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내길 세 번째 이야기

‘평택섶길’은 평택의 작은 길들이다. 16개 코스 오백리에 이르는 길은 물안개 피어오르는 호수 곁에, 호젓한 숲에, 고즈넉한 시골 마을에, 유서 깊은 시내 골목과 재래시장에 이야기와 함께 짜여 있다. 섶길 여정에는 문화유산과 기념물, 역사 인물에 대한 테마들이 있다. 공직 은퇴 후 취미생활을 찾던 중 섶길과 인연을 맺게 되었다. 필자는 평택에서 나고 자랐지만 섶길을 처음 걷는 날, 곳곳에 숨어있는 경관이 놀라웠다. 그림 그리기에 약간의 소질이 있어 평택섶길 풍경을 펜화로 그려 간단한 글과 함께 평택시민신문에 한달에 한번 연재한다. 이 글을 통해 많은 분들이 섶길을 함께 걸으며 우리 고장을 더 알게 됨은 물론 건강과 즐거움을 얻는 기회가 되길 소망한다. 

 

평택호 방조제로 막히기 전
새우젓배가 드나들고

갯물과 얽힌 사연들 많았던 통복천

 

이계은 시민기자평택섶길해설사전 평택시 송탄출장소장
이계은 시민기자
평택섶길해설사
전 평택시 송탄출장소장

 

시내길은 시청앞 광장에서 매봉, 덕동, 자란산을 거쳐 통복천과 통복시장 그리고 원평동을 돌아 제자리로 오는 평택의 고도(古都) 탐방로다. 지난 회에 이어 통복천과 통복시장 일대의 그 세 번째 이야기다.

 

 

 

 

통복천
통복천

 

바다와 통하던 시절 통복천

원곡의 지문, 독정, 칠곡지에서 내려오던 물길에 배다리, 월곡, 모산지의 물이 합해져 작은 강을 이룬다. 통복천이다. 옛날 통복천이 바다와 통하던 시절 사리 때면 밀물을 따라 통복철교 어귀까지 전마선(傳馬船, 갯고랑을 드나들던 작은 배)이 올라왔다. 배에는 새우젓과 제철생선들이 실려 있었고 광덕에서 오는 배에는 보리방아꺼리 대여섯 가마를 싣고 오기도 했다. 배턱 근처 인씨네 정미소를 이용하기 위함이다. 통복철교와 국도교량 사이의 배턱에는 물참에 사람들이 서있다. 미리 맞춤한 물건을 받는 사람에 시세와 물건을 보고 흥정하는 사람도 있다.

배가 머무는 시간은 길지 않다. 밀물의 정점에서 멈칫하던 물은 곧 썰물로 바뀌어 슬그머니 빠져 나가기 때문이다. 썰물을 따라 나갈 때 사공은 긴장한다. 요리조리 갈짓자로 파인 갯골을 잘 찾아야 하고 자칫 뻘에 배가 걸리면 고생하는 수도 있다. 큰사리 때면 갯물은 까막다리를 지나 서재까지도 올라갔다. 통복천을 건너는 길은 1번국도 교량말고는 서재아래 까막다리(지금의 동삭1교자리)뿐이었다. 까만 철도 침목으로 상판을 올린 까막다리로는 서재, 모산골, 칠원, 도일리 사람들이 평택을 왕래했다.

쌀이 귀하던 시절 세교뜰과 고평뜰엔 모산지와 동삭저수답의 물을 댔다. 넓은 들에 비해 물은 항시 부족했으니 통복천 주변 논 임자들은 임시 보를 막거나 하천바닥에 구덩이를 파 고인물을 퍼올린다.

한여름 사리 때 보 아래까지 갯물이 들어오면 그곳은 발가벗은 아이들의 물놀이터다. 한길이 넘는 보뚝에서 개구리처럼 뛰어 내리는 녀석에 개흙구멍에서 뱀장어를 잡아내는 손끝여문 녀석들도 있다. 구덩이 자리와 물 턱 자리는 깊어 발을 헛디디면 위험하다. 어느 날 보의 물 턱 자리에 빠져 허우적대던 최봉선은 함께 있던 유효목의 도움으로 구조된다. 그는 훗날 생사의 갈림길이었던 당시 상황을 떠올리던 중 생명의 은인인 그에게 옷 한 벌을 선물했다. 살아온 세월에 새삼 감사한 마음이 생겼던 것이리라.

 

2018년 ‘평택시 바람숲길’ 조성 사업으로

이젠 사람과 나무와 새들이 함께 어우러진
평택의 명물 산책로로 거듭나 

시내 한복판을 흐르는 평택호 지류 통복천

1973년 현덕면 권관리와 인주면 공세리를 연결하는 방조제가 막히고 바다는 민물의 호수가 되었다. ‘평택호’다.(1994년 건교부고시 1994-25호로 ‘아산호’에서 ‘평택호’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그 옛날 통복천 변의 고평뜰, 세교뜰, 모산골뜰, 서재뜰은 이제 신시가지의 아파트 숲이되었다. 시가지 한복판을 흐르는 통복천은 장마철엔 물이 가득 흐르지만 건기에는 수량이 마른다. 20여 년 전부터 통복처리장과 이화처리장에서 정수된 물을 통복천 상류로 올려 흘린다. 물은 흐르며 더 맑아진다. 이젠 사시사철 물이 풍족히 흐르는 통복천은 그 주변사람들의 훌륭한 산책로다.

2018년 ‘평택시바람길숲’ 사업이 산림청 공모에 선정되어 200억원을 지원받았다. 통복천은 사업의 핵심구간이다. 2021년 마무리된 사업으로 하천변에 벚나무, 느티나무, 쥐똥, 이팝, 조팝나무에 영산홍, 물버들, 개나리와 수생식물이 심겨지고 산책로가 단장되었다.

물길의 양편 산책로엔 걷고, 뛰고, 자전거 타는 사람들이 많다. 산책로는 칠원교까지 십여리 넘게 조성되어 있다. 잔잔히 흐르던 물에 큰 물고기가 튀어 오르며 파문이 인다. 4월과 5월 산란철이면 잉어들이 떼를 지어 오르내린다. 징검다리 여울에서 큰 잉어들이 꼬리를 요동쳐 물살을 거스르는 모습은 걷는 이들의 발길을 멈추게 한다. 물고기가 많으니 새들도 많다. 흰뺨검둥오리, 쇠오리, 논병아리들은 유유히 놀다가 가끔씩 자맥질을 하고 넓은 물에서는 가마우지도 보인다. 백로와 왜가리는 방심한 물고기를 노리는 듯 꼼짝않고 서있다. 상류쪽으로 갈수록 인적은 드물고 나무와 풀이 우거져 있다. 꿩 소리가 난다. 개울 건너편 풀섶에서 머리만 내민 수꿩이 나를 건너다본다. 근처에 둥지가 있음이다.

어디선가 진한 꽃향기가 퍼진다. 큰 나무아래 덩굴에 찔레꽃이 흐드려졌다.

 

통복천
통복천

 

통복동, 통복시장 사람들

본래 원평동에 있던 평택장은 6.25직후 통복동으로 옮겨졌다. 군청, 세무서, 경찰서, 농협 등 행정 금융기관의 이전과 기차역의 플랫폼 방향, 1번국도와 38국도의 입지에 따른 자연스런 움직임 이었다.

옛날 통복시장의 중심은 지금의 공영주차장 일대인 싸전마당이다. 2000여 평 공터에는 나무시장과 우시장이 함께 있었다. 칠원, 도일, 은산리에서 들어오는 나무마차는 까막다리를 넘어 낙촌 항아리공장 아래를 지나 들어온다. 원곡서 오는 나뭇짐은 재랭이고개를 내려와 백십자약국 골목길로 줄지어 들어선다. 삼천리연탄, 대동연탄 공장이 생기고 연탄이 일상화 되며 나무시장은 쇠퇴하였다.

평택우시장은 성환, 안성, 용인, 당진에서도 건너오는 큰 장이다. 소전의 곳곳에서는 큰 돈들이 오가니 소매치기들도 많았다. 어린 시절 오성 창내리에서 부친을 따라 장에 나왔던 김종복은 소판 돈을 소매치기 당한 부친의 당황스럽고 허탈했던 모습을 잊지 못한다.

소전은 나중에 지금의 성북지구대 뒤 공원자리로 옮겨졌다. 소전 근처에 살았던 조규옥의 부친 조대환은 허가 없는 수의사다. 근동의 사람들은 소가 죽을 못먹거나 이상이 생기면 그에게 끌고 왔다. 그는 소 혓바닥에 침을 놓았다. 그는 돈은 안 받고, 막걸리 한잔 대접은 받았다. 싸전마당에서는 2~3년에 한번쯤 황소가 걸린 장사씨름 대회가 열린다. 한번은 천안장사가, 또 한번은 경상도 장사가 우승했다. 세무서 뒤에 살았던 46년생 길윤재는 통뼈의 우람한 체격에 힘과 배짱이 좋았던 씨름꾼이다. 그는 조기축구의 후배들을 후원해주고, 어려움에 처한 친구와 곤궁한 선배들을 돕는 의리있는 건달이다. 그는 서울과 지방에서도 인맥이 있어 넘나드는 외지의 세력에 지역의 밤업소들을 지켜주고 조정했던 전국구였다. 그는 87년 어느날 이권을 노리던 당돌한 어린후배들의 흉기피습으로 중상을 입은후 숨졌다. 세월이 흐른 후에도 나이 먹은 이들 술자리 에서는 평택의 마지막 낭만건달이던 그의 일화가 회자되곤 한다.

싸전마당 한쪽 한성상회 여주인 인범식은 소금가게를 하며 딸 넷, 아들 둘 6남매를 키워낸 강인한 여성이다. 싸전마당은 쌀가마들이 들어오고 내리는 과정에 바닥에 쌀알들이 적잖이 떨어진다. 그는 장이 파하면 흩어진 쌀알들을 알뜰히 쓸어 모은다. 쌀이 몇되쯤 모이면 정성스레 씻어 고두밥을 짓고 누룩과 버무려 술을 담근다. 술이 익으면 상하차 인부들을 우선 대접한다. 그 모든 과정은 그녀의 큰 낙이었다. 인부들은 그를 보면 굽신 절을 했다.

평택장날이면 시장주변의 국밥집, 불고기집, 보신탕집, 중국집, 왕대포집들은 문전성시다. 가마솥에서 설설끓는 곰국과 볶고, 굽고, 지지는 냄새는 골목 가득 퍼져 사람들의 시장기를 자극한다.

보신탕집은 싸전 인근의 기린옥과 고추전 근처의 가평집이 있었다. 가평집은 후에 고덕 태평아파트 옆으로 옮겨 크게 번창했다. 화교 왕본동은 기생집 자리를 사서 중국집 개화식당을 열었다. 허름한 식당은 점심시간엔 줄을 서야 한다. 지금은 60대 후반의 아들 왕원성이 그의 아들에게 기술을 전수하며 운영하고 있다.

50년대 후반 시장 초입에서 문을 연 대동옥은 국밥과 불고기, 궁중전골로 유명했던 집이다.

1915년생의 주인 박봉임은 배고프던 시절 손님에게든 얻어먹는 이들에게든 항상 인정이 후덕했다. 자동차 기술자였던 남편 노경래가 퇴각하던 인민군들에 끌려가 혼자가 된 그녀는 3녀1남 4남매를 지성으로 키웠다. 특히 유복자인 막내아들 노재익은 그의 삶을 지탱해준 희망이었다. 그녀는 정규교육은 못 받았지만 어린 시절 친정동네 조개터의 야학에서 글을 깨우쳤던 일을 항상 감사했다. 한동네 평택의 교육자 박남규가 사범학교시절 연 야학에서였다. 후에 두 가문은 부인들끼리 서로 도우며 봉사했고 후세들끼리도 교류했다. 그런 영향이었는지 그녀는 아들이 교육자가 되기를 소원했다. 어머니의 뜻에 따라 교직의 길을 걸었던 아들 노재익은 나중에 중등학교 교장이 되어 있었다. 그는 정년을 맞으며 ‘어머니와 노고지리’라는 책을 낸다. 책에는 자식만을 바라보며 기구한 삶을 살았던 어머님에 대한 그리움과 지극한 사랑이 담겨있다. 노재익은 두 아들도 일류 기업 직원과 고등학교 교사로 키워냈다. 그는 책에서 ‘훗날 천국에서 어머님을 뵈올 낯이 조금은 있을 것같다’고 술회했다.

 

대동옥집 외아들 중등학교 교장 노재익과

‘조용필과 위대한 탄생’ 멤버였던 작곡가 이호준 등

통복시장 사람들 이야기도 끝이 없다

 

그곳에 살았던 수재들

통복육교 옆에서 벽돌공장을 했던 1908년생 이장헌의 여섯 아들은 명석했다. 위로 세 아들은 모두 명문 서울대를 나왔다. 46년생 다섯째 이계설은 형들 지원에 순위가 밀렸던 듯 결혼 후에 자신의 힘으로 국문학, 중문학을 공부했다. 문학창작인이 꿈이었던 그는 1990년 44세에 ‘시와 의식’으로 등단했다. 왕성한 창작활동으로 7권의 시집을 낸 그는 제12회 한국문인협회 작가상과 제38회 윤동주문학상을 수상했다. 그는 생업활동 중에도 쉼없이 창작활동을 하고 있다.

통복시장 뒤편에 살았던 유관배 형을 알게 된 것은 고등학교 무렵 바둑을 인연으로 해서다.

격없이 친절하고 재미있었던 그는 어린 시절 평택중학교를 수석으로 들어갔던 수재였다. 그런데 그 수재의 얘기로는 자기형은 훨씬 더 공부를 잘했단다. 수재와 훨씬 수재 형제다. 시대를 잘못 만난 그는 미국 이민을 떠났다. 십여년전 들어 왔을 때 그는 앞머리가 좀 벗겨지고 미국식 더치페이 문화에 익숙해진 듯 점심 한그릇 대접한 것을 부담스러워했다.

그를 또 한번 볼 기회가 있을런지..

1950년생 양은그릇가게 아들 이호준은 평택고 시절 밴드부장을 했던 음악재능이 뛰어난 사람이다. 그는 조용필과 함께 위대한 탄생 멤버였다. 그리고 조용필이 부른 ‘친구여’ ‘그대 발길 머무는 곳에’ ‘이별의 뒤안길’, 김종찬의 ‘토요일은 밤이 좋아’, 소방차의 ‘어젯밤 이야기’, 나미의 ‘인디언 인형처럼’ 등 수많은 곡을 작곡했다. 특히 ‘친구여’는 1996년 고등학교 1학년 교과서에 실리면서 대중가요 최초 음악교과서 등재기록을 갖는다.

 

꿈은 하늘에서 잠자고

추억은 구름따라 흐르고...

좋은 노랫말과 함께 길이 기억될 곡이다. 일본과 중국에서도 번안해 부르는 인기곡이란다.

2012년 이호준이 62세로 사망했을 때 조용필은 장례를 주관했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위원회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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