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평택의 중심지 원평동, 환경의 보고 원평습지 

철새의 낙원

안성천이 원평동을 감아 흐르다 통복천과 도일천 하구에 닿는 곳 신대체육공원 인근의 잔잔한 물엔 큰고니들이 있다. 지난 가을 시베리아와 캄차카에서 날아왔을 큰고니들은 고집스레 그곳에서만 논다. 수량이 늘고 맑아진 통복천엔 청둥오리, 쇠오리, 논병아리, 가마우지, 백로 등 다양한 새들이 있다. 그 물줄기 상류 배다리저수지 눈밭에 기러기들이 앉아있다. 기러기들은 또 그 곳만을 지킨다. 오랜 세월 퇴적물이 쌓여 만들어진 원평습지 삼각주엔 오래 묵은 왕버들이 무성하다. 그 옆을 지나는 교량엔 마침 유선형의 고속전철이 스르륵 지나간다.

 

옛날 평택의 중심지 원평동

철뚝 너머로 불리던 평택역 철도 남쪽은 사실 6.25 때까지만 해도 군청, 경찰서, 세무서, 금융조합 등 주요 기관들이 모여있던 평택의 중심구역이었다. ‘서부동(西部洞)’에서 ‘원평동(原平洞)’으로 바뀐 이름에도 원래 평택의 중심지였다는 토박이들 자부심이 담겨있다. 평택동 통복동 일부와 군문동 신대동의 4개 법정동으로 짜여진 원평동은 북쪽으로 신평동 세교동과 남쪽으로 안성천 건너 팽성읍, 서쪽으로 고덕면과 접한다.

이곳엔 기차역과 옛 1번국도, 38국도와 45국도, 서해바다로 연결되는 수로교통의 잇점으로 물산이 모이고 각처로 거래되어 나갔다. 역 앞의 5일장인 평택장, 곡물 포목 어염을 무역하던 상업조합, 평택초등학교 자리의 우시장, 지금도 흔적이 남아있는 냉동창고 등이 그것들이다. 이렇게 사람과 물산이 모여드니 ‘평화병원’이 세워졌고 정미소, 연탄공장, ‘방학소주공장’이 생겼다. 골목 안엔 마차공장, 말광고집(짐마차용 말을 사고파는집), 여관, 양복점, 자전거포가 생겨났다. 이렇듯 고도(古都)였던 원평동에서는 옛날 주요기관 자리에 동판 표지 설치작업을 하고 있다. 박수를 보낸다.

서부역 광장 앞쯤의 춘원 캬바레는 평택 최초의 무도장으로 근동의 멋쟁이들이 드나들던 곳이다. 한날 그윽한 음악에 춤사위가 돌아갈 무렵 동네 아이놈들이 문방구에서 산 폭음탄을 캬바레 환풍구에 던져넣고 달아난다. 며칠 후 현장을 확인하던 범인들의 눈엔 모기장으로 가려진 환풍구가 보였다.

 

옛날 원평동 사람들

옛 원평동 구도심엔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모여 살았다. 평택의 상류층들이 있었는가 하면 오직 배짱과 깡다귀 하나만을 믿는 바닥 인생들도 있었다.

통복건널목 인근에서 한성여관을 운영했던 김한식 박복동 부부는 슬하에 7남매를 둔다. 36년생인 큰아들 김학영은 KBS 기자로 출발해 보도본부장과 KBS 문화사업단 사장을 했다. 39년생인 둘째 아들 김학주는 서울중‧고교를 거쳐 육사를 나왔다. 명석했던 그는 육사 19기 중에서도 항상 선두를 달렸지만 장군 진급을 눈앞에 둔 대령 때 교통사고를 당하며 전역을 하게 된다. 안타까운 일이었다. 통합 평택시의회 부의장을 했던 김학연은 막내였다. 그들의 학업과 성장의 배경엔 모친 박복동과 외할머니의 지원이 있었다. 딸만 둘을 둔 외할머니는 신여성이었고 외손주들에게 물심의 영향을 미쳤다.

통복5리 말광고집 아들 박명구는 43년생으로 키가 155Cm 정도인 사람이다. 작은 체구에 비해 어릴 적부터 골목대장에 근력이 뛰어난 꼬마장사다. 성깔도 매워 멋모르고 그를 깔보다가는 큰코 다친다. 상대의 가랑이 밑으로 들어가 번쩍 일어서면 덩치 큰 사람도 하릴없이 나가떨어지는 정도였다. 역도 선수가 된 그는 중고등학교 시절부터 전국체전 52kg급에 17연패(連霸)의 기록을 세웠다. 체육특기자로 중앙대학교 입학시험 때다. 턱걸이를 50회까지 세던 시험감독관은 그에게 그만하고 내려오라고 했다. 그는 용케 ROTC 장교가 된다. 대한민국의 가장 키 작은 장교였다. 체육 교사가 된 그는 나중에 교장으로 마무리했다.

40년생 김철수는 태권도 고단자인 무술인이다. K-6의 미군 무술 사범으로 있다가 부대에 근무하게 되고 부대 근로자들의 노조위원장까지 하게 된다. 노조위원장을 하면서 평택사람들을 많이 취직시키고 돌봐주었다.

유철준은 평택의 건달이다. 한동네였던 그의 수하와 친구들은 대개 120Kg이 넘는 거구들로 유철준을 중심으로 5형제 클럽으로 불렸다. 그들은 천안 건달 조일환 일파를 꺾은 완력의 소유자들이다. 조일환은 5~60년대 전국에서도 알아주던 건달이었다. 유철준과 그 친구들은 안정리 미군 부대에 다니게 되고 유류를 다루고 운반하는 부서에 배치되었다. 물자가 귀하고 부족했던 시절 미군 부대의 물자는 풍족했고 그들 눈에 빈틈은 보였다.

그들 중엔 돈을 모아 운수회사를 차린 이도 있고 유철준은 서울사람이 돈을 대 만든 택시회사에 책임자로 활동했다. 택시가 귀하던 시절 택시회사는 화수분이었다. 그는 회사돈을 마구 쓰고 해결할 수 없게 되어 떨려 나올 상황이 되자 세무서 증차 담당에게 ‘그동안 맡겨놓은 돈’을 가져오라 요구한다. 그의 성정을 잘 아는 담당은 군말 없이 토해냈다. 짓궂고 뻔뻔한 그의 배짱은 살아있는 사람들 입으로 재미있게 회자 된다.

팽성 방향 45국도와 안중 방향 38국도는 오로지 통복 건널목을 건너 양방향으로 꺾어지는 좁은 외길 뿐이었다. 그 좁은 길로 팽성 K-6부대와 서부 광덕과 원정리 부대를 왕래하는 미군 트럭이 빈번했다. 규정에 충실한 미군은 건널목과 좁고 굽은 길에서 서거나 서행하며 속도를 낼 수가 없다. 이때를 틈타 슬그머니 트럭 뒤로 올라 번개처럼 차 밖으로 물건을 내던지는 자들이 있다. 대개 십육칠팔세의 근처 아이들이다. 학교도 그만둔 미성년의 녀석들은 물정이 빠삭하여 레이션 박스나 청바지 등 의복 박스, 다리미 등 전자제품이 걸리면 눈빛이 빛난다. 하루는 큼직하고 길쭉한 물건을 내던졌다. 외마디 비명소리와 함께 패대기쳐진 침낭 속에서는 미군이 꿈틀대며 기어 나온다. 기함하여 놀란 녀석들은 순식간에 사방으로 달아났다. 어려웠던 시절의 그늘진 모습이었건만 얘기를 들으며 웃음이 터진다.

 

환경의 보고 원평 습지

원평동 안성천 일대는 ‘노을생태문화공원’이 조성되고 있다. 또 평택시가 환경부 공모사업에 선정된 안성천 8Km 구간 ‘친환경 수변 문화공간 조성계획’은 850억 규모의 치수, 환경, 수질, 친수 등 환경부 물관리일원화사업의 일환이란다. 잘된 일이다. 이곳 안성천의 습지와 넓은 둔치는 평택의 큰 자산이다. 아무쪼록 선진국답게 철새들을 멀리서 바라보며 휴식하는 멋진 습지생태로 가꾸어지기를 바란다.

원평동 앞을 흐르는 강은 온전히 평택의 중간을 흐른다. 이곳을 ‘평택강’이라 부르는 사람도 있다. 자연과 사물의 이름은 사람 입에서 생겨나는 것이니 세월이 흐르면서 부르기에 자연스러워지는 때가 있으리라.

 

 

이계은

평택섶길해설사

전 평택시 송탄출장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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