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북읍 산성길
묵장수 아주머니
본디 내가 효자는 아니로되 다른 동기간에 비해 부모님과 가까이 있는지라 병원 수발 등 신경 쓸 일이 많은 편이다. 4월에 22회차를 싣고 쉬었는데 지난 5월 어머님의 낙상 골절로 동기간들과 함께 일상이 마비되었던 때문이다.
집 근처 길가에서 매주 한 번 묵과 손두부를 파는 아주머니가 있다. 하루는 묵을 사며 심약해진 마음에 집안의 사정을 하소연한다. 말없이 듣던 그는 “힘들다 생각하면 더 힘들고 그저 사는 과정이려니 하면 오히려 쉬워지는 법”이라며 “아직 부모님이 계시니 복이네요”라고 한마디를 덧붙인다. 성현 말씀에 ‘사람 셋이 있으면 그중 스승이 있게 마련(三人行必有我師)’이라 했다던가. 그 아주머니의 소박한 한마디가 내게 위로와 깨우침을 준다.
그리고 요즘 만나는 사람 중 더러 ‘잘 읽고 있다’는 뜻밖의 인사에 조금이나마 새로운 기운이 충전되기도 하였다. 고갈되는 소재로 언제까지 이어갈 수 있을지 알 수는 없으나 다시 한번 가보기로 한다.
읍사무소 마당 양성현감 이용익 선정비
산성길은 청북읍사무소 마당에서 출발해 원점으로 되돌아오는 세 시간쯤 걸리는 길이다. 읍사무소 마당 한편엔 구한말 양성현감 이용익의 애민선정비(愛民善政碑)가 있다. 이용익(李容翊)은 보부상(褓負商) 출신으로 임오군란 때 명성황후를 구출한 인연에 정권의 핵심으로까지 부상했다. 그는 이재(理財)능력과 청렴하고 강직한 성품을 인정받아 내장원경(內藏院卿 황실재정 총괄) 탁지부대신(현 기획재정부장관), 군부대신 등을 역임한다. 교육을 통한 인재양성과 기술혁신으로 나라를 일으켜보려 애썼던 그는 구한말 당시로선 드물게 유능하고 꿋꿋하며 충직한 인물이었다. 특히 인재양성의 필요성을 절감한 그는 사재를 털어 훗날 고려대학교의 전신인 보성전문학교를 설립하고 운영했다.
그는 을사늑약에 반대하여 일제에 의해 투옥되었고 러시아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하던 중 1907년 피살되었다. 대한민국 정부에서 그에게 국민훈장 모란장이 추서되었다.
조부의 뜻을 받들어 보성전문을 운영하고 독립운동에 헌신했던 손자 이종호는 후에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두 남매의 전설이 있는 오봉산성
현곡산단을 지나면 오봉산이 있다. 옛날 두 남매가 있었고 둘은 내기를 한다.
누이는 산성을 쌓고 남동생은 나막신을 신고 한양을 다녀오기였는데 지는 쪽이 죽는 생존게임이다. 미처 아들이 도착하기 전 딸의 성쌓기가 끝나가자 지켜보던 엄마는 딸에게 뜨거운 팥죽을 쑤어주어 시간을 지체시킨다. 그틈에 아들은 가까스로 도착하여 내기에 이겼다는데 불공정 게임에 딸은 결국 어떻게 되었을까? 남아선호 의식의 전설이다.
오봉산의 봉우리 하나는 60년대 흑연광산 개발로 없어졌다.
용성리 입구 이재의 시혜 불망비
오뚜기식품을 지나 39국도를 용성리 쪽으로 횡단하자면 용성리 입구 풀섶에 퇴락한 비각이 하나 있다. 비각 안에는 비석과 그 내력을 적은 편액이 걸려있다. 청북면장 김굉수가 쓴 편액의 내용은 대략 이렇다.
“기미년(1919) 한발 때 진위군은 큰 기근을 당했고 청북면 일대가 특히 심각하여 많은 이들이 생계가 곤란하였는데 청북면 덕우리에 거주하는 이재의는 가산을 풀어 주변의 많은 빈민들을 구제하였다. 이 선행을 기리기 위하여 주변의 뜻있는 사람들이 비석을 세웠고 비바람에 훼손되는 것을 막기 위하여 그의 장손이 비각을 세우게 됨에 그 선행의 과정을 적어 후세에 남긴다. 이재의는 전주이씨 효령대군의 후손이다.”
옛날에는 이곳이 사람 왕래가 많은 곳이었겠으나 지금은 주변 일대가 칡넝쿨에 뒤덮여 마치 위장막을 씌운 듯 정글이 되어 있다. 그나마 3년 전 섶길지기들의 도움으로 대략 정리된 모습을 그린 것이 있어 실어본다.
설창마을 회화나무
안중읍 용성3리인 설창마을은 비파산, 자미산과 무성산으로 들어가는 길목이다. 외진 동네여서 6.25전쟁 때 인민군도 안 들어와 피난민들이 모여들었던 곳이다. 조상 대대로 내려온 터를 지키며 살아온 86세의 주창원씨는 6남매 중 셋째로 태어나 용산중·고등학교를 나온 사람이다. 젊은 시절 꽤 미인이었을 그의 부인 성순례씨도 숙명여고를 나온 재원이었다. 내외 모두 명문학교를 나온 당시로서는 고학력자였는데 아버지의 권유로 고향을 지키게 되어 이곳을 떠나지 못했다. 그의 조부 주근서는 옛날 서당을 열어 후학을 가르친 분이었다. 동네에는 400~500년은 되었음직한 회화나무들이 있다. 본래 일곱 그루였는데 한 그루는 죽고 여섯 그루가 남아있다. 나무들은 보호수로 지정되었지만 사유지라서 해제되었다고 한다. 회화나무가 있었던 뜻은 필경 옛날 이곳에 유학자나 유명 선비가 있었음일 텐데 주씨도 그 내력을 알지는 못한다. 며칠 전 동네를 찾아갔을 때 회화나무에 거의 붙다시피 무지막지한 규모의 3층 철근콘크리트 건물이 지어지고 있다. 땅이 팔렸고 새로 사들인 이는 건물을 짓는 것이다. 나무를 베어 내려는 것은 막았다지만 주씨와 동네 사람들은 고목의 뿌리 옆으로 공룡같은 콘크리트 덩이가 올라가는 것을 무기력하게 바라만 볼 뿐이다.
전에 캐나다를 여행했을 때 한그루의 오래된 나무를 지키기 위해 길을 돌려내던 그들의 자연사랑 정신이 떠오른다.
이 광경이 너무 아쉽고 답답하다.
동네 위쪽에 있는 약사사는 조계종 말사인 전통사찰이다. 이 절의 석조보살좌상은 2013년 경기도문화재 자료로 지정되었다. 그 외에도 고려시대 제작된 보물급의 청기와가 용마루에 다섯 장 있었다. 40여 년 전 귀먹은 늙은 스님이 계실 때 도둑이 들어 절지붕에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기와를 모두 걷어갔다.
청북신도시 사람들이 즐겨 오르는 자미산과 무성산
연구 결과, 삼국시대에 축성된 것으로 보이는 자미산성은 2005년 경기도기념물 제203호로 지정되었다. 모르는 사람이 보아도 인공구조물의 형상들이 확연히 남아있는 산 정상 성터는 토성인 내성과 돌로 쌓은 외성, 그리고 외곽의 부성까지 삼중구조로 되어 있다. 산성의 용도는 알 수 없고 삼국의 격전장이었거나 남양만으로 들어오는 왜구를 방어하기 위한 것으로 추정할 뿐이다.
자미산성과 무성산성에는 임경업 장군이 성 쌓기 내기를 하였다는 전설도 있다. 광해군과 인조 때 활동했던 17세기 인물 임경업, 그는 참 바쁘기도 하였다. 어딜 가도 그의 전설이 있고 인기는 왜 그리 좋은지 무속인들은 그를 죽자사자 떠받든다.
자미산과 무성산은 청북신도시를 둘러싸고 있다. 신도시 사람들은 이곳을 뒷산처럼 즐겨 오른다. 내려가는 길 단출한 차림의 산책객을 몇 만난다. 좋은 곳에 사는 분들이다.
신포 가설극장
청북읍사무소 일대의 신포는 조촐한 5일장이 서던 청북의 중심지다.
읍사무소 건너편 농협주유소 자리는 60년대와 70년대 초까지 가설극장이 서던 공터였다. 신영균 신성일 김지미 남정임 등이 한참 인기를 누리던 시절이다. 라디오도 흔치 않던 그때 가설극장은 유일한 문화체험 자리다. 보름쯤 머물며 편을 바꿔 상영하던 영화 한 편의 입장료는 15원 내지 20원쯤 했다. 그 돈이 있을 턱없는 조무래기들은 천막 틈으로 숨어 들어갈 궁리를 하고 붙잡혀 치도곤을 당하기도 한다.
먼 동네에서 삼삼오오 구경 온 처녀들, 그들의 늦은 밤 귀가길은 또 다른 위험이 있다. 어둠 속에서 대담해진 대책 없이 혈기방장한 시골 총각들 그리고 대오가 무너져 괴성을 지르며 달아나는 처녀들, 그들의 쫓고 쫓기는 달음박질은 대개 별일이야 없지만 분노에 찬 처녀의 어머니는 항의 차 총각의 집을 찾기도 한다. 총각 아버지는 ‘이 길에 사돈 맺읍시다’하며 능청맞게 눙치기도 한다.
한 줄기 바람에 힘겹게 남아 있던 은행잎이 떨어져 날린다. 날씨가 많이 추워졌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지원을 받아 작성되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