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효길 솔개바위
평택섶길’은 평택의 작은 길들이다. 16개 코스 오백리에 이르는 길은 물안개 피어오르는 호수 곁에, 호젓한 숲에, 고즈넉한 시골 마을에, 유서 깊은 시내 골목과 재래시장에 이야기와 함께 짜여 있다. 섶길 여정에는 문화유산과 기념물, 역사 인물에 대한 테마들이 있다. 공직 은퇴 후 취미생활을 찾던 중 섶길과 인연을 맺게 되었다. 필자는 평택에서 나고 자랐지만 섶길을 처음 걷는 날, 곳곳에 숨어있는 경관이 놀라웠다. 그림 그리기에 약간의 소질이 있어 평택섶길 풍경을 펜화로 그려 간단한 글과 함께 평택시민신문에 한달에 한번 연재한다. 이 글을 통해 많은 분들이 섶길을 함께 걸으며 우리 고장을 더 알게 됨은 물론 건강과 즐거움을 얻는 기회가 되길 소망한다.
장엄한 만호리 바다 보이는 작은 동산 솔개바위 앞
긴 선착장 위 평택과 당진 오간 사람들 사연 아른 거려
전 평택시 송탄출장소장
솔개바위
평택호에서 수도사까지 원효길의 중간인 평택항은 옛날 만호리 앞바다를 메워 만들었다. 초등학교 1학년 봄소풍 날 수선재 고개(만도아파트 언덕)에 이르러 눈앞에 펼쳐진 하늘인 듯 장엄했던 바다모습은 일곱 살 가슴에 충격으로 남은 잊혀지지 않는 추억이다.
만호5리 연암은 38국도의 종착점이자 시작점이다. 그곳 바닷가 조수에 깎이며 멈추어 있는 바위벼랑과 양옆으로 활개가 있는 작은 동산은 솔개의 나는 형상을 닮아 예로부터 솔개바위(鳶岩 연암)로 불리워 왔다.(절벽에 솔개처럼 생긴 바위가 있었다는 설도 있다)
솔개바위 앞에는 긴 선착장이 있었다. 일제 강점기 때부터 만들어지고 60~70년대에 증설된 선착장은 다양한 물고기가 많이 잡히는 곳인 데다 건너편 당진과의 왕래와 인근지역의 어염과 농수산물을 실어 나르는 포구로서 접안시설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마을 한편엔 아름드리 나무기둥에 검은 함석으로 된 2층 높이 큰 창고가 있었다. 일제 강점기 어염과 농수산물을 보관하던 창고였다. 아쉽게도 창고는 70년대 무렵 헐려 없어지고 지금 그 자리엔 건물이 들어서 있다.
연락선 똑대기
한진포구에서 솔개바위 선착장을 왕래하던 똑대기(똑딱선)는 하루에 두세 번씩 왕복한다. 만호리 버스정류장에 들어오고 나가는 버스시간에 맞추어진 것인데 당진서 서울을 가려면 온양과 천안을 돌아야 했지만 배로 건너와 38국도를 통하면 서울 가는 지름길이었기 때문이다. 20~30톤 똑대기엔 사람만 타는 것이 아니다. 당진 소장수들이 예닐곱 마리씩의 목매기 송아지를 싣고와 걸어서 평택장과 안중장을 본다. 대개 솜바지 저고리에 중절모 차림의 그들은 두어 명씩 함께 다녔다. 이렇듯 사람들이 오가며 물건너 당진과도 인연들이 생긴다. 신영리에 살던 시골총각 서정민에게 당진처녀와 중매가 오간다. 사주단자를 들고 처녀의 집을 처음 찾아가던 날 그는 초등학교 교사인 집안형의 양복을 빌려 입었다. 그리고 양복있는 집안동생을 들러리 친구로 위장해 데리고 간다. 시골 형편에 양복 마련된 친구가 없었기 때문이다. 솔개바위 선착장에서 똑대기를 타고 간 둘은 친구 행세를 하며 저녁 늦게까지 융숭한 대접을 받는다. 그날 밤 처녀의 부모는 처음 만난 사위감과 딸을 합방시켰다. 신영리로 시집온 당진댁은 친정동네 처녀 몇을 또 중매했다.
긴 세월 수많은 사연과 애환 지켜보았을
영웅바위 동편에 떠오르는 아침햇살은
어제처럼 또 빛난다
솔개바위 사람들
석시연은 황해도 옹진에서 처와 어린 딸 셋을 데리고 내려온 피난민이다. 맨손으로 만호리에 정착한 그는 황해도 사람 특유의 근면함과 뛰어난 이재능력으로 60년대경 중선(中船) 네 척을 부리며 그물 등 어구를 파는 철물점을 운영하는 성공을 거둔다.
조기철 연평도까지 선단을 꾸려 한두 달씩 조업 나갔던 그의 배들이 포구로 들어올 땐 깃발을 꽂고 징을 울리며 만선임을 알렸다. 슬하의 7남매 중 위의 딸들은 엄했던 아버지에 순종하며 출가할 때까지 차례로 집안의 살림을 맡아했다. 항상 2~30명 되는 일꾼들을 위해 매끼 밥을 한말씩은 했고 김장도 2000~3000 포기씩을 했던 큰살림이었다.
피는 못속이는지 안중으로 출가한 큰딸 석남여는 아버지 배에서 생선을 받아다 장사하며 돈이 모이는대로 땅을 장만했다. 셋째딸 석순자가 스무 살 되던 해 석시연은 신임하던 한진포구 출신 청년 황성호를 딸과 짝지워 준다. 결혼 10년 되던 해 황씨는 배의 기관실 추진축에 옷이 걸리며 목숨을 잃는 사고를 당한다. 어린 4남매를 남겨둔 채였다. 착하지만 강인했던 그녀는 꿋꿋하게 아이들을 키워내고 생업전선에 뛰어들어 평택에서도 유명한 간장게장집을 운영한다. 그리고 큰언니에게도 조리법을 전해 안중에서 같은 업종을 운영하게 했다.
장운진 이소자 부부는 평안남도 진남포에서 어업에 종사했던 자산가로 6·25때 가족 14명과 동네사람 등 60여명을 태우고 남쪽으로 배를 몰았다. 처음 고군산군도에 정착하려 했지만 지역토호의 음모와 텃세로 배를 빼앗길 위기에 처하자 만호리로 옮겨 정착했다. 조업이 잘되며 중선에 동력을 얹어 ‘덕성호’라 명명했고 얼음 조달과 판로가 용이했던 인천연안부두로 전진기지를 옮겼다. 60년대 후반경 연평도 근해에서 조업하던 덕성호는 북한군에 나포 당한다. 함께 조업하던 10여척의 배들과 함께였다. 후에 다른 배들은 돌아왔지만 덕성호는 돌아오지 못한다. ‘월남한 반동분자의 배’인 것을 알았기 때문일 거라 추정할 뿐이었다. 보험이 없던 시절이니 파산지경의 타격을 입었지만 근해어로를 하며 차차로 회복해 나갔다. 그들의 후예인 큰손자 장재흥은 수협이사를 하며 만호리에서 굴밥정식집을 운영하고 있다. 작은 손자 장재삼도 근처에서 유명 횟집을 운영하고 있다.
김기득은 부모 때에 당진 합덕에서 이주한 사람이다. 김기득의 모친은 돈벌이 수완이 좋은 여인으로 솔개바위 정류장 옆에 여인숙을 꾸며 버스운전사(운전사, 조수, 차장 등 승무원이 세명이다)와 당진 건너가는 배 놓친 사람들을 상대로 영업한다. 안중장날은 공터에 차일을 치고 국밥을 파는 등 닥치는대로 돈을 모아 중선 두 척을 꾸몄고 어업조황도 좋아 모인 돈은 또 땅을 사며 재산이 는다. 모으는 사람이 있으면 쓰는 사람이 있다. 한량이었던 김기득은 모친을 졸라 서울 명동에 양화점을 차렸지만 경험없는 사업은 망할 수밖에 없었다. 업친데 덮친 격으로 59년 연평도 조업 중 사라호태풍에 한척은 좌초되고 한척은 북쪽으로 떠밀려 갔다. 한참 만에 배와 선원들은 돌아왔지만 살림은 기울어져 있었다. 남아있던 땅과 집은 큰아들 김원종 대에서 모두 팔아 마무리되었다.
그들의 애절한 사건들
바다엔 항상 예기치 못한 위험이 따른다. 그들에게도 예외일 수는 없었다. 1949년 음력 2월 초하루 날이다. 만호리 인근 사람들 81명이 배를 타고 멍거니 앞 희억바위로 굴을 따러 간다. 썰물 때 넓게 드러나는 희억바위엔 삼태기처럼 생긴 자리가 있어 평소에도 그곳은 배를 대는 자리였다. 굴을 따고 밀물이 되어 나가려는 순간 돌풍이 몰아친다. 배는 순식간에 부서졌고 살아나온 사람은 없었다. 워낙 큰 사고였기에 평택군 주관으로 수선재 아래 동산에서 81개의 숟가락을 꽂은 젯상을 차려 위령제를 지냈다. 희생자들은 대부분 내기초등학교 학생들의 부모형제들이었다. 내기초등학교 교사였던 이창휘 선생은 영령들과 가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희억바위’ 노래를 만든다. 전교생들은 위령제에 참석하여 이창휘 선생의 지휘로 그 노래를 합창했다. 위령제는 울음바다였다. 그 당시를 회고한 이재욱(90)도 내기초등학교 재학생이었다.
1963년 늦은 가을 내가 초등학교 4학년인 때다. 솔개바위 사람 스무명이 돚배를 타고 영웅바위에 굴 따러 갔다오던 길 돌풍이 닥친다. 바람에 밀리는 배를 포구방향으로 잡으려 키를 돌렸지만 그게 실수였다. 바람을 측방향으로 맞은 배는 기울며 전복되었고 선착장에서 바라보던 가족과 동네사람들은 발을 동동 구를 뿐이었다. 운 좋게 노를 붙잡은 사내 하나가 살아나오고 나머지 열아홉 명을 삼킨 바다는 언제그랬나싶게 쾌청하고 잔잔했다. 같은 학년 여자아이의 가족도 변을 당했다. 음악시간이었는지 그 반 아이들은 키 작은 담임선생 이병일의 풍금반주에 맞추어 ‘섬집 아기’를 몇 번이고 합창했다. 열아홉 살 처녀 김금자의 시신은 보름 만에 길음리 앞바다에서 발견되었다. 그해 여름 수영하다 익사한 대학생이 있었고 양가에서는 두 총각처녀의 영혼을 맺어 원혼을 달래주기로 한다. 그들은 화장하여 함께 뿌려졌다.
가는 세월
새로운 밀레니엄의 해를 떠들썩하게 맞이했던 게 엊그제 같은데 어언 24년이 흘러 또 새해를 맞았다. 세월은 참 잘도 간다. 한 달여 전 어머님을 뵙고 오던 차안에서 외가에 정이 많던 고종형님 하던 얘기가 떠오른다. 예전엔 나훈아의 노래 ‘공’을 의미없이 듣고 불렀는데 나이 먹으니 그 노래가사가 가슴에 와닿아 새겨지더란다.
살다보면 알게 돼 알려주지 않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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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왔다 가는 인생
잠시 머물다 갈 세상
백년도 힘들 것을
천년을 살 것처럼
살다보면 알게 돼
버린다는 의미를
내가 가진 것들이 모두 부질없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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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젠 떠나고 안 계신 어머님 모신 곳 스님의 천수경 독경 속에서 나 역시 비우고 버린다는 의미를 새삼 깨닫는다.
수많은 세월 주변 바다의 수많은 사연과 애환을 지켜보았을 영웅바위, 그 동편에서 떠오르는 아침햇살이 어제처럼 또 빛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