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봉산 만기사와 원경스님, 그리고 ‘산사의 편지’

이계은평택섶길해설사전 평택시 송탄출장소장
이계은평택섶길해설사전 평택시 송탄출장소장

‘평택섶길’은 평택의 작은 길들이다. 16개 코스 오백리에 이르는 길은 물안개 피어오르는 호수 곁에, 호젓한 숲에, 고즈넉한 시골 마을에, 유서 깊은 시내 골목과 재래시장에 이야기와 함께 짜여 있다. 섶길 여정에는 문화유산과 기념물, 역사 인물에 대한 테마들이 있다. 공직 은퇴 후 취미생활을 찾던 중 섶길과 인연을 맺게 되었다. 필자는 평택에서 나고 자랐지만 섶길을 처음 걷는 날, 곳곳에 숨어있는 경관이 놀라웠다. 그림 그리기에 약간의 소질이 있어 평택섶길 풍경을 펜화로 그려 간단한 글과 함께 평택시민신문에 한달에 한번 연재한다. 이 글을 통해 많은 분들이 섶길을 함께 걸으며 우리 고장을 더 알게 됨은 물론 건강과 즐거움을 얻는 기회가 되길 소망한다.

 

 

고려 태조25년에 창건된 진위면 만기사는

보물 567호 철조여래좌상 있는 천년도량,

피부병 앓던 세조가 온천 가다 들러 ‘물맛 좋다’ 했던 
마당 우물은 옛 모습 복원 예정

2023년 4월에 찾은 만기사 대웅전
2023년 4월에 찾은 만기사 대웅전

만기사 萬奇寺

진위천이 적셔 내려오던 들판 오른쪽 동천리 편으로 솟아오른 무봉산은 가파른 오르막과 내리막의 땀 좀 흘리는 길이다. 오래된 소나무가 무성한 산자락엔 만기사가 있다.

942년(고려 태조25년) 남대사(南大師)가 창건한 이래 중창되어온 대웅전엔 보물 제567호인 철조여래좌상(鐵造如來坐像)이 모셔져 있는 천년도량이다. 그 대웅전을 앞뒤에서 옹위하고 있는 돌 축대는 절과 역사를 함께한 듯 오래되어 보인다. 절 마당 한쪽엔 우물이 있다. 수양대군(조선7대왕, 세조)은 고립무원(孤立無援)의 어린 조카 단종에게서 임금 자리를 빼앗고 죽였다. 할아버지 세종임금에게서 지극한 사랑을 받으며 컸던 문종의 딸이자 단종의 오직 하나인 혈육 경혜공주도 갖은 핍박 끝에 관노비가 되었고 부마(駙馬)인 그의 남편은 거열형(車裂刑)의 참혹한 죽임을 당했다. 단종과 경혜공주 두 남매의 어머니 현덕왕후는 세조의 꿈에 나타나 피눈물을 흘리며 얼굴에 침을 뱉는다.

그 후 세조는 피부병에 시달렸다(사실, 조선의 대부분 왕들은 과식과 운동부족에 몸 씻기에도 게을러 피부병 등 종합병원급 환자들이었다는 게 역사적 정설이다).

피부병 치료차 온천을 찾아가던 길이었으리라. 만기사에 들른 세조는 마당의 우물물을 마시고 ‘물맛이 좋다’ 한마디 한다. 그 후로 만기사 우물은 어정수(御井水)로 불리어 온다. 그간 관리가 부실했던 우물은 옛날 모습으로 복원될 예정이다.

 

보물 567호인 만기사 철조여래좌상
보물 567호인 만기사 철조여래좌상

 

원경스님

내가 만기사를 처음 찾아갔던 2012년 늦은 가을 퉁퉁한 모습의 스님은 풍선기를 등에 메고 마당의 낙엽을 치우고 있었다. 합장하여 신분을 밝혔던 내게 ‘어쩐 일로 이렇게...’ 하는 물음이 온다. 약속을 잡고 온 것은 아니었기에 무엇을 바랄 일은 아니었으나 마음 속으로 차 한잔 대접을 기대했던 스스로가 민망해져 ‘인사 좀 드릴 겸..’ 하며 싱거운 얘기 몇 마디 하다가 어색하게 돌아온 일이 있다.

원경스님은 박헌영의 아들로 알려져 있다. 박헌영은 일제강점기 사회주의계열의 독립운동가였고 해방정국의 남로당 지도자였다. 그는 북으로 가서 북한정권의 외상과 부수상을 지냈다. 53년 휴전 후 김일성은 ‘봉기한다던 빨치산은 다 어디 갔느냐’며 박헌영에게 재떨이를 집어던졌다. 권력다툼에서 밀린 그는 미국의 첩자 혐의를 쓰고 처형되었다. 그는 남과 북 양쪽에서 배척당하는 인물이 되었다. 1941년 태어난 원경스님은 어릴적부터 이리저리 떠돌며 힘겨운 어린 시절을 보냈다. 사회주의 운동가들의 집을 전전하다 1950년 남로당 연락책이던 한산스님을 따라 지리산 화엄사에 맡겨지기도 했고 빨치산들과 생활하기도 했다. 그는 박헌영이 월북하기 전 여섯 차례 아버지를 만났다고 했다. 대여섯 살 유년 시기의 희미한 기억이었으리라.

그는 아버지가 처형된 소식을 들은 후 전국을 떠돌며 방황하다가 1960년 불가에 귀의했다. 정규교육을 받은 일 없는 원경스님은 불교계에서 나름 입지를 잡았다. 여주 황룡사, 신륵사, 안성 청룡사 주지와 평택 만기사 주지를 하며 큰 절로 키웠다. 그는 조계종 원로위원과 최고 품계인 대종사 법계를 받았고 나중엔 원로회의 부회장으로 활동했다.

 

책 <산사의 편지>

재작년말 원경스님의 입적소식을 들었다. 얼마 전 스님의 책 <산사의 편지>를 구해 읽을 기회가 있었다. 내용은 불교의 교리, 용어, 사상 그리고 역사, 문화, 정치, 시사 등에 관한 다양한 주제의 만물박사급 글들이다. 그 글들의 내용과 철학적 깊이는 이루 헤아릴 수 없어 그저 놀라울 뿐이었다.

글은 항상 새벽에 쓴 듯 글의 마지막에는 ‘오늘도 행복한 날 되소서’로 마무리된다. 네 권 책의 글들은 모두 361건이다. 우연일까? 또는 361은 불교에서 특별한 의미가 있는 숫자였을까? 내가 아는 361은 바둑판의 눈금숫자다. 바둑판은 가로세로 열아홉 줄씩이니 말이다. 스님은 361건의 글들 중 위기십결(圍棋十訣, 바둑을 두는 열가지 비결)을 인생을 살아가는 지침으로 소개하고 있다. 나는 고등학생시절 바둑 1급을 두었다. 기원에서 ‘학생1급’으로 불리던 때, 당시 1급바둑은 평택군 내에서도 다섯 명이 안되었던 시절이다. 한참 공부에 열중해야 할 그때 그 일탈은 내 인생에 불리한 영향으로 전해졌겠으나 후회는 없다. 지금도 좋은 동호인들과 대국하며 훌륭한 여가생활을 하고 있고 나의 밥들인 그들은 나를 ‘고수님’으로 모시며 항상 존경하기 때문이다. 대마를 잡히곤 내게 ‘늑대’라 부르며 불평하는 자도 있긴 하지만...

한 꼭지 글로 위기십결을 소개했던 원경스님, 바둑을 즐겨하셨을까? 십여년 전 절의 마당에서 뵌 후 다시 뵙지 않은 것이 너무 후회되고 아쉽다.

에필로그

절마당에서는 연등을 준비하고 있다. 다가오는 석가탄신일을 준비함이다. 온 누리에 대자대비 부처님의 빛이 비추어지길 소망한다. 슬픔과 절망에 빠진 이에게 새로운 희망의 빛이 찾아들기를 소망한다. ‘산사의 편지’ 수많은 구절 중 유난히 가슴에 남는 한 구절을 소개한다.

 

‘죽음을 예감하는 순간 또는 죽음은 언제나

우리에게 닥쳐올 수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순간 우리는 겸손해질 수 있습니다. 죽음은 우리

인생의 가장 큰 스승이며 가장 큰 공부입니다.

산 자의 그리움은 족쇄와 같아서 살아있는 사람이

내려놓지 않으면 망자는 떠날 수가 없습니다.’

절의 마당으로 한줄기 바람이 올라온다. 그윽한 솔향기가 함께 묻어온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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