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시대에 그림자극의 교육적 효용을 말하다
생각할 시간조차 주지 않고
메시지를 주입하는 영상에
길들인 아이들에게
느리지만 인간적 감성
키워주고 싶은 바람으로
2020년 2월 ‘인트리’ 설립
그림자극의 기원을 두고 많은 학자가 기원전 수천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추정한다. 세계 여러 지역에서 독특한 문화와 전통으로 발전돼 왔으며 우리나라 역시 고려시대부터 그림자극이 있었다고 한다.
어두운 밤 손가락으로 동물 모양을 만들던 놀이이자 유희였던 그림자극은 1960년대 들어 교육적이고 예술적인 목적으로 활용되기 시작했다. 이후 영상매체의 발달과 보급으로 그림자극을 찾는 사람은 조금씩 조금씩 줄었다.
잊고 지냈던 그림자극의 매력을 널리 알리고 싶다는 기업인이 평택에 있다고 한다. 그림자극에 연계한 교육사업을 하는 사회적기업 (주)인트리와 그림자극 전문극단인 다온그리메의 박경민 대표(46)다. 그림자를 상징하는 단복이라며 검은옷을 고수하는 그가 추구하는 그림자극에 대해 들어봤다.
인트리를 창업하기 전 이야기부터 듣고 싶다.
1978년 부산에서 태어났다. 대학 졸업 후 2년간 부산의 한 식품무역회사에서 일했고 일본어 통번역·강사로 일하다 평택에 있는 일본계 기업에서 일본어 강사 제안을 받았다. 이후 평택에서 프리랜서로 활동하다 남편을 만나 2009년 평택에 정착했다.
두 딸을 키우면서 교육공학 석사 학위를 받고 수업컨설턴트 자격증을 취득했다. 2017년 평택여성새로일하기센터에서 진로큐레이터 교육을 이수해 자격을 취득하며 평택지역 초중고에서 진로교육을 진행했다.
그림자극은 불편한 장르라 매력
이 불편함이 상상력이나
생각하게 만드는 여백을 줘
인트리는 그림자극을 연계한 교육을 하는 기업이다. 여러 교육 프로그램 중에서 그림자극을 선택한 계기가 있었는가.
저 역시도 익숙한 미디어 세대로 자랐다. 당연히 증강 현실(AR)이나 가상 현실(VR)을 접목한 영상을 교육에 활용하는 것이 효과적이라고 생각했다. 이 생각이 평택시 스마트폰 중독 예방 강사로 한 유치원에 방문하고 바뀌었다. 인사도 하기 전에 아이들이 “영상을 먼저 보여주세요”라고 하더라. 교육 영상을 준비해 갔지만 틀 수가 없었다. 어떤 교육을 하러 온 것인지 알려 하지도 않고 인사를 나누지도 않고 흥미로운 영상만 찾는 아이들이 충격적이었다. 디지털 매체를 활용한 교육만이 정답일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영상이라든지 디지털 매체보다 아날로그적으로 접근해보자고 생각했다. 그러다 도서관에서 어린이도서연구회 활동을 하며 접한 그림자극이 떠올랐다. 그림자극을 1도 몰랐지만 영상과 비교했을 때 소리와 움직임에 더욱 집중할 수 있어 교육과 연계하면 적합하다고 판단했다. 생각할 시간조차 주지 않고 메시지를 주입하는 영상에 길들인 아이들에게 느리지만 인간적 감성을 키워주고 싶은 바람으로 2020년 2월 ‘인트리’를 설립했다. 법인 설립 후 문화체육관광부와 경기도 예비사회적기업으로 동시에 선정됐다. 법인명과 별도로 ‘다온그리메’라는 극단명을 만들었다.
그림자극이 사업 아이템으로 적합하다고 보기엔 어렵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든다.
그림자극이란 예술 장르를 통해 좋은 일을 하고 싶었다. 돈을 벌겠다는 생각은 못 했다. 그러다 사회적기업을 알게 돼 사회적경제 아카데미 등 창업 과정을 차근차근 밟았다. 2019년 7월부터 우리나라에서 한 곳뿐인 그림자극 극단의 대표를 스승으로 모시고 인형 만드는 법부터 배웠다.
어려움도 많았다. 2020년 2월 미트리를 설립하자마자 코로나 팬데믹이 시작됐다. 아이들 대상 현장 교육은 꿈도 꿀 수 없는 상황이 2년 넘게 이어졌다. 이에 사회교육으로 사업 영역을 확대해 금전적 어려움을 해결할 수 있었다. ‘미대촉(미세먼지 대책을 촉구합니다)’ 인터넷 카페의 의뢰로 창작그림자극 ‘먼지 괴물 잠재우기 특공대’을 제작했다. 송탄보건소 제안으로 자살예방 유아생명 존중 그림자극 사업을 진행했고 평택보건소·안중보건지소까지 사업을 확대했다.
앞으로 그림자극을 지금보다 널리 알리고 싶다. 인형극뿐 아니라 손으로 하는 그림자극, 몸으로 하는 그림자극도 시도하고 싶다. 최근 평택시문화재단이 생겨 새롭게 할 수 있는 사업을 준비하고 있다. 그림자극을 할 수 있는 그림자극 키트를 개발했고 그림자극 체험을 구상 중이다.
그림자극의 매력이 무엇이라고 보는지.
그림자극은 멋진 예술 장르이면서 불편한 장르라 매력이 있다. 이 불편함이 상상력이나 생각하게 만드는 여백을 준다. 모든 것을 보여주지 않아 파악할 수 있는 정보가 적기 때문에 새로운 관점으로 보는 기회가 되는 셈이다. 그림자극에 사용하는 인형은 표정이 하나뿐이다. 표정이 하나뿐인 까만 인형이 무대를 왔다갔다 하니 무슨 흥미를 보이겠는가. 그런데 배우들이 인형을 조정하고 대사를 입히면 신기할 정도로 다양한 표정이 생겨난다. 상상하지 못했던 것이 ‘짠’하고 나타나는 셈이다. 아이들은 생각하고 상상하게 된다. “저게 뭐지?” 궁금해하고 “무엇을 이야기하려는 걸까” 기다리고 “아! 그랬구나” 깨닫게 된다.
무엇보다 많은 정보와 색감을 제공한다고 해서 반드시 머릿속에 기억되는 것이 아니다. 아이들에게 수용량이 있는데 그것을 넘치게 보여주면 오히려 소용이 없어진다.
평택항 홍보아카데미 그림자극처럼
평택과 평택에 살았던 사람들의
기억과 이야기를 담은 작품
계속 만들고 싶어···
그렇다면 인트리의 그림자극은 어떤 장점이 있는가.
주제와 관객에 맞춰 대본을 쓰고 무대를 만들 수 있다. 미대촉 의뢰로 제작한 ‘먼지 괴물 잠재우기 특공대’를 예로 들어보자. 아이들에게 미세먼지는 알기 쉬운 개념이 아니다. 미세먼지를 알려주기 위해 ‘먼지 괴물’이라는 캐릭터를 만들고 이 캐릭터를 통해 미대촉이 아이들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를 담아냈다. 이때 직접적으로 정보를 전달하기보다 동화에 빗대 이야기한다. 먼지 괴물을 피하려면 손을 깨끗이 씻어야 해, 양치질을 꼭 해야 해 이런 식으로 말이다. 환경을 지켜야 할 필요성을 그림자극을 통해 쉽고 편하게 깨닫게 한다.
5월 16일 시작한 평택항 홍보 아카데미에서 평택항의 역사와 유래를 소개하는 그림자극을 공연했다. 이 작품도 창작극인가.
지난해 평택당진항발전협의회 최성일 회장의 제안으로 제작했다. 2024년 제2회 평택항 홍보 아카데미에 학교방문 아카데미를 새롭게 개설할 계획인데 이를 위해 평택항의 역사와 유래를 소개하는 그림자극이 필요하다고 했다.
제안을 받았을 당시 초등 5학년이던 둘째 딸이 교과 과정에 ‘우리 고장 알기’가 있어 평택항홍보관을 다녀왔다고 하길래 “평택항이 어떤 곳이니”하고 물어봤다. 그랬더니 “거기 자동차 싣는 큰 배가 있다” 이렇게 얘기하더라. 현재 모습에 초점을 맞추기보다 그곳의 역사와 개항 이후 어떻게 변화했는지, 그곳에 어떤 사람들이 있었는지를 담아야겠다고 판단했다. 조사 결과 평택항 일원은 이전에는 대진(大津)이라고 불렸던 곳이었고 이 한가운데에 영웅바위가 있음을 알게 됐다. 그래서 그림자극의 배경으로 영웅바위를 만들어 넣기도 했다.
부모 세대에서 자식 세대로 전해지는 이야기는 힘이 있다. 우리는 이야기를 기억함으로써 그 이야기가 품은 기억과 교훈을 전한다. 평택항 홍보 아카데미에서 공연한 그림자극처럼 평택과 평택에 살았던 사람들의 기억과 이야기를 담은 그림자극을 계속 만들고 싶다.
그림자극을 더 알리기 위해 더 큰 도시로 가야겠다는 생각을 해본 적은 없는지 알고 싶다.
평택에서 태어나지는 않았지만 평택에서 결혼하고, 아이 낳고, 일해왔다. 제게 평택의 첫인상은 조용한 수도권 도시였다. 시내를 조금만 벗어나면 논이 있는 시골이었다. 이곳에서 아이들과 함께하고 싶은 마음으로 살아왔기 때문에 여전히 평택은 제게 중심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