동은 하지 못했지만 여러 연주단체의 단원으로 활동하고 함께 협연했다. 한민지의 가장 중요한 목표는 가야금 연주자로 살아남는 것이다. 대학에서 만난 선생님들처럼 열정적으로 강의하면서도 연주기회가 생기면 어디든지 달려가고 싶었다. 대학원 시절 ‘김병호류 가야금산조보존회’에서 활동했다. 김병호류 가야금의 보존과 계승을 위해 조직된 연주단체다. 서울가야금앙상블에서도 활동했다. 세향국악오케스트라 단원으로도 활동했다. 수차례의 독주, 협연, 클래식과 컬러버도 했다.

서울에서 공부할 때는 평택으로 다시 내려올 거라고는 상상하지 않았다. 평택은 성장한 곳, 부모님이 계시는 곳, 집이며 쉼터였을 뿐이다. 연주자의 서울 지향성을 무리한 욕심이라며 정죄할 수만은 없다. 수준 높은 공연기획, 공연공간, 물질적 후원이 서울에 몰려있기 때문이다. 박사과정을 시작할 때쯤 안정적인 연주 활동을 하기 위해서는 취업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더 이상 부모에게 경제적으로 의지하기에도 면목이 없었다. 중앙과 지방을 오가며 부지런히 서류를 제출하고 오디션을 봤다. 탈락의 연속이었다. 대충 기억하기로는 일고여덟 번쯤 실패했던 것 같다. 그러던 중 평택시립국악관현악단 단원 모집 공고가 났다.

평택시립국악관현악단 창단은 국악계의 화제였다. 중앙과 지방을 통틀어 2012년 이후 처음맞은 경사라고 했다. 전체 42명의 단원 중 가야금, 거문고, 대금, 피리, 해금, 아쟁, 타악 파트의 수석연주자 7명만 정규단원으로 선발하고 나머지는 계약직이었는데도 엄청난 커리어를 갖춘 연주자들이 몰려들었다. 가야금과 해금의 경쟁률은 상상을 초월했다. 가야금은 무려 86:1이나 되었다. 평택시립국악관현악단의 시험 과제곡은 여타 국악관현악단의 그것과 달랐다. 특히 민속악(民俗樂) 과제곡의 비중이 높았다. 국악관현악단은 12현 가야금이 아닌 25현 가야금을 주로 사용한다. 25현 가야금은 줄의 개수나 재료를 달리하여 개량된 악기로 서양악기에서 하프 또는 피아노의 역할을 한다. 이것으로 민속악을 연주하려면 무척 힘들다. 그러다 보니 일부 응시자는 시험을 포기하기까지 했다.

마지막 시험이라고 생각하고 준비했다. 결과는 합격이었다. 부모님은 딸과 함께 살 수 있다는 생각에 무척 기뻐했지만 한민지는 분명 좋은데 마냥 기쁘지만은 않았다. 어쩌면 그것은 중앙에서 멀어지는 것에 대한 불안감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불안감이 확신으로 바뀌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운영자와 동료들에 대한 신뢰, 일회성으로 소비되고 사라져버리는 음악이 아닌 기억과 여운을 남기는 음악을 지향하는 평택시립국악관현악단에 대한 믿음이 일말의 불안감을 날려버렸다. 평택이 가지고 있는 음악적 소재는 평택시립국악관현악단만이 살릴 수 있다는 확신도 들었다. 국악인으로서도 민속악을 심도 있게 배울 좋은 기회였다.

 

평택과 함께 꿈꾼다

평택시립국악관현악단은 생각 이상으로 탄탄하다. 민속악 중심으로 레퍼토리를 구성한 것도 바람직했고 박범훈 예술감독과 김재영 상임지휘자가 제시하는 철학과 방향성도 분명했다. 연주자 선발도 매우 잘됐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뒷이야기나 잡음이 없다. 박범훈 감독은 ‘송가인을 부르면 쉽게 객석이 차겠지만 우리는 우리의 음악, 평택시립국악관현악단만의 음악으로 객석을 가득 채우자’라고 포부를 밝혔다. 창단 이후 고된 연습이 시작됐다. 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쉬지 않고 연습한다. 쉬는 날도 연습을 게을리할 수 없다. 지난 9월의 창단연주회는 호평을 받았다. 바라던 대로 객석이 가득 찼다. 수준이 높고, 국악과 평택문화를 결합하려는 노력이 돋보였다는 평가도 받았다.

평택시립국악관현악단의 발전은 진행형이다. 평택시립국악관현악단은 평택문화와 국악을 조화롭게 융합하는 것에 관심이 많다. 어떻게 음악적 깊이를 유지하면서 대중이 공감할 수 있는 연주를 할 것인가에 대해서도 많은 논의를 한다. 한민지는 ‘평택시립국악관현악단’과 함께 상생하며 꿈꾸고 있다. 평택 출신의 연주자로 평택지역 국악발전에 기여하고 싶은 마음도 남다르다. 시민참여형 국악 프로그램도 만들고 싶고 국악 버스킹도 하고 싶다. 그의 꿈, 그가 펼칠 세상이 기대된다.

 

 

 

 

김해규 평택인문연구소 소장
김해규 평택인문연구소 소장

본지는 1월 24일부터 매월 넷째 주에 ‘김해규의 문화살롱’을 싣습니다. 김해규 평택인문연구소 소장이 다양한 문화예술인을 인터뷰해 독자들의 평택 문화를 향한 관심과 이해를 높이고 공감대를 이루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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