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백초등학교 사서교사
2월 6일 새벽 튀르키예(옛 터키)와 시리아 접경 지역을 강타한 규모 7.8의 강진으로, 사망자만 4만 6000명이고 인명 피해는 가늠할 수 없을 정도라 한다. 이번 지진 피해는 새벽 시간대에 일어나 대피가 어려웠고 거기에 대부분 건물 붕괴로 인한 피해여서 인명 피해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있다. 피해 지역의 기온이 매섭게 떨어지고 여기에 여진이 계속되어 수색과 구조를 어렵게 한다고 한다. 화면으로 보는 튀르키예는 고통 그 자체다.
SNS에는 튀르키예 시리아 지진 소식으로 가득하고, 새로 고침 할 때마다 일상의 이야기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고통만 가득하다. 스크롤을 내려도 내려도 고통이 끝도 없이 이어진다. 하지만 현지의 절실한 이야기, 잔해 사이 사람들의 고통, 국내에 있는 튀르키예 사람들의 안타까움, 좌절… 절실한 소식들이 생각만큼 빠르게 전해지진 않는다. 현지 사정이 여의치 않으니 그들의 염려와 기도를 얹은 소식만 이 화면을 가득 채운다.
각자 자리에서 할 수 있는 만큼
도움을 만들어내고 그 도움의
물결이 튀르키예에 닿을 때
고통을 나누려는 그 마음들이
바로 평화를 짓는 것 아닐까
SNS를 통해 도울 방법들이 이어진다. ‘구호 물품 기부를 희망하시는 분들께’ 튀르키예 대사관 안내문이 떴다. 현지에서 필요한 물품 목록과 그 물품을 보낼 주소까지 정확하게 적혀 있다. 그걸 보니 얼마 전 옷장 정리를 하며 모아둔 옷이 눈에 들어왔다. 내친김에 SNS에 글을 올렸다. 물품을 같이 보내면 어떨까 하고. 대사관 안내대로라면 자국 항공을 통해 운송한다고 하니 서두르면 바로 도울 수 있을 것 같았다. 마음이 급했다. 급한 마음을 알았는지 실시간으로 마음을 보탤 방법들이 SNS에 올라온다. 받은 물품을 물류창고가 있는 인천으로 바로 가겠다, 용달차를 개인적으로 구해 가겠다, 마을과 주변에도 알려 함께 하겠다 등 다양한 소식을 전해 주었다. 현금 기부처, 구호 단체, 자선 단체 기부 방법들도 공유되었다. 대추리 마을과 평택평화센터 사람들, 종교 단체, 주변 학교의 구성원들도 함께했다. 많은 사람들의 마음이 순식간에 모아졌다. 이렇게 마음을 낸다는 것. 아마 이런 마음들이 평화를 짓는 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필자에게도 튀르키예 가족과 인연이 있다. 몇 해 전 일이다. 몸담은 초등학교에는 매년 가을 축제를 연다. 그 축제에서 ‘세계 여러 나라 문화’라는 주제로 부스를 운영했는데 그때 튀르키예 가족이 참여하였다. 그 가족은 아이스크림과 케밥을 준비해 부스를 운영했다. 축제에 참여한 많은 아이들은 아이스크림을 먹겠다고 부스 앞에 줄을 섰다. 그 가족은 식사도 못 하고 온종일 아이스크림과 케밥을 만들었다. 부스에서 얻은 수익금은 모두 그분들의 요청대로 기부되었다. 그 전까지 필자에게 터키는 오르한 파묵의 ‘이스탄불’이었다면, 그날 이후 튀르키예는 축제 때 운동장 한 구석에서 먹던 케밥과 아이스크림 사려고 길게 늘어선 아이들, 쫀득한 아이스크림을 쪽 뽑아 먹는 아이들의 야무진 입, 성실하기 그지없는 아버지와 아들 모습으로 남아있다. 이런 특별한 인연이 아니더라도 우리에겐 누구나 함께하려는 마음이 있다. 끔찍한 재난 속, 사람의 고통을 헤아리는 마음으로 말이다.
시리아는 12년 내전 중에 강진 피해까지 겪게 됐다. 최근 기사에는 현지에서 도움을 요청하고 있지만 그 어떤 나라에서도 응답하지 않는다고 한다. 구호 물자도 닿지 못하고 있다는 소식은 더 참담하게 한다. 튀르키예와 또 다른 이 상황에 좀 더 관심을 기울여야겠다.
튀르키예 구호를 위한 텔레비전 광고를 본다. 비닐에 걸린 바다 거북, 여위어가는 북극곰, 흙탕물을 먹을 수 밖에 없는 튀르키예 사람들의 참담한 이야기가 나온다. 가슴이 아프다. 사회가 고통을 다루는 방식은 무척 자극적이어서 고통에 공감하기 보다는 불편해 하기 일쑤다. 다행히 얼마 전부터 튀르키예 구호 광고는 도와야한다는 당위보다는 당신의 작은 도움이 현지에서 얼마나 큰 도움인지를 중심으로 알리고 있다. 우리의 작은 도움이 작지 않음을 광고를 보며 깨닫는다. 튀르키예 구호 물품을 모으면서 평화를 짓는 것이란 무엇일까 생각해본다. 각자 자리에서 할 수 있는 만큼의 도움을 만들어내고 그 도움의 물결이 튀르키예에 닿을 때 고통을 함께 나누려는 따스한 마음으로 전해지는 것은 아닐까. 그곳과 당신에게 평화를 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