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내 놓지 않은 조각가의 삶,

힘들었던 만큼 감동도 커

 

김선 조각가
김선 조각가

 

결혼으로 송탄에서 살게 돼
자녀 넷 키우며 작업 계속
전시회 300회 등 활동 왕성
평온하고 한없이 자유로운 
작품으로 마음의 힐링 전해

“예술은 손으로 만든 작품이 아니라 예술가가 경험한 감정의 전달이다.” 러시아의 문호 톨스토이가 남긴 말이다. 모든 예술이 그러하듯이 인간이 아로새긴 조각도 삶을 반영한다. 조각가 내면의 자아와 그를 둘러싼 환경이 작품 안에 그대로 녹아 있게 마련이다. 부락산 자락에서 만난 조각가 김선(56)의 작품에서도 그의 삶의 편린을 발견할 수 있다. 미술학원을 운영하고 자녀 넷을 키우면서도 밤잠을 줄여가며 조각을 놓지 못했던 당시의 작품들에서는 어김없이 사각형의 틀이 존재한다. 예술에 대한 열망을 맘껏 펼치지 못하는 현실을 은유한 것이리라. 이제 사각형의 틀은 삶 속에서 연마되어 둥근 원으로, 날카롭게 번득이던 선은 자유롭게 반복되는 선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김선 작가는 순수한 자연을 관조하며 작품으로 우리 마음에 힐링을 전하고 있다.

 

평택 작가들 중에 조각가는 많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다. 평택과의 인연은 언제 시작되었나.

올해가 송탄에서 산 지 딱 30년째다. 성신여자대학교 조소과를 졸업하고 조형대학원에 다니며 논문 쓰다가 쌍용자동차에 다니던 남편을 따라 1993년부터 송탄에서 살기 시작했다. 딸 하나 아들 하나를 뒀는데 시부모님들이 이북 분들이다 보니 가족이 많았으면 하고 원하셨다. 셋째를 가졌는데 딸 쌍둥이여서 아이 넷을 키우게 됐다. 30년을 살아선지 태어난 서울보다 이곳이 정말 좋다.

 

김선 조각가
김선 조각가

자녀 넷을 키우며 작품 활동을 계속하기 어려웠을텐데.

결혼하고 작품 활동을 멈춘 적은 없다. 아이 키우며 미술학원도 운영했는데 학원이 집이랑 붙어 있었다. 학원의 화실 한 편에 작은 작업장을 만들어놓고 밤에 애들 잠잘 때 건너와 작업했다. 가끔은 밤새울 때도 있었다. 그러면 아침에 집에 가 애들 밥해주고 학교 보낸 다음 학원에서 학원생을 지도하고 그랬다. 잠이 부족하고 힘들어도 내가 해야 할 일은 소홀함 없이 했다. 소풍 때 우리 애 도시락뿐 아니라 담임교사 도시락까지 만들어 보냈다. 우리 딸들도 엄마는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었냐고 하더라. 쌍둥이 낳고 산후조리하며 학원 문을 잠시 닫았을 때에도, 남편이 직장을 그만두고 새로운 일을 준비할 때에도, 친정 오빠가 사고로 전신마비가 돼 병구완을 할 때도 변함 없이 작품을 만들었다.

 

그렇게 힘들게 작품 활동을 한 이유는 무엇인가.

가정을 이루고 자녀를 키우는 과정은 기쁨이고 행복이다. 하지만 그 안에 갇혀버릴 수 있겠다는 위기감이 들었고 마음 한 구석에 채울 수 없는 허전함이 컸다. 서울을 떠나면서 예술가들과의 교류가 딱 끊겨 정말 외로웠다. 비싼 재료를 쓸 수 없어 학원에서 남은 찰흙·석고 등을 모아 조각하다 보면 마음 가득 무언가가 차올랐다. 브론즈 작품을 만들거나 대리석 조각을 만들면 최소 몇 백만원이 필요하다. 예술가로서 어떤 제약 없이 자유롭게 표현하고 싶은 욕심이 있었다. 하지만 연년생인 네 아이의 아이 분유 사고 기저귀 사야 하는 상황에서 그런 작품들은 엄두를 낼 수 없었다. 작은 소품들을 주로 만들었는데 사각형의 틀 안에서 무언가 꿈틀거리는 형상이 많다.

 

새로운 시작의 꿈, 철·나무, 180×8×150cm, 2021년
새로운 시작의 꿈, 철·나무, 180×8×150cm, 2021년

 

사각형의 틀은 소중한 가정이면서 작가로서 깨고 나아갈 한계라는 점에서 모순된 상황으로 보인다.

행복했고 그래서 힘들었다. 기쁠 때도 있었고 슬플 때도 있었다. 대학교 동창들이 유명 작가가 돼 전시회에 갔다가 기가 죽어 내려올 때도 많았다. 그러다 대학시절 교수님이 해주신 말이 생각났다. “너희가 손가락만 한 작품을 하더라도 그 작품을 자기가 좋아해 계속하다 보면 좋은 작품이 된다”. 지금은 정말 작은 공간에 남은 재료로 작품을 만들지만 희망을 잃지 않고 끝까지 하다 보면 그 작품을 누군가는 알아주겠지, 그런 마음이 들었다.

 

이제 예술가로서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게 된 것인가.

어느새 재료의 제약이 헐거워지면서 표현의 폭이 넓어지기 시작했다. 누가 버리려던 용접기를 주워와 20년 넘게 금속 공예를 만들었다. 최근 남편이 인테리어 사업을 하는데 뜯어서 버리는 폐자재 중에 동파이프를 발견했다. 용접을 배운 김에 산소 용접을 배워 동파이프를 작품 소재로 활용하고 있다. 동파이프는 오래 가고, 유연하고, 보존성이 좋고, 색감을 내기도 좋다. 요새는 자르고 구부린 동파이프로 반복적인 선을 창조하면서 순수한 자연이 주는 삶을 표현하고 있다.

작품 활동을 계속하다 보니 제 작품을 찾는 분도 차츰 생겨났다. 2005년 태광고등학교 독수리상을 시작으로 병원 등에 작품을 설치했고 공공미술 작품도 여럿 만들었다. 2021년 오성면 신리 우리마을 가꾸기 프로젝트 공모 당선작인 ‘새로운 시작의 꿈’, 2022년 안중 오거리 공공 미술 프로젝트 공모 당선작 ‘희망 안중 미래로’ 등이 있다. 희망 안중 미래로는 저와 배춘효·김창영·양미정 등 4명의 작가로 이뤄진 ‘인 블루’의 공동작업으로 탄생했다.

 

안중오거리에 설치된 작품 ‘희망 안중 미래로’. 김선 조각가와 배춘효·김창영·양미정 등 4명의 작가로 이뤄진 ‘인 블루’의 공동 작업으로 탄생했다. 
안중오거리에 설치된 작품 ‘희망 안중 미래로’. 김선 조각가와 배춘효·김창영·양미정 등 4명의 작가로 이뤄진 ‘인 블루’의 공동 작업으로 탄생했다. 

 

작품 활동만큼 예술가 교류에도 적극적이라고 들었다.

송탄미술인회에 참여해 활동하며 많은 지역 예술가를 만났고 서로의 예술을 공유할 수 있었다. 이러한 교류의 결과가 전시회다. 1992년 서울 갤러리 청남미술관에서 연 제1회 개인전을 시작으로 개인전·단체전·부스전 등을 300회가량 했다. 지난해에만 전시회를 16회 개최했다. 5월 2~28일 아산시 영인면에 있는 카페 아레피에서 개인전을 열 계획이다. 아레피 건물은 2018년 한국건축문화대상을 받은 권희수 건축가의 작품으로 전시하기에 매력적인 공간이다.

 

최근 작품들은 둥근 형태가 주를 이루는 것 같다.

마음에 여유가 생기고 그만큼 자신감이 생겨나서다. 부락산 자락에 꾸며놓은 작업실에서 틈날 때마다 작품 활동을 하면 정말 행복하다. 조각을 내려놓고 지금까지 버티지 않았다면 지금의 작품은 없었고 현재의 김선 이라는 존재는 없었을지 모른다. 일상에 소모돼 지친 내가 아니라 마음이 평온하고 한없이 자유로운 김선이 있다. 예전에 힘들었던 만큼 현재의 김선이 투영된 작품은 누군가에게 감동을 주고 그들의 마음에 힐링을 전할 것이라고 믿는다. 그렇게 우리는 서로를 치유하고 힐링하면서 살아가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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