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택읽기

임정애2004년 동서문학상 수필부문 등단 현재 평택에서 수학학원 운영 
임정애
2004년 동서문학상 수필부문 등단
현재 평택에서 수학학원 운영

이름만으로 한 편의 시가 되기에 충분했던 노을길을 걸었다.

일과 가정의 경계 넘나들며 회사에서도 엄마로서도 어느 것 하나 완벽하지 못한 채 어정쩡한 순간들을 숨 가쁘게 살아오며 내 나이 지천명이 되었다.

지난 세월의 고단함과 허전함이 가슴에 스밀 때쯤 내 고향 섶길 중 한 코스인 노을길을 걸었다. 반갑게 인사 나누고 이름표 받아 목에 건 후 빨강과 초록빛 리본을 배부받아 해설사의 안내에 따라 걷기 시작하였다.

노을길은 16개의 코스 중 2코스로 평택호 변의 노을을 감상하며 바쁜 일상 속 잠깐의 휴식이 되기에 충분했다. 안정리 로데오 거리를 지나 농성을 거쳐 내리공원 평택호 제방길을 지나는 16km를 완주하였다.

K6 부대 앞에는 한미 친선 문화축제가 열리고 있었고, 다양한 인종의 사람들이 흥겨운 음악에 맞추어 흥겹게 축제를 즐기고 있었다. 출발까지 잠깐의 여유가 있어 커피 한 잔 마시며 즐겁게 구경하였고 일행과 제기차기도 체험하며 잠시나마 동심으로 돌아가는 시간도 가졌다.

 

우리는 각자 시간의 조각들을
맞추고 살아가는 길 위의 
사람들이 아닐까?
슬프게도 아름다웠던 노을은
잠깐의 황홀을 남기고 순식간에
저 산 너머로 내려앉았다.

번잡한 거리를 지나니 온전히 가을과 마주 할 수 있었다. 혹시 모를 사고에 대비하여 선두와 후미에선 끝임 없이 신호를 보내주셨고, 걷는 사이에도 퇴색되거나 섶길의 이정표가 필요하다 여겨지는 곳엔 어김없이 빨강과 초록의 안내 리본이 바람과 함께 매달아졌다.

평택에 터전을 잡고 살아오며 무심코 지나쳤던 풍경들이 여러 봉사자분들의 노력과 정성으로 한편의 작품으로 되살아나고 있음을 느끼며 잔잔한 감동이 밀려왔다.

농성의 푸르른 언덕길엔 버스킹 공연이 펼쳐지고 길가엔 여름의 자취들이 익어가고 있었다. 일상에서 조금 벗어나 계절의 변화와 자유, 여유를 느낄 수 있었다. 시선은 풍경과 바람과 푸르고 높은 하늘에 머무르고 있었다.

신선한 풀 내음이 향기로웠고, 바람에 온전히 몸을 내맡기고 흔들리는 억새의 은빛물결에 눈이 부셨다. 잔잔한 웃음과 침묵이 공존하는 시간 속에 올곧이 나와 마주할 수 있었다.

해설사의 설명은 풀 한 포기, 바람 한 자락 어느 것 하나 의미 없는 것이 없음을 일깨워 주었다. 낯설지만 어색하지 않은 길을 함께 걸으며 뜨거웠던 대추리의 함성이 되살아나는 듯했다.

고통스럽더라도 견디고 스스로 극복해야 하는 순간이 있다. 다른 사람이 대신해 줄 수도, 그래서도 안 되는, 각자의 몫으로 감당해야 하는 그런 순간들, 그 순간 우리는 충분히 용감했다. 어느 작가의 말처럼 살아있는 일은 몇 번의 무덤을 만드는 일인지도 모른다.

휘돌아 감기는 바람에 가슴깊이 심호흡하며 가을이 내려앉은 들판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 평택호 제방길을 걸었다. 때론 침묵이 몇 마디의 말보다 더 큰 울림을 전해 줄 때가 있다. 서쪽 하늘에 붉은 빛깔이 서서히 깔리자 걸음을 멈추고 침묵 속에 고개를 들었다.

저 노을의 붉은빛을 보기 위해 우리는 얼마나 치열한 시간을 살아 왔던가. 아무렇지 않은 일상을 살다가도 슬픔이 묵직하게 방문하면 마음 둘 곳 몰라 서성이곤 했고 마음이 서걱서걱 긁혀도 묵묵히 견디며 앞으로 나아가곤 했다.

인생은 자그마한 언덕이었다가 어느 때엔 끝없는 숲이 되기도 했다. 우리는 각자 시간의 조각들을 맞추고 살아가는 길 위의 사람들이 아닐까? 슬프게도 아름다웠던 노을은 잠깐의 황홀을 남기고 순식간에 저 산 너머로 내려앉았다.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다.

내일의 노을은 또 다른 이야기를 가지고 내 앞에 마주할 것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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