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내길, 네 번째 이야기

‘평택섶길’은 평택의 작은 길들이다. 16개 코스 오백리에 이르는 길은 물안개 피어오르는 호수 곁에, 호젓한 숲에, 고즈넉한 시골 마을에, 유서 깊은 시내 골목과 재래시장에 이야기와 함께 짜여 있다. 섶길 여정에는 문화유산과 기념물, 역사 인물에 대한 테마들이 있다. 공직 은퇴 후 취미생활을 찾던 중 섶길과 인연을 맺게 되었다. 필자는 평택에서 나고 자랐지만 섶길을 처음 걷는 날, 곳곳에 숨어있는 경관이 놀라웠다. 그림 그리기에 약간의 소질이 있어 평택섶길 풍경을 펜화로 그려 간단한 글과 함께 평택시민신문에 한달에 한번 연재한다. 이 글을 통해 많은 분들이 섶길을 함께 걸으며 우리 고장을 더 알게 됨은 물론 건강과 즐거움을 얻는 기회가 되길 소망한다.  

 

시내길 통복시장 이야기 나간 후
몰랐던 이야기들 전해주는 분들 있어,

지난 회에 못 실었던 내용들 모아 한 회 더 통복시장 연재

 

이계은 시민기자평택섶길해설사전 평택시 송탄출장소장
이계은 시민기자
평택섶길해설사
전 평택시 송탄출장소장

차령산맥 북쪽 사면에서 발원한 안성천이 드넓은 소사벌을 적시며 흐른다. 한 거인이 흙덩이 셋을 흘리고 떠난 자리 매봉·덕동·자란산은 사방의 너른 땅과 남쪽의 강줄기를 굽어본다.
시내길은 시청 앞 광장에서 그 세 봉우리를 거쳐 통복천과 통복시장 그리고 원평동을 돌아 제자리로 오는 평택의 고도(古都) 탐방로다. 지난 회에 통복시장을 다루었기에 이번 회엔 원평동을 돌며 시내길을 마무리 지으려 했으나, 글을 보신 몇 분께서 통복시장의 몰랐던 얘기들을 전해주신다. 감사한 일이다. 해서 남았던 얘기와 새로운 얘기를 합해 한 번 더 통복시장에 머물다 가기로 한다. 

 

통복시장
통복시장

 

볼거리 많던 평택 장날

평택장은 지역 사람은 물론 성환·안성·용인·원곡·당진서도 건너오는 큰 장이다. 사람들이 많이 모이니 장날은 볼거리가 많다. 약장사, 등에 북을 멘 동동구루무장사, 뱀장사, 어리숙한 사람과 자만심 강한 사람을 노리는 박보장기꾼, 푼돈을 노리는 사행성 좌판, 술취한 사내들 멱살잡이와 주먹다짐도 구경거리다.

사람들이 많이 둘러선 곳일수록 볼거리가 좋다. 공연팀으로 움직이는 약장사들은 공단 한복차림 미인들의 노랫가락과 만담꾼의 재미있는 입담으로 만병통치약이 소개된다. 신원만 확인되면 외상도 줬다. 선거철이면 싸전 마당은 후보들의 유세장이 된다. 그런 날 장구경 나온 영감님들에겐 막걸리 한 주전자에 안주 한 접시는 보장된다. 지금의 청년숲 자리는 옛날 극장터다. 백여 평 천정이 높은 일본식 목조 창고건물에는 서커스와 악극단이 들어왔다. 만담가 장소팔 고춘자에 배뱅이굿의 이은관이 오는 때도 있었다. 공연이 들어오면 원숭이를 데리고 다니며 사람들 모인 곳마다 트럼펫을 불며 공연 분위기를 띄운다. 신바람 난 아이들은 그들을 에워싸 따라다닌다.

 

통복시장 평택장은 성환과 안성, 당진 등

인근 지역에서도 건너오는 큰 장,

약장사, 뱀장사, 서커스 공연 등 떠들썩한 난장

유명 상회들

팽성 출신 박병기는 젊은 시절 남대문 시장에서 재봉틀 기술자로 일하던 사람이다. 그는 50년대 중반 통복시장 중심에 점포를 마련 ‘서울미싱직물’을 연다. 그 시절 손바느질하던 주부들이 최고로 선망하던 재봉틀은 쌀 3~4가마 값의 고급 혼수였다. 장날이면 재봉틀이 4~5대씩 팔리는 날도 있었다. 그가 서울로 물건을 하러 가는 날은 허리에 묵직한 전대를 둘렀다. 그는 안중·송탄·팽성에도 분점을 두어 이종·외종 등 가까운 친척들에게 맡겼다. 번화가였던 서울미싱 앞 사거리는 짐 나르는 마차의 왕래가 잦았다. 어느 비 많이 오던 날 가게 앞 전주에 고삐를 바짝 매어 놓았던 조랑말이 전기에 감전되어 죽는 사고도 있었다. 가게는 대를 이어 70대 중반의 아들 박정규가 지키고 있다.

서울미싱 2층에는 이강연이 대표였던 통복시장 전용의 7국 교환대가 있었다. 다이얼 자동전화가 부족하던 시절 시장의 큰 점포 5~60개 업소가 가입되었던 교환전화는 4~5명의 교환원이 있어 24시간 우체국 교환대와 연결시켰다. 다이얼 자동전화가 일상화되며 교환원들은 전신전화국과 은행 등으로 자리를 옮겼다.

 

통복시장-능소화.
통복시장-능소화.

 

백여 년 전 진천 산골에서 팽성 대사리로 이주한 전주이씨 4형제 중 막내 이근안은 성실하고 명민한 사람이다. 그는 1915년 20세 무렵 평택장터로 나와 장사를 시작한다. 건어물 가게를 열었던 그는 신용과 수단이 좋아 사업이 날로 번창한다. 서울서 철도공무원이던 작은아들 이도훈을 불러내려 사업을 돕게 한다. 그들은 성동초등학교 앞의 영천양조장도 인수해 함께 경영하던 중 대사리에서 농사짓던 큰아들 이상훈에게 운영을 맡긴다. 이상훈의 아들 이철구는 양조장을 처분한 돈으로 시장에 있는 문구도매상 선일당을 인수했다. 선일당은 학용사와 함께 평택에서도 제일 큰 문구도매점이었다. 작은아들 이도훈이 물려받았던 건어물도매상 선일상회는 70대의 손자 이헌구에 이어 40초반 증손자 이동우까지 내려와 전통시장의 변화를 선도한다.

 

대형쌀 도매상 삼육상회 주인 성윤봉은

큰 돈 모아 남양만 염전 10만여 평 매입했는데,
남양호 방조제 막히며

지금은 홍원리 햇살들 농장터로 변모

선일당 옆의 서림제면은 터가 넓었던 국수공장이다. 우직한 성품의 주인 함봉진은 근면한 사람으로, 사업에 성공을 거두었다. 그의 큰아들 함영일은 인천서 큰 운수회사를 운영하고 있다.

시장 입구 민중약국 코너 자리는 김재근이 주인이던 고물상이었다. 엿장수들이 매일 수집해 오는 작은 물건과 미군부대에서 나오는 큰 물건 등 넓은 마당엔 고물들이 산처럼 쌓여있다. 동네 아이들은 지나다니며 썰매용 칼날과 굴렁쇠로 쓸 자전거 휠을 슬그머니 집어 달아나기도 한다.

상하거나 값 떨어질 일 없던 고물상은 망할 일 없는 사업이었다.

코스모스 백화점 자리에 있던 삼육상회는 대형 쌀 도매상이다. 주인 성윤봉은 큰돈을 모아 청북의 재력가 박재필이 조성했던 남양만의 염전 10만여 평을 매입한다. 74년 남양호 방조제가 막히며 염전의 영업 보상을 받은 그 자리는 홍원리 햇살들 농장터다.

삼육상회를 성윤봉과 함께 동업했던 한칠회는 부인과 어린 5남매를 남겨놓고 일찍 세상을 뜬다. 5남매의 맏이인 49년생 한경석은 서울서 공고를 졸업하고 서울시청 공직의 문을 들어선다.

홀어머니를 봉양하고 어린 동생들을 거두기 위해 일찍 사회 진출을 한 것이다. 경기여고 출신의 현숙한 부인을 맞은 그는 어머니와 장모님을 끝까지 정성스레 모시고 동생들을 돌보며 교육시켰다.

 

성윤봉과 동업했던 한칠회 맏아들 한경석,

팽성출신 재봉틀 기술자 박병기,

진천에서 팽성 대사리로 이주한 이근안,

원곡면 칠곡리 출신 허병규 등등 통복시장 사람들 성공담
후손들 거쳐 현재까지 이어져

그들 부부의 효행과 착한 마음이 하늘에도 닿았음일까. 그들 자녀 3남매는 일류기업 연구원, 법조인, 치과의사로 성장하고 훌륭한 배필을 만났다. 그의 공직생활은 구청의 국장까지 올라 명예롭게 정년퇴임했다. 유복자였던 막내동생은 미국에 살며 부모처럼 여기는 큰형 부부를 초청해 관광하는 등 한두 달씩 묵어가게 한다. 고진감래라더니….

한칠회의 집과 담을 함께 쓰던 허병규의 마당 넓은 집은 사람들이 ‘낭구장터’라 부르던 건재상회다. 구들장과 서까래 나무화목까지 취급하던 가게는 해방되던 해에 열었다. 허병규(1896~1979)는 본래 원곡면 칠곡리 출신이다. 기미년 원곡·양성면 만세시위 사건 때 그는 행동대원이었다. 전기와 전신주를 파손시켜 관공서의 통신을 마비시키고 면사무소와 주재소에 불을 질렀던 그는 일제로부터 3년간의 옥고를 겪었다. 그날의 행적을 알던 원곡의 민선 면장 출신 이종두는 허병규의 판결문과 수형기록을 구해준다. 1977년 6월 막내아들 허길녕이 이종두의 집을 찾아가던 날 가뭄 끝 칠곡저수지의 마른 바닥을 건너서 갔다. 독립운동가 허병규는 그해 대통령상을 받았다. 1990년 대한민국 정부는 그에게 다시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허름한 판자 담장에 능소화가 만발했다. 마침 자전거 타고 지나던 아주머니가 나를 흘깃 쳐다본다. 꽃 사진 찍는 건데….

비 지나간 하늘이 청량하다.

어디선가 멧비둘기가 구구구구 울어댄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위원회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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