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택시나위 부활 프로젝트 학술대회

‘평택 시나위 부활 전망과 과제’ 학술대회는 평택 출신으로 민속음악 근대화의 선각자이신 지영희 명인이 1974년 하와이로 이주하며 종목 지정에서 해제된 중요무형문화재 제52호 ‘경기 시나위’의 부활을 위해 마련됐다.

시나위의 명맥이 끊긴 현재, 아직도 다수의 평택시민이 지영희라는 예술인을 알지 못하고 시나위가 평택의 문화유산이라는 것도 인지하지 못하는 현실에서 지영희 명인을 ‘바르게’ 계승하고, 명인의 명예회복과 복권을 위한 학술적 연구 결과를 싣는다.

요약과 정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 지원 ‘평택 시나위 부활 프로젝트 학술 연구·조사 사업’의 책임연구자인 김헌선 경기대 교수가 기꺼이 맡아주었다.

학술대회의 모든 발표와 토론은 평택시민신문 유튜브에서 볼 수 있다. 편집자 주

 

시나위는 경기남부와 충청도 서부, 
전라도‧경남 서남부 해안가
지역 굿 음악을 일컬는 말 
가락은 육자배기토리 기준 삼아

 

시나위는 종교음악이면서 예술음악,
즉흥적이면서도 동시발생적인
창조력이 필요한 화합의 음악

 

시나위의 생동하는 원리

인간이 만든 모든 문화는 생성되고 소멸한다. 그에 따라 필요한 말도 만들어지고 잊혀진다. 아마도 시나위도 같은 운명을 겪고 있는지 모른다. 우리 평택시에서 반드시 지켜내야 할 시나위라는 말도 같은 운세를 겪는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 말의 뜻을 생각하고, 한 개인의 숙명을 생각하면 그렇게 쉽사리 놓아줄 수 없는 개념이기도 하다.

시나위는 유래가 오랜 말이다. 굿판에서 즉흥적으로 합주되는 음악을 일컫지만, 전국의 모든 굿판에서 사용하는 굿 음악 모두를 시나위라고 하지 않는다. 특별하게 지역적 한정성을 갖는 굿 음악을 말하며, 일정하게 경기도 남부・충청도 서부・전라도・경상남도 서남부 해안가 지역의 음악을 시나위라고 한다.

시나위 가락은 모두 육자배기토리라는 것을 기준으로 삼는다. 육자배기토리라는 말도 어렵기는 마찬가지이며, 다시 풀어서 말해야 알 수 있다. 음악적으로 본청은 반듯하게 펴서 내고, 하청은 무겁게 떨고, 상청은 위에서 아래로 꺾어서 내는 것을 이른다. 토리는 특정하게 전통을 승계한 이에게서만 확인할 수 있는 말로, 지역적으로 특색을 갖춘 소리를 이르는 말이다.

전라남도 진도의 <진도아리랑>에서와 같이 지역의 사투리 색을 분명하게 가진 것과 같이 음악적 지방색을 드러낸 구체적인 토리의 예증이 있다. 토리라는 말이 국악계에 등재된 것은 평택군 포승면 내기리 출신 지영희(池瑛熙, 1909-1980)가 언명한 것에 뿌리를 두고 있다. 말이 말값을 하고 말에서 천년의 향기를 알 수 있듯이 우리에게 자연스럽게 들어온 말이다. 경기도 평택과 안성 등지에서 이 말을 자주 언급하고 있는데, 달리 ‘토올’, ‘토홀’이라고 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국악계에서는 ‘토리’라는 말로 굳어졌다.

육자배기토리로 된 굿 음악이 왜 그렇게 소중하고, 이를 시나위라고 특정하는지 자못 궁금하겠다. 그 비밀을 알아가는 길은 너무나 험난하고 멀게만 느껴져 우리 문화의 이면적인 모색을 필요로 한다. 지금의 현실은 우리의 것을 우리가 알지 못한 채 전통을 간직한 묵정밭을 일구는 일을 해야 하니 무언가 잘못되어도 한창 잘못된 것은 아닌지 의문이 일기도 한다. 하지만 알아낸 사실을 정확하게 정의하고 이를 후대에 전하면서 우리의 말씨와 말투를 일으켜 세우는 일을 해야 한다. 그것이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엄혹한 현실을 부정하지 않는 것이다.

육자배기토리로 된 시나위는 우리 문화의 바탕을 일구었던 것이므로 반드시 공유해야 할 정신세계가 내포되어 있다. 시나위와 육자배기토리는 서로 긴밀하게 연관되고, 역사적인 요인이나 문화적 정체성과 깊은 연관성을 가진다. 아마도 그것은 무속적인 배경을 가진 것으로 일련의 고문화권과 관련이 있는 듯하다. 특히 신라와 백제, 두 나라의 문화적 생성물이며, 두 진영의 역동적 작용과 반작용의 결과로 추론된다.

 

전라도 민속예능인 서울 진출
많아짐에 따라 판소리에서
굿판 목청이나 시김새 못쓰게
하며 시나위 본질적 생성원리 
배격하고, 판소리 음악 어법을
고급화한 산조음악은 그 뿌리인
시나위 부정의 극대화로 나아가

시나위 굿 음악은 몇 가지 특징으로 표현된다. 첫째, 이 음악은 종교음악이면서 아울러 예술음악의 성격을 가진다. 굿을 주재하는 무당의 무가, 춤, 몸짓, 놀이 등에 반주되는 음악을 말한다. 이것은 신을 청하고 신을 즐겁게 하고 신을 보내는 음악인 점에서 각별하다. 신은 굳어져 있지 않고, 변화무쌍하게 변화하면서 움직이는 특성을 갖는다. 그러므로 신을 모시고 신의 특성을 발현하기 위해서 음악은 반드시 살아 숨 쉬어야 한다. 흐르면서 멈추지 않는 신의 입맛과 굿태를 보비위하는 음악이 바로 굿 음악이며, 신의 종류와 신의 내림을 축원하기 위해서 반드시 굿 음악의 활동운화(活動運化)의 면모를 구현해야만 한다.

둘째, 사제자의 신을 돌보기 위한 음악으로, 굿 음악을 반주하는 연주자들 저마다의 가락과 소리가 갈라지면서도 합치된다. 이는 매우 주목할 만한 특징이다. 시나위는 쉽게 정의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이를 쉽사리 재현할 수 있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사제자인 무당과 악사가 공유하고 만들어내는 특징이 있기 때문이다. 오랜 경륜과 체득이 빚어낸 결과물이다. 시나위가 아름답고 높은 수준의 체득에서 나오는 것은 이러한 성격과 무관하지 않다.

 

지영희는 산조가 판소리 가락
본뜨고 이를 여러 악기로 옮기는
것에 심각한 문제의식 느낌

시나위는 악보에 가둘 수 없고, 하나의 가락을 외마디로 표현하지 않는다. 전방위적으로 저마다의 소리를 내면서도 서로 상충하지 않으면서 움직인다. 이것이 이 음악의 생동감이다. 서양의 교향악처럼 하나의 선율을 악기부마다 이어서 한 멜로디로 제주(齊奏, unison)하는 양식을 사용하지 않는다. 지영희는 이를 날카롭게 살펴서 이를 ‘시나위합주’라고 한 것이다. 곧 시나위는 저마다 소리를 내면서도 모두가 하나로 어울리는 놀라운 화합의 음악이다. 그것은 작곡과 편곡이 즉흥적이고 동시발생적으로 구현된 것으로, 창조력이 빛을 발한 결과의 핵심이다.

셋째, 시나위 음악은 우리나라 민속음악의 예술성을 담보하는 것으로 수준이 높은 민속예술뿐만 아니라 우리 민족음악 모두에서 발견되는 특징을 갖는다. 이는 음악의 신명풀이를 즐기되, 고요하면서도 머뭇거리지 않고, 다른 것으로 이어져 변화시키는 특징이다. 이러한 음악은 더욱 확장된 세계 곳곳의 신명풀이 음악에서 모두 발견되는 것이기도 하다. 시나위의 음악에서 창조적인 미립을 얻어내고, 이를 원용하게 되면 우리 민족음악과 예술은 세계에 모든 사람을 격발시키는 작용을 일으킬 수 있다.

 

시나위 가운데 가장 격조 높은
음악은 경기도와 평택 시나위였을 
가능성 커, 현장에서 이 시나위 
없어졌지만 전통 살려야

K-POP에서 발현된 우리 음악의 세계화에 이와 같은 시나위의 생동 원리가 작동한 것이리라 본다. 아프로-아메리칸의 재즈(Jazz)도 동일한 원리를 일부 가지고 있으나, 엄격하게 보면 전혀 다르다. 우리에게서는 이른바 ‘각뜯어먹기’의 원리로서 음악적 생동감을 만들어내는 원리가 있다. 저마다의 연주는 같으면서 다름을 통해 조화를 이루는 것이기도 하다.

 

지영희 시나위의 이면적 진실

지영희는 시나위의 굿판에서 자신의 예술을 다졌다. 그는 ‘산이판’에서 굿을 하고, 그 전통 속에서 놀라운 신명의 원리를 체현한 바 있다. 그가 세습무 집안이라는 대물림을 숙명으로, 집안에서 굿을 하고 집굿과 마을굿에서 몸소 음악을 체득한 점을 상정하는 것이 어렵지 않다. 사뭇 천대를 받고, 괄시를 겪으면서 그 속에 시나위의 전통이 있다는 점을 체달하게 된다. 굿 음악을 구실삼아 민요를 발견하고 농악의 전통을 익히면서 자신의 음악적 영토를 일구며, 그 속에서 민속예술의 심층을 확대하고 심화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천대와 괄시로도 못메운 우리의 민족음악, 그 고갱이가 바로 굿 음악임을 절감하였다.

경성에 올라왔을 당시 그가 가진 굿 음악은 값진 구실을 하였다. 당대 최고의 명인이라고 할 수 있는 한성준을 만났을 뿐만 아니라, 여러 명인들이 자신의 뿌리를 올곧게 일러주고 뿌리를 다져 캐게 도와주었다. 지용구, 방용현, 박종기 등을 통해서 우리 시나위의 전통적 면모와 실제를 가득 채워나갈 수 있었다. 또한 지용구를 통해서 굿판의 핵심적 이론을 터득하면서 그의 예술정신의 곳간을 알차게 넓힐 수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지영희는 고지기 노릇만을 자처하지 않았다. 이를 섬세하고 풍부하게 만드는 방법과 원리를 자득하였다. 또한 최승희를 비롯하여 여러 인물에게서 우리 음악의 세계적 가능성을 터득하였다.

하지만 이와 같은 풍조 속에서 지영희는 적지 않게 위기의식을 느끼고 있었다. 시나위의 변질과 왜곡이 도전적으로 진행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시나위의 주요한 인물들이 각 지역에서 서울로 진출하면서 관료계나 예술계에 거침없이 하이킥을 하고 있었다. 특히 전라도의 판소리와 산조는 높은 음악적 성취에도 불구하고 이면에서 적지 않은 폐단을 자아냈다. 이러한 당시의 상황으로 인해서 지영희는 깊은 성찰을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전라도 출신의 광대들과 예능인의 약진은 오히려 지영희가 현재적 문제를 각성하는 계기를 제공한 것이다.

전라도 민속예능인의 경성 진출과 발호는 두 가지 측면에서 상당한 문제를 제기하게 되었다. 하나는 이들의 소리 자체에 시나위의 본질적 생성의 원리를 극도로 배격하는 요소를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판소리에서 그들은 자신의 존재 부정을 시행한 바 있다. 그 예증으로 판소리에서 가장 금기시하는 몇 가지 소리가 있다. ‘왼목’과 ‘노랑목’ 등이 그것이다. 왼목을 쓰지 말라고 하는 것은 단조로운 소리를 경계하는 말이다. 노랑목은 육자배기의 굿 소리로 쓰는 목을 이른다. 이는 세속적인 소리 청을 쓰는 것인데, 굿의 음악을 말하는 것이다. 판소리 창자들은 결국 굿판의 목청이나 시김새를 쓰지 말라는 것으로 경계를 삼은 것이다. 이것은 1차적으로 시나위를 부정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다른 하나는 판소리 다음으로 산조 음악이 창궐한 것이다. 산조의 등장은 판소리의 등장과 궤적을 함께 하는 것이다. 산조가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산조는 이면적으로 판소리의 음악 어법을 한층 고급화하여 이를 악기로 모방하고 발현함으로써 새로운 진전을 이룩한 것이다. 하지만 그 원뿌리인 시나위의 관점에서는 시나위 부정의 극대화를 이룩한 것이므로 이것을 되돌려야 마땅하지만, 이러한 원칙은 지켜지지 않았다.

이 같은 부정의 극대화는 창작의 원리로 이어가지 못했다. 지영희는 산조가 판소리의 가락을 본뜨고 이를 여러 가지 악기로 옮겨가는 점에서 문제의 심각성을 감지하였다. 지영희가 판소리나 산조의 가락을 모방하고 재현하는 것을 문제 삼은 것이다. 현악기나 관악기의 가락을 산조라고 하는 것을 지극히 경계한 사정이 여기에 있다. 지영희는 판소리와 산조의 것을 이식하는 시나위 부정의 방편을 한껏 경계한 것이다. 시나위 본연의 핵심을 왜곡하거나 금기시 하면서도 판소리와 산조가 시나위를 확장하는 것으로 보는 시각과 심각한 대립의 양상을 보이게 된다.

지영희가 지키고자 한 것이 있다. 시나위를 고수하는 것이다. 피리시나위, 해금시나위라는 용어를 쓰면서 피리산조, 해금산조 등으로 말하는 것을 극력 부정하고 극구 말려 말한 것은 이러한 사정과 무관하지 않다. 시나위를 시나위로 지켜내지 못한 것을 한껏 고수하고 다른 판소리나 산조 등의 발호를 용납하지 않으려고 하였던 것이 저간의 사정이다. 지영희의 입장에서 산이굿판에서 이룩한 자신의 전통을 보면 오히려 굿판의 음악이 점점 몰려나가는 것을 보는 일이 마음 아픈 일이었을 것임이 선명하게 확인된다.

시나위 가운데 가장 격조가 있으며, 품격이 높은 굿판의 음악은 바로 경기도 시나위, 평택 시나위, 지영희가 체현한 내기리의 시나위였을 가능성이 적지 않다. 이 점에서 어떠한 음악적 동향과도 타협할 수 없는 돌올한 경지를 이룩한 것이 발견된다. 현재 연구자들이 이를 밝혀 적극적으로 말하지 않았다. 오히려 부정만이 있을 따름이다. 하지만 경기도 남부의 경기도 굿판 음악, 곧 집굿과 마을굿을 통한 이 전통적인 시나위 발현은 지금 현장에서 없어졌음을 인정한다. 하지만 이들의 뼈대와 뿌리를 생각하면, 이 전통은 묵과할 수 없다.

오늘 경기도 남부 굿판의 음악은 몇 가지 점에서 각별하게 주목해야 한다. 첫째, 장단의 격조 높음과 다양성이다. 유명세를 얻고 있는 동해안의 굿 음악이나 타 지역의 굿 음악이 다가설 수 없는 놀라운 면모가 경기도 남부의 굿 장단에 있다. 진쇠, 부정청배, 군웅청배, 배다리, 터벌림, 올림채, 신모듬, 권선, 부정놀이, 삼공잽이, 푸살, 섭채, 오늬섭채 등의 장단은 이를 말해주는 결정적인 것들이다. 장단이 집을 짓거나 틀을 짜서 초보와 중보 및 전문을 이루는 이채로운 작동 원리가 있다. 아울러서 이 장단의 활용을 통한 굿의 전개는 아름답고 동시에 거칠고 소박한 힘이 양면으로 작동한다. 밀고 당기면서 장단의 다채로움에 얹어가는 것은 경기도 남부 굿 음악만의 이채로운 면모이다.

둘째, 굿판의 시나위가 매우 정교하여 가무악희(歌舞樂戱)의 면모가 정밀하게 맞아떨어지는 지점에 놀라운 신명의 극렬함을 자아내는 특징이다. 아속의 관점이 사라지고 정적인 것과 동적인 것이 절묘하게 만나는 지점의 황홀함이 여기에 깃들어 있다. 그러한 면모는 야박한 것과 다르고 저속하지 않은 풍모를 이루는 점에서 남다르다. 타악과 선율이 오묘하게 만나는 지점이 시나위가 있는 굿판에서 보이는 특징이다. 경기도 남부의 굿판 시나위는 은은하면서도 튀지 않고, 착 가라앉은 빛깔을 보여준다. 노자가 강조한 광이불요(光而不耀), 화광동진(和光同塵)의 이상적 면모가 바로 시나위에 있다고 한다면 지나친 말이 될까?

 

지영희의 시나위와 농악의 오묘한 융합

지영희는 자신의 시나위 터전에 다른 영토를 하나 체득하여 넓히는 보물을 덧보탠다. 지영희가 남사당의 최군선패와 복만이패에 대략 2년 동안 몸담아 음악을 이수한 점이 두드러진다. 이 사실은 새롭게 주목된 것이지만, 남사당패의 웃다리풍물에 정통한 것도 가히 특기할 바이다. 남사당패의 웃다리풍물에 대한 경도는 매우 인상적이다. 특히 그가 정리한 농악의 정수는 웃다리풍물의 가락을 육보로 정립한 것으로 최초의 기록이 아닐까 한다. 정간보로 변화무쌍한 웃다리풍물의 정수를 담으려는 면모가 있었음을 알게 된다.

농악과 같은 타악이 시끄러운 음악이 아니라고 생각하였다. 남사당패의 음악과 깊은 관련이 있지만, 이 이면에 음악의 깊은 원리가 있어서 농악과 시나위에서 같은 것임을 알게 되었던 것 같다. 농악이 이룩한 원리가 시나위와 같다는 점은 주목할 만한 민속음악의 사상이라고 파악한 것으로 보인다.

 

시나위 존재 자체를 지우려는
세력과 시나위 존재를 지켜내려는
세력의 대립과 갈등 속에서
결국 하와이 이민 선택하며
문화재 지정 삭제되는 결과 초래 

경기도의 농악을 길군악칠채, 마당길채(마당일채), 자진가락 등으로 전개하고 한 장단의 내드림을 내는 홑채라는 ‘초보’, 이를 변화시켜 겹채로 쓰는 ‘중보’, 이 두 가지를 굴려 변화시켜서 진풀이에 적용하여 펴는 가락과 오그리는 가락의 활용인 ‘전문’ 등의 운용 원리로 정리하였다. 즉 가락 내드림을 변화하는 원리이다. 가락을 연결하여 변화시키는 것의 원리가 더 있어서 주목된다. 혼소박의 고형장단과 복합박의 중간장단, 단순박의 마무리장단 구성은 단순하지 않다.

동일한 원리가 굿판의 산이 음악에도 있다. 가령 도살풀이-모리-발뻐드레 등이 연계되는 것이나, 이와 달리 진쇠-올림채(암채와 숫채)-자진굿거리 등의 짜임새에 의한 운용이 이와 같다. 한 장단을 내드리고, 내드림을 암채와 숫채로 굴려 변화시키고, 잦은 가락으로 마무리하는 원리도 같은 발상에 근거한다. 무악은 현란하고, 농악은 거칠지만 이 가락을 통해서 특별하게 발현한 음악적 원리인 점에서는 동일한 면모가 있다.

지영희에 의해 우리 민속음악의 양대 원리가 정리된 것이다. 일자무식이 가장 높은 인식과 원리를 구현한다고 하는데, 이 점에서 깊은 의미를 구현한다. 천대와 괄시의 천덕꾸러기로만 알던 우리 민족의 삶이 실제 순도 높은 것을 일구어내었음을 말한다. 이처럼 애틋하게 무악과 농악에 자리한 것은, 따지고 보면 이러한 음악의 저변에서 우리 음악의 놀라운 점을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생활에서 우러난 음악과 예술, 투박하지만 강직하고 아름다운 면모가 여기에 있는 셈이다.

지영희는 그의 유작에 이러한 놀라운 성찰을 담고 있다. 아무도 돌보지 않은 것에 깊이를 더하고, 이미 알았으나 잘 표현하지 못한 것에 꼭지점을 높이는 일을 하였다. 그가 발견한 업적은 우리 민속음악의 양대산맥에만 해당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들 음악의 성과를 합쳐서 민족음악의 세계화에도 앞장섰다. 민요를 발견하고 이를 이론화하는 작업과 우리 민속음악의 체계화를 도모하면서 자신의 삶을 소진하였다.

타협으로 평탄한 삶을 보장받을 수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못하였다. 지역적 출신지가 다르다는 이유로 시나위의 터전이 다른 이들과 마찰하고 갈등을 겪어야 했다. 하지만 진실로 자신의 민속예술을 적대시하는 도전적인 세력에 대하여 적극적으로 맞서는 데까지 나아갈 수는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제도권에서 보이는 이면적인 우회전략도 그렇게 탐탁하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같은 바탕에서 몸부림치면서 이들과 맞서 싸우는 것이 과연 쉬운 일이었겠는가. 그의 풍부한 경륜이나 체감은 예술계나 학계에 쉽사리 수용되지 않았던 것 같다.

 

지영희가 하와이로 간 사정

1960년대와 1970년대에 우리 민속음악계는 무한한 가능성을 보였지만 음악을 둘러 싸고 보이지 않는 영역 다툼의 시대에 살았던 것 같다. 정치가 문란하고, 사회적 분위기가 안정되지 않은 상황에서 이러한 분열과 다툼이 이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지영희와 성금연의 고고한 예술혼은 현실적인 장벽에 가로막히게 된다. 그들은 가야금산조와 시나위의 무형문화재 보유자로 지정을 받았지만, 이것이 빌미가 되어 오히려 시기와 질투의 대상이 된 것 같다. 작은 하나의 사건이 사태를 버르집었다.

지영희가 작성한 국악예술학교 교장인 박헌봉에게 보낸 편지글인 ‘박헌봉 선생님 전상서’에 당시의 심정과 사정이 적혀 있다. 지영희 명인의 글에 따르면 최종적으로 ‘박귀희와 김소희가 한 동아리가 되고, 이의 대척 지점에 지영희와 성금연이 한 동아리가 되었으며, 국악협회의 김종철 이사장이 개입한’ 것으로 추정하여 하소연하고 있다. 그 사정이 무엇인가? 민속음악계에 드리웠던 명예나 주도권을 둘러싼 갈등이 그 이면에 보인다. 아울러서 이를 싸움의 방식으로 끌어낸 것도 탐탁한 일은 아니다. 하지만 본질적으로 본다면, 이 싸움의 핵심은 우리 음악의 본질인 시나위를 지켜내려는 노력이다.

 

이후 민속예술 시나위는 하향곡선
시나위 정수 잃어버린 채 제도권
속에서 음악 이어졌지만,
민속 에술 영혼 없어지는 파탄 
맞이하게 된 것은 분명한 사실

굿판의 예술을 주안점으로 하는 견해와 함께 이 자체를 무시하고 천시하는 견해의 다툼이 요체라고 하겠다. 시나위의 존재 자체를 지우려는 세력과 이와 달리 시나위의 존재를 지켜내려는 세력이 다투게 되었다. 싸움은 그 자체의 대립과 갈등으로 그치지 않고, 법적 소송과 공방으로 이어졌다. 그렇게 해서 진흙탕에서 서로 피를 말리는 싸움이 이어졌다. 결국 지영희와 성금연이 하와이로 이민 가는 일이 벌어지게 되었다.

지영희와 성금연의 해외 이주는 중요무형문화재 해촉으로 이어져 성금연의 ‘가야금산조’와 지영희의 ‘시나위’ 문화재 지정은 삭제되었다. 이 모든 싸움의 알력과 갈등은 무엇을 위한 투쟁이고, 어떠한 이익을 얻는가에 관심은 별로 없었던 것 같다. 그렇게 서로 갈등하고 동아리 지어 민속예술이 파탄되고 파열음으로 세상을 잠시 시끄럽게 한 것이었다. 정작 민속예술 시나위는 더욱 하향곡선을 그리게 된 것이었음을 부정할 수 없다.

하와이에 이르렀던 삶은 시난고난한 것이 아닐 수 없었다. 그곳에서 몸부림을 치면서 얻은 것은 가족의 건사와 함께 터전을 잃은 이들의 빈 메아리였던 것으로 보인다. 상대적으로 우리나라 이곳에서 사는 사람은 안락과 복락을 얻었는지 잘 모르겠지만, 시나위의 정수를 잃어버린 채 제도권 속에서 음악이 이어진 것을 우리는 쉽사리 감지할 수 있다. 이해득실을 따진다면 민속예술의 영혼이 없어지는 파탄을 맞이하게 되었던 것이 분명한 사실이다.

지영희는 하와이에서 여러 가지 자잘한 수확으로 얻은 것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진정한 바탕을 찾지 못하고 잠재적으로 시린 고난이 거듭 중첩되었을 가능성이 작지 않다. 오로지 자신을 지켜낼 수 있었던 것은 민속음악의 유산을 체계적으로 정립하는 작업이었다. 모국어로 할 수 없었던 음악, 파란 눈의 제자들을 가르친다고 하여도 과연 이것이 성립 가능한 것이었는지는 구체적으로 살필 수 없었다.

 

지영희 시나위는 이대로 죽을 수 없고
부활시켜야 마땅, 지영희는 사회적
공공재 성격 뚜렷히 갖고 있어 이를
훼손하거나 왜곡해서는 안돼

고국으로 돌아가는 비행기를 하염없이 바라보면서 그 그리움으로 우리나라의 한켠을 멀리서나마 애타게 바라보아야만 하였다. 자신이 지키고자 했던 시나위를 떠나온 그곳에서 잘 지켜지고 있는지, 동시에 민속유산의 전통은 어떻게 이어져야 하는지 깊은 고민에 사로잡혀 살아가야 했다. 상처를 입은 사람은 쉽사리 모든 것을 하지 못한다.

지영희는 그 절절한 마음으로 민속음악의 체계를 서술하려고 저작을 집필하였다. 지영희는 막바지 사업을 고독과 철저한 고립 속에서 진행해야 하였다. 그 결과 우리는 힘들여 수고하지 않고 지영희의 유산을 간접적으로 볼 수 있게 되었다. 그가 말년에 민속음악 장단 전반에 대해 정리한 작업은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기에 충분한 결과이다. 그리하여 민속유산이 아니라 민족유산이 되었다.

 

지영희 시나위의 부활과 도약

지영희 시나위는 이대로 죽을 수 없다. 지영희 시나위를 부활시켜야 마땅하다. 그리고 위대한 도약을 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야만 한다. 지영희를 사회적 공공재로 기리면서 이 원천을 이 시대의 커다란 쓰나미로 거듭나게 하여야 한다. 시나위가 뻗을 자리를 마련하여 평택시와 우리나라의 문화유산으로 탈바꿈시켜야 한다. 그렇게 해서 우리의 유산을 튼실하게 돌보는 일을 세계인 모두 누구나 하게 하여야만 한다.

지영희 시나위는 4중의 층위를 담고 있다. 하나, 지영희 시나위는 지영희 개인의 경험이 녹아 있는 창조물이다. 둘, 지영희 시나위는 평택 사람 지영희가 이룩한 평택시나위로 확장과 심화가 가능하다. 셋, 지영희 시나위는 경기도 남부 시나위의 본보기이다. 넷, 지영희 시나위는 우리나라 시나위의 본령이다. 이 4중의 가능성을 열어두고 이 문제에 대해서 깊은 고민을 해야만 하고, 다각도로 답을 구해야만 한다.

 

평택시는 지영희 시나위 안정적으로
지켜낼 수 있는 최적의 조건 보유
지영희 유산에 대한 총체적 자료
집적과 시대에 맞게 정본화작업 해야

우리의 심장은 누구를 위하여 뛰고 있는가? 하는 물음에 대한 진정한 반성을 해야만 한다. 아울러서 이러한 노력이 누구에게 이익이 되고, 어떠한 집단의 요구와 체제에 부응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와 직결시켜 보아야 한다. 지영희를 추구하는 것이 누구에게 항구적이고 지속적인 가능성을 마련하는가? 하는 문제를 생각하게 한다.

나의 지영희에서부터 시작하여 우리 모두의 지영희까지 층위 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다시 한번 지영희는 사회적 공공재의 성격을 뚜렷하게 가지고 있다고 말하고자 한다. 이를 훼손하거나 왜곡하는 어떠한 인물이나 이익집단으로부터 공정성을 확보하는 일이 참으로 필요하다. 이익이 아니라 향유하고 공감하는 자체로 이를 확산하는 작업은 중요한 결과를 낳을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평택시는 지영희 시나위를 안정적으로 지켜낼 수 있는 최적의 성격을 가진다. 시나위를 시나위답게 만들 수 있는 주체로 가장 소중한 제반 조건을 보유하고 있으며, 지금까지 다면적인 활동을 전개하였다. 현재의 여러 가지 조건을 활용하면서 이를 우리 모두의 것으로 확장할 수 있는 창조적 활용의 본보기로 구현할 수 있음이 자명하다. 요즘과 같은 문화적 호기심이나 우리의 문화에 대한 목마름에 응대할 기제와 콘텐츠를 평택시가 가장 유력하게 지니고 있다. 그것을 무한하게 활용하는 일이 필요하다.

화급한 과제는 지영희 유산에 대한 총체적 자료 집적과 이를 이 시대에 맞게끔 해석하기 위한 가능성을 여는 일이 필요하다. 이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정본화 작업을 통해서 필요한 자료를 여러 가지 방편의 용도로 짓는 작업을 하여야 한다. 이 작업의 모든 역량을 집결하여 장차 지영희 시나위로 나아갈 수 있는 통로를 마련해야 마땅하다.

이 시나위의 원천으로 후속세대에게 창조적 역량을 넓히도록 돕는 일이 필요하다. 하나의 왼가락으로 판박이를 만들라고 하는 것은 동반자살하자는 왜곡된 청유이다. 오히려 휘뚜루마뚜루 저마다 창조하는 즐거움을 갖게 해야 한다. 시나위의 즉흥연주를 잊지 않아야 한다. 저마다 소리 지문이 묻어나는 신명풀이 창조를 해야 한다. ‘각뜯어먹기’ 형태의 예술적 창조를 해야 한다.

지영희 시대의 시나위가 있었듯이 지영희 이후의 시나위가 만들어지는 작업을 해야만 한다. 하지만 과거의 것을 본받으면서도 변화시킬 줄 알아야 하고, 아울러서 새로운 것을 창조하되 단아한 지영희 시나위에도 능해야 한다.(苟能法古而知變 創新而能典) 이것이 지영희 시나위의 핵심이자 부활과 도약의 단서가 된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정리 김헌선 경기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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